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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Au

회색2026. 07. 26.조회 8#怒赤
레드가 인간이고 도키가 걍 돌부처같은 것임 아직 저렙 닌자떨거지인 레드가 임무 나갈때마다 저 성공하게 해주십쇼 하고 먹다 만 칼로리바란스나 씹다 만 양갱같은 걸 버리던 사당인지 불상인지 뭔지 모를 것이 있었는데...왜 이렇게 아리까리하게 쓰냐면 대체 뭔 기준으로 신사에 신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하는지 모르겠기때문이지..... 여튼 그런 것이 있었는데 레드가 어쩌다 삽질해서 뒤질뻔한 위기에서 적이 발을 헛디뎌서 레드 칼에 꿰여 죽는다. 그 후로 레드가 노려야 하는 중요인물이 급사하는 일이 반복되어서 레드는 왠지 ㄷㄷ한 기분이 드는데.... 하지만 손안대도 코풀어지는 일이 반복되니까 가끔 하던 음식물쓰레기 무단투하를 그만두게 된다. 이런거에 안 빌어도 어차피 잘되겠지 싶어서... 레드가 어느날 집에서 잠을 자는데 나름 닌자집이라 보안이 철통같은데 현관 밖도 아니고 바로 침실 밖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림 막 단체로 합창하듯 한 남자 목소리가 항의를 함 왜 공물을 바치지 않는 거냐 우리 주인님을 무시하는거냐 파르르 너를 지금 조지지 않는 건 우리 도키님께서 죽이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는 좌시할 수 없다 파르르르..... 레드는 ㅇㅁㅇ; 하고 깨어남 꿈이었나 싶었지만 뒤가 찜찜해서 칼 꼬나들고 방문을 열었더니 거실에 잔뜩 흙발자국이 늘어서있는 것이었다 현관문은 잠겨있는데...... 생각해보니 자기가 음식물쓰레기 투하하던 사당은 분명히 너무 외져서 청소부도 안 다닐텐데 아무리 뭘 버려도 다음날이 되면 깨끗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레드는 너무나도 ㄷㄷ하였다 그래서 이번엔 먹다 만 쉬레기들이 아니라 제대로 떡이랑 과일이랑 과자랑 챙겨서 사당 앞에 가져다놓고 도움주신 건 감사한데 자기 일에 더는 상관하지 말아주십사 굽신굽신하고 돌아온다. 그날 레드는 꿈을 꿈 한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레드 옆에 앉아서 내려다보다가 내 부하들이 너무 폐를 끼쳤다 ㅈㅅ하다 하고 말하곤 요즘 놀러오지 않더니 간만에 봐서 반가웠다 근데 왜 꺼지라고 하느냐 내 도움이 필요없었느냐 공물 바치는 게 부담이 되느냐 물어보는데 씨발 말하는 놈이 입이 안움직이는 것이었다 입은 안움직이는데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 것 같아서 레드는 쟤가 인간이 아니구나 싶었다 너무나도 ㄷㄷ하였다. 머리로는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지 말을 고르는데 정신나간 입방정은 거침없이 터져서 레드는 그만 잘 아시는군! 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눈썹 하나 안 까딱이는데 주변에서 땀내나는 남자목소리가 합창을 했다. "네 이놈 감히 직계의 도키님께 뭐라고 한 거냐!" 레드는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존나 막 삿갓을 쓴 남자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레드는 아무리 자기가 지금 좀 당황했다지만 저 많은 사람의 기척을 어떻게 눈치채지 못했나 싶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람모양은 사람모양인데 느껴지는건 그냥 돌덩어리 비슷했다. 레드는 지금 자기가 적의 환술에 빠진거거나 꿈을 존나 리얼하게 꾸고있거나 정말 초자연적 영적체험을 하고있는 거 셋 중 하나라고 생각을 했다. 레드는 주변사람들한테 닥치라고 손짓하면서 묵묵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한테 쓸모없는 도움이었다, 나는 나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 하고 허세를 튕겼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레드는 또 입도 안 달싹인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너는 내 도움을 받아서 산 목숨이 아닌가? 그 순간 레드는 잠을 깨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꿈이었는데도 꿈 속의 남자가 너무 선명해서 무시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레드는 넌 내 도움으로 살았으니 계속 공물을 바쳐라 영구노예새끼야 정도로 말을 이해하고 오만 짜증을 내면서 출근준비를 시작했다. 이거 굿이라도 해야 하는거 아닌가 싶긴 했는데 왠지 그랬다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의 남자는 자길 죽일 생각이 없던 것 같은데 주변의 남자들은 자기한테 살기를 뿜고 있었던 것 같았다. 레드는 그래서 편의점에서 아침식사를 고르다가 예전에 사던 칼로리바란스같은걸 포기하고 돈 좀 써서 도시락 세트를 산다 그리고 한 입도 안먹고 도키(로 추정되는 돌덩어리) 앞에 두고 출근을 한다. 레드는 그 날 밤에도 꿈을 꾼다. 꿈속의 레드는 존나 으리으리한 대궐앞에 서 있었는데 삿갓 쓴 경비들이 양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똑같은 삿갓 쓴 애들이 나와서 손님을 어디 밖에 두냐고 지들끼리 화내면서 레드를 안으로 들여갔는데 저번이랑 다르게 태도가 좀 누그러진 것 같은 것이다. 레드는 못참고 깐죽깐죽 왜 갑자기 이렇게 닭살돋게 구는 거지? 하고 물어봤는데 삿갓 남자들이 동시에 네가 예를 갖추었으니 우리도 그만큼 예를 갖추는 거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같이 있는 남자들만 대답한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대답한 것 처럼 공기가 울려서 레드는 아 씨발...역시 이 새끼들 존나 위험하다ㄷㄷㄷ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집 안에 들어와서 몇개나 되는 방 문을 지났는데 첫번째 방은 벚꽃이 휘날리는 봄 밤이었다. 연못 위에 뜬 등에서 나오는 불빛이 벚꽃을 비추고 있었다. 분명히 집 안에서 방으로 들어섰는데 주변이 벽도 없는 실외라 레드는 경악해서 숨을 켰다. 연못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나 들어간 두번째 방은 햇살이 쨍하고 매미가 울어대는 산 속이었다. 산 속에 개뜬금없이 공중에 문이 떠 있었는데 그 방에 들어가니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색 밭이 펼쳐져 있고 바람이 선선한 저녁이었다. 레드는 다음 방의 계절을 왠지 예상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방에 들어서자 달이 뜨고 눈이 새하얗게 깔린 설산이었고 아까에 비해선 작았으나 여전히 무슨 문화재같은 큰 저택이 서 있었다. 저택 마루에 꿈 속에서 봤던 남자가 정좌하고 앉아있다가 손짓하는 게 보였다. 레드는 졸라 불안한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발걸음마다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이 찍히며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레드는 씨발 튀고싶다고 생각하며 눈을 굴리다 양 옆에 서 있는 남자들의 발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드는 왠지 ㅎㅎㅎ눈밭을 걷는데 소리가 안 날 수도 있지 닌자도 나는 소리를 안 낼 수도 있지ㅎㅎㅎㅎ하고 웃으며 마저 걸어가 기다리고 있던 남자 앞까지 걸어갔다. 방석이 놓여있길래 아무 말 없이 털썩 앉자 삿갓 쓴 남자들이 대경실색해서 한 대 칠 것 같이 굴다가 집 주인인 것 같은 남자가 손을 휘젓자 뒤돌아서 걸어갔다. 레드는 그들의 발 밑으로 어떤 자국도 남지 않는 걸 발견하고, 이어 온 눈밭에 찍혀있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ㅎㅎㅎㅎ그래맞아 원래 눈을 밟으면 발자국이 안남는게 당연하지 다이어트해야겠다^^;;;;;;; 하고 미친소리를 하면서 한참 돌아보고 있자니 헛기침소리가 들렸다. 레드는 정말 돌아보고 싶지 않았는데 집 주인을 무시했다간 무슨 재앙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단정히 정좌하고 앉은 남자 앞에 어느새 작은 상과 고급스런 찬합이 놓여 있었다. 옻칠을 하고 칠보로 장식한 정교한 찬합은 식기라기 보다는 공예품이라 레드의 몇달 월급은 들이부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입도 열지 않고 말을 했다. 귀한 것이 들어왔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같이 들자고 불렀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레드는 기겁해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존나 입도 안열고 말하는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디서 라디오라도 틀어놓은 것 같았던 것이다. 기겁하는 레드를 쳐다보며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무 갑작스런 초대라 놀랐으면 사과하겠다. 어제도 찾아갔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레드는 남자가 너무 진지하게 사과해서 더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급히 고개를 흔들며 괜찮다고 손을 내젓자 남자가 처음으로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괜찮은가. 용서해 주니 다행이다. 금방 무표정으로 돌아 온 남자가 손으로 찬합을 열었다. 열기 직전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레드를 힐끔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여는 모습이 뭔가 엄청난 것을 보여주며 반응을 기대하는 사람 같아서 레드도 덩달아 기대 속에 찬합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레드는 그 안에서 뭔가 귀한 음식이나 금은보화같은 것이 나올 줄 알았다. 마침내 열린 찬합 안에는 레드가 아침에 공물로 바친 편의접 도시락 세트가 정갈하게 담겨있었다. 레드는 삽시간에 표정이 개썩창이 되어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레드가 기뻐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가 당황하며 물었다. 네게 공물을 받은 것도 긴 시간이 흘렀다만 이런 고가의 물건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 ....기뻐서, 같이 먹자고 불렀다만.....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레드는 이 새끼가 지금 나 놀리나 싶었다. 고가의? 비싸다고? 껄끄럽게 묻자 남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보통 받던 물건의 세배는 넘는 가격이더군. 그리고 남자는 잠시 말을 고르다 다시 말했다. 나는 네가 다시 공물을 바치길 바랬을 뿐이지 무리를 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저번의 제사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너무 무리를 한 게 아닌가? 레드는 자기가 편의점 도시락도 못 사먹는 찐따로 보였나싶어서 뭐라 할 말을 잃었다가 저 놈은 인간이 아니니 기준이 다르겠지 하고 생각을 고쳤다. 댁이 일 도와 준 덕분이 벌어먹는 게 더 많습니다. 그런가? 남자는 그제서야 안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편의점 나무젓가락을 하나 건네주었다. 여러 번 연습을 해 보았다만 아무리 해도 깨끗하게 분리되질 않는다. 괜찮다면 시범을 보여줬으면 한다만. 레드는 슬슬 지쳐가는 얼굴로 젓가락을 깨끗하게 이단분리했다. 그 순간 남자는 물론이고 문 옆에 서 있던 삿갓을 쓴 남자들까지 오오...! 하고 웅장하게 감탄해서 레드는 기분나빠서 소름이 돋았다. 나무젓가락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남자가 기쁜 기색을 풀풀 풍길 수록 레드는 기분이 희한해졌다. 남자가 다른 나무 젓가락을 꺼내서 굉장히 집중하다가 살짝 비뚜름하게 반으로 가르고서는 네 도움 덕분에 향상되었다며 고개를 숙였을 때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레드에게 먹으라고 권한 남자가 밥을 한입, 튀긴 돈까스를 한 입 베어물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꼴을 보니 왠지 덩달아 뿌듯해지는 게 지진아 가르치는 기쁨이 이런건가 싶긴 했다. 소스도 뿌려서 먹어야 해. 일찍 뿌려두면 눅눅해지니까 별로고... 레드가 설명해주면서 소스 팩을 찢자 남자는 다시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소스를 뿌린 돈까스를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먹던 남자가 레드에게 물었다. 왜 안 먹나? 레드는 자기가 먹어도 좀 부족한 감이 있던 편의점 도시락 양과 자기보다 더 큰 남자의 덩치를 비교해서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댁만 먹어도 부족할 것 같아서. 그리고 레드는 한 도시락을 다 큰 남자 둘이서 나눠먹는 건 상상만 해도 게이스럽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두 개를 올릴 테니 그 때 초대해 주던가. 대답을 듣고 눈을 크게 떴던 남자는 다시 가늘게 뜬 눈으로 찬합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웃었다. 그런가. 생각해 준 것인가. 너는 정말 좋은 인간이로군. 레드는 다시 소름이 돋았다. 별 짓 하지도 않았는데 감사받고 칭찬받는 것은 평소라면 기뻐햇을 만한 일이긴 한데, 자기 힘이 개좆만큼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초자연적인 상황 속에서 감사받다 보니 사실이 뽀록나면 얼마나 좆같은 일을 당하게 될 것인지 상상도 안가서 기뻐할 수가 없었다. 레드는 게임 배드엔딩처럼 자기가 뇌만 남아서 살아있게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해보다가 ㄷㄷ하였다. 레드가 뭔 생각을 하든 남자는 어느새 생겨난 주전자의 물을 또 어디서 생겨난 찻잔에 따르더니 마시라고 줬다. 레드는 차에 독 탈 일이 많아서 엔간한 차맛은 다 알고 있었는데도 무슨 차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맛있는데 무슨 찹니까? 모르는 게 있다는 놀라움 때문에 목소리가 따지듯이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맛있다는 말에 기쁜 기색을 풍기며 대답했다. (레드는 남자가 웃지도 않는데도 왜 기뻐하는지 알 수 있는지를 고민하다가, 기뻐할 때마다 남자의 눈썹이 살짝씩 처진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반도원의 도화차다. 마음에 든다니 기쁘다. 레드는 지금 마시는 차가 자기가 사다 준 편의점 도시락 백개보다 더 비쌀거라는 생각을 했다. 다 마시면 돌아가도 되냐고 물어볼까, 말하면 안되는걸까 고민하며 몸을 배배꼬는 레드를 보던 남자가 말을 던졌다. 나와 있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군. 레드는 정말 끄덕이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남자가 따라 웃었다. 가도 좋다. 레드는 반색하고 물었다. 진짜? 그럼, 하고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레드가 신나서 일어나 신발을 신는 동안 남자가 손뼉을 쳤다. 삿갓을 쓴 남자들이 다가와 일어난 레드의 양 옆에 섰다. 혼자 가지 말고 혈풍련을 꼭 대동하도록 해라. 안 그러면 길을 잃는다. 레드는 길을 잃는다는 게 그저 헤멘다는 뜻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혹은 죽지도 못하고 개고생한다는 뜻이라는 걸 어쩐지 알 수 있었다. 레드는 뻘쭘하게 돌아서서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상대가 존나 높은 놈인 것 같아서 슬슬 존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물었다. 왜 갑자기 말을 높이지? 아까처럼 편하게 말해도 된다. 레드는 생각했다 아놔씨발 눈치없는 놈... 양 옆의 삿갓 쓴 남자들이 그 말을 듣자마자 레드를 죽이고싶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헤..헤헤...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합니까? 지금까지의 무례도 용서해 주시면..좋겠는데여...^^;;; 레드가 파리처럼 빌든말든 남자는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그래도 된다. 우리는 앞으로 더 친해 질 터이니. 레드는 발목을 조금 넘을락 말락 하는 크기의 돌 불상을 내려다보다가 툭툭 걷어찼다. 옆으로 기우뚱하던 불상이 옆의 불상을 쳤다가 용케 안 쓰러지고 다시 섰다. 도미노처럼 좌좌좍 쓰러지길 바랬는데. 레드는 혀를 차고 고개를 들었다. 우체통마냥 비루한 크기의 사당 안에 세워진 큰 불상이 눈에 들어왔다. 크다곤 해도 성인 남자의 무릎을 겨우 넘길 정도의 크기다. 지장보살상. 육도의 중생을 전부 구제하기 전까진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서원한 대원본존의 얼굴이 무참히 깎여나가 악귀와 같은 형상이 되어 있다. 그 주변부터 길가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작은 불상은 하나같이 삿갓을 쓰고 있다. 레드는 그것들에게도 제대로 된 얼굴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나하나 삿갓을 벗겨 가며 확인한 결과 정말이었다. 레드는 열 두개째의 삿갓을 벗기다 말고 거칠게 집어던졌다. 사람이 오는 것 같지 않은 외진 사당에 얼굴이 뭉개진 불상만 수십 개. 레드는 또다시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직계의 도키라고 불리는 남자의 꿈을 꾼 이래 늘 느끼는 감각이었지만. 나는 대체 무엇에 제물을 바쳐 온 거지? 레드는 작게 욕하며 식은땀과 먼지가 범벅 된 손을 문질러 닦았다. 적어도 남자가 신불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제와서 묻는 것도 이상하다 싶긴 한데... 당신, 누구야? 잔뜩 긴장한 태도로 묻는 레드를 남자가 어떤지 기뻐 보이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답했다. 나는 직계의 도키라고 한다. 네 이름은 어떻게 되느냐? 당신 이름을 물은 게 아니거든? 남자는 아마도 통성명을 하자는 말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기가 막힌 레드가 까칠하게 답하자마자 주변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아마 남자의 시종이나 경비같은 삿갓을 쓴 남자들이 레드를 흉흉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몇몇은 삿갓을 벗고 얼굴을 다 드러낸 채였다. 도련님 과보호도 적당히 해야지. 레드는 입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쫄아들었다. 남자가 손짓으로 시종들을 진정시키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는 물었다. 이름이 아니면 뭐가 궁금한 거지? 난 그 사당에 있는 게 지장보살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레드는 자기가 정말 멍청해 보일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왜 엉뚱한 놈이 대신 받아처먹고 계속 밥 내놓으라며 날 급식소 아줌마처럼 취급하는 건지 궁금하다 이거야. 급식소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그렇게 불리기에는 아직 어린 것 같군.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레드는 분기에 차서 상을 탕탕 내려쳤다. 찻물을 담은 다기가 떨어져 깨질 것 처럼 흔들렸으나 찻물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레드는 잔을 들어 상대의 얼굴에 뿌린대도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남자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옛날. 신화나 전설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옛날에 큰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이 나라에 지진 일어나는 게 뭐 그리 신기하냐고 콧방귀를 뀌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 아주 큰 지진이었다. 놀란 신들이 지상을 포기하고 다카마가하라로 돌아갈 정도로. 레드는 신화에나 나오는 지명을 지진 대피소 정도로 말하는 남자에게 새삼 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남자는 어린 시절의 실수를 민망해 하는 소년같은 표정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본래 도키土鬼는 작은 불상 따위가 아니라 산 줄기 자체인 지신이라고 한다. 땅의 신답게 성실하고 묵묵한 자였는데 어느 날 지진을 일으켜 나라가 뒤집혔다는 것이다. 보다 못해 천상에서 사람을 보내, 지맥을 누르고 핵을 끊어다 봉인을 했댄다. 지장보살의 모습을 새긴 것도 그 가르침에 계도 받으라는 뜻이었는데. 그 이후 잠든 채 긴 시간을 보내다 보살상의 얼굴이 깎여나가면서 표면으로 떠올랐다고. 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분노했는지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는데 레드는 그게 몹시 궁금했지만 그랬다가 지진이 또 터질까봐 묻지 않았다. 도키는 깎여나간 얼굴의 모습이 마치 악귀와 같았다는 말을 듣고 무표정하게 제 뺨을 쓸었다. 그런가. 아무리 깎아 불상으로 만들었어도 결국은 인품이 드러나는 모양이다. ...뭐.... 그렇게 성질 더러워보이진 않는데. 고마운 말이군. 레드는 몇 천 몇 백년 동안 겨우 한 번 화 내는 거 말고 다른 게 보살이겠냐고 생각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남자의 과거 이야기는 너무 까마득한 과거를 그려내고 있어 조부모에게 듣는 옛날 이야기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레드는 조부모나 부모에 대해 몰랐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라는 건 이런 느낌이 드는 거군, 하고 생각하면서 다과를 씹었다. 레드는 문득 발치를 바라보았다. 보도블럭이 깨져나가 흙이 드러나 있었다. 어젯 밤 꿈 속의 남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네가 살고 있는 곳이 곧 내 몸 위인 셈이다.」레드는 담배를 괜히 바닥에 버리고 발로 눌러 껐다. 도키를 담뱃불로 지지는 꼴을 상상하자 기분이 좀 좋아졌으나 한숨이 나왔다. 퇴마사 같은 걸 불러다 떨쳐낼 수 있는 놈이 아닌 것 같았다. 레드가 돌아가려고 할 때, 늘 고개 한번 까닥이고 보내 주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만 더 있어라. 일어나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돌아보는 레드를 뒤로 하고 남자가 손짓을 했다. 타악, 하고 안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새하얀 손 두개가 나왔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는 사람의 피부가 아니라 도자기 같았다. 새하얀 손이 두번 왕복하다 사라지고, 남자의 앞에는 크고 작은 두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자체도 오동나무로 짜고 금분을 발라 꾸민 고급품이었으나 안에 든 것이 더 값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네 덕담에 감사하여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부담 느끼지 말고 받아주길 바란다. 큰 쪽과 작은 쪽, 어느 쪽이 좋은가? 레드는 당연히 둘 다 받아 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쪼잔하게 하나만 주겠다는 게 뭐냐고 욕을 할 뻔 했다. 둘 다 주면 안 되나? 안 된다.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하나 뿐. 남자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당 저편의 삿갓을 쓴 남자들 사이에서 저런 욕심 많은 자가 다 있다니... 하고 통탄의 한숨이 터졌다. 다 들린다, 병신들. 레드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상자를 노려보았다. 이 상황은 동화의 닳고 닳은 클리셰다. 한 쪽에는 좋은 게 들어 있고 한 쪽에는 나쁜 게 들어있겠지. 정말 옛날 이야기로구만. 레드는 투덜거리면서도 고민에 빠졌다. 이게 사람끼리 하는 장난이었으면 기껏해야 폭탄이나 독가스가 들어있는 정도겠지만 상대는 요괴고, 그건 상자 한번 잘못 개봉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작은 상자는... 크기로 봐서 보석이 들어 있을 것 같다. 보통 옛날이야기에선 작은 상자가 진짜 선물인 법이지만, 그 고정관념을 역으로 이용한 함정일지도 모른다. 레드는 작은 상자를 노려보다 말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표정은 전혀 번화가 없었지만 손이 안절부절 못하는 듯이 꽉 쥐어졌다 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레드는 큰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 크기 한가득 보물이 들어있다면 대박이겠지만, 자신이라면 미쳤다고 큰 상자 한가득 보물을 채우지는 않는다. 분명 뭔가 속임수가 있다. 걸리면 좆되는 폭탄이거나, 좋은 게 들어있어도 질소칩마냥 80% 이상이 완충제일 터다. 레드는 다시 한번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없었지만 손을 편안하게 두고 등을 곧게 편 채 어쩐지 기쁜 듯 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드는 시험삼아 손을 뻗어 큰 상자를 짚었다. 남자의 표정이 희미하게 풀어졌다. 손을 옮겨서 작은 상자를 짚었다. 남자가 당장에라도 고개를 젓고 싶은 사람 처럼 레드를 노려보았다. 레드는 곰곰히 생각하는 척 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손이 자신만만하게 작은 상자를 낚아챘다. 이거군! 보통 요괴는 욕심 많은 놈을 좋아하지는 않지? 그래서 작은 상자 쪽에 금은보화를 넣어 놓는 거고! 선물은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 안에서 주는 게 좋지 않나? 그런 아까워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라면 말이다. 어쨌거나 물러주는 건 없다! 네 선물은 잘 받아가겠다! 남자는 안타까운 눈으로 레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네 선택을 존중하겠다. 내 선물이 마음에 들길 바란다. 레드는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남자의 울상이 된 표정을 떠올리니 내기에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꿈 속에서 딴 상품이니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낄낄거리며 기지개를 펴는 레드의 시야에 네모진 물체가 들어왔다. 레드는 자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물건의 등장에 기겁해서 물러났다. 폭탄? 독가스? 아니면 협박용 신체 일부? 아무래도 그 물체는 상자로 보였다. 오동나무로 짜고 금분으로 꾸민, 어제 밤 요괴에게 받아 온 선물. 레드는 잔뜩 긴장한 발걸음으로 다가가 상자를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꿈 속에서 받은 그 상자다. 레드는 새삼스럽게 적외선 탐지기고 방법업체고 트랩이고 다 씹어버리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에게 이를 갈았다. 줘도 좀 은밀하게 줄 것이지 이렇게 남의 방에 떡하니 두지 말란 말이다. 협박같아서 목덜미가 선뜩하다고! 레드는 툴툴거리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금 덩어리가 원석 상태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기는 결국 이 몸의 승리였지." 레드는 뭔가를 손 안에서 던졌다 받는 짓을 반복하며 의기양앙하게 웃었다. 도키는 톡, 톡 일정한 소리를 내며 던져졌다 내려가길 반복하는 금덩이에 짧게 시선을 주다 차를 홀짝였다. 금덩이를 높게 던졌다가 중간에 낚아챈 레드가 보란 듯이 금을 깨물고는 얕게 남은 잇자국을 보며 웃었다. [우리가 내기를 한 적이 있던가?] "순금이군. 역시 내가 이긴 게 맞잖아? 내 눈에만 금으로 보이고 남의 눈엔 나무토막이나 돌덩이로 보이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도키는 어쩐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네게 보내는 성의의 표시인데 가짜를 보낼 리가 없지 않나. 그렇게 말하지 마라.] "헤, 말은 잘 하시네. 이런 이야기는 다 패턴이 정해져 있다구. 내가 고른 쪽에 금이 들어있었다면..." 레드는 한 호흡을 참고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은 채 도키의 얼굴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다른 한 쪽에 담긴 것은 벌레나 기근이나 홍수 같은 재앙이겠지. 요괴의 함정을 기지로 빠져나간 이야기는 흔해빠졌지만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는데." 도키는 낭패한 얼굴로 레드를 바라보았다. 레드는 그 얼굴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임무 실패의 원인을 뒤집어 씌울 때 동료들이 짓곤 하던 표정과 닮았다.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해명하고 싶어 몸이 단 사람의 표정이었다. 레드는 목석이 지어낸 표정이 너무나도 인간 같아서 조금 재미있다고 느꼈다. [그런...... 그런 것이 아니다. 네 말대로 길흉을 고르는 내기를 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애초에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요괴가 하는 말을 어떻게 믿지? 믿게 하고 싶다면...." 레드는 대뜸 말을 받으며 입술을 혀로 쓸었다. 선물 상자를 열었을 때 아무리 좋은 것이 나왔어도, 고르지 못한 선택지는 언제나 미련을 남긴다. 레드는 큰 상자 안에 든 것이 재앙임을 확인하고 확고부동한 승리를 공고히 하고 싶었다. 물론, 그 안에 든 것이 더 좋은 것이라면 죽을 만큼 억울하긴 하겠지만. "큰 상자. 보여 줘." [...그건 법도에 어긋난다.] "아하, 역시 별로 좋지 않은 게 들어있었고 나는 1/2 확률의 도박에 성공한 거군?" [도박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레드는 도키의 힘 빠진 얼굴을 보며 어쩐지 어린애를 괴롭히는 즐거움을 느꼈다. 쓸데없이 융통성 없는 아이가 어른 말에 버팅기는 것 같은 불쾌감과 함께. "그럼 이건 어때? 어제는 금덩어리를 선물했으니 오늘은 그 상자를 선물해 줘. 대신 열어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이면 두고 갈 거야." [둘 다를 가질 수는 없다.] 도키는 괴로운 눈으로 레드를 바라보다가 손짓을 했다. 탁, 하고 작은 소리와 함께 장지문이 열리고 어제와 같은 자리에 상자가 하나 놓인다. 꾸며진 장식도 크기도 어제 레드가 고르지 않은 한 쪽이다. 상자를 든 도키가 영 내키지 않는다는 손짓으로 상자를 열었다. 레드는 무심결에 목을 쭉 뽑아서 안을 바라보았다. 상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레드가 맥 빠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뭐야? 빈 상자잖아. 이걸 가지고 그렇게 까탈을 떤 거냐?" [빈 것이 아니다. 남는 한 쪽에 담기는 것은 사람의 미련이니까. 네가 하나의 상자를 고른 순간 나머지 상자에 든 것은 의미 없는 것.] 도키가 한쪽 밖에 없는 눈을 감으며 상자의 뚜껑을 봉했다. 침음성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고요했지만 결백을 주장하는 죄인 같은 데가 있었다. [방금 연 것으로 미련과 후회와 망집이 풀려났다. 본디 나는 이 상자 가득히 서해 바다의 진주와 칠보와 보옥을 담았다. 네가 나를 믿고 큰 상자를 선택해 주길 바라면서. 그러나 네가 골라주지 않았으니 의미가 없게 되었다. 작은 쪽을 고른 이유가 탐심이 없기 때문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었겠지만...] "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놈 같군?" [실제로 그렇다.] 도키는 그 말을 끝으로 말을 멈추었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묵직하게 공기가 가라앉아서 레드는 몸둘 바를 몰랐다. 골수까지 뽑아다 바칠 것 같은 말과는 달리 영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레드는 머리를 굴렸다. 어디서 빈 상자를 열어제껴놓고 좋은 것을 담았다고 구라를 친단 말인가? 하지만 남자의 말은 쓸데없이 진실성이 있어서, 레드는 순식간에 상자 가득 찬 금은보화의 망상에 빠져들었다. 주고 싶다는 남자의 말. 큰 상자를 고르면 미소 짓고 작은 상자를 고르면 울 것 같던 남자의 얼굴. 몇 번이고 선택을 번복하게 내버려두었던 기억이 떠올라, 요괴의 말에 홀린 듯이 입이 열렸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내기를 하는 게 어떠냐? 다시 한 번 고르게 해 줘. 좋은 것과 빈 것이라도 좋고, 좋은 것과 나쁜 것도 상관 없고, 좋은 것과 좋은 것인데 양의 차이가 있어서 기분이 좆같아지는 쪽도 상관 없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를 골탕먹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도키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레드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받아 돌려주며 레드가 경박하게 웃었다. "요괴나 귀신이라는 것들은 으레 그러려고 기어나오잖아?"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만.] 도키는 한숨을 쉬고 소매를 한 번 저었다. 소맷자락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같은 크기의 상자 두 개가 떠올랐다. 작고 큰 상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레드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가 표정을 고쳤다. 어차피 작은 쪽에 작은 금덩이, 큰 쪽에 많은 보물을 담았던 호구새끼다. 저 만한 상자에 가득 들어있는 금이면 평생도 먹고 살 거다. 그러면 누가 이런 꿈따위 다시 꿔 줄까보냐. 퇴마사라도 불러다가 떨궈버리고, 더럽고 위험한데다 박봉인 3D업종도 때려치고, 하와이나 몰디브에 가서 가슴이나 만지며 여생을 보내는 거다. 어느 상자를 골라야 할지 살피며 눈을 굴리는 레드에게 남자가 물었다. [하나는 벌레와 기근이요 하나는 무병장생의 감로주다. 너는 어느 쪽을 고를 테냐?] “......” 둘 다 참으로 현실감 없는 선택지였다. 상자에 물리적으로 담길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실체가 없어서 더 그렇다. 레드는 맥 빠진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질병은 그렇다치고 기근은 어떻게 할 건데.... 머리카락이 기근? 나 반짝반짝해지나?” 도키는 농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대답했다. [극심한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게 될 것이다. 일단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들겠지. 그러다 하지가 지나면 장마로 물이 불어 농작물이 쓸려나가고, 겨울이 오기도 전에 내린 서리로 남은 것들도 얼어 죽는다. 땅은 갈라지고 척박해져 차후 10년 안에는 싹이 트지 못하게 되겠지. 그리고 너는 언제나 반짝반짝하다.] 레드는 대머리가 되는 거냐는 제 농담이 상세한 기근 매뉴얼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나아가서 ‘반짝반짝해진다’는 표현을 뭐라고 이해했는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레드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자기 입을 쳐 버리고 싶어졌다. 도키는 떪은 감씹은 표정을 한 채 우물거리는 레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인간이 실수로 재앙을 불러오는 이야기는 흔한 고사가 아니냐.] “장난해? 갑자기 너무 레벨이 올라간 거 아니야?” [네가 금을 기대하고 한 말 같기에.] 남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보다 더 값진 것을 걸었지. 한 쪽의 급이 올라가면 다른 한 쪽도 비슷하게 맞춰줘야 하는 법. 어느 쪽도 인간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기쁘지 않으냐?] 아니, 누가 봐도 밸붕인데. 레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백억받기와 고자되기를 두고 고르라는 것과 뭐가 다르겠냐만 자기가 고르는 것이 뭔지 알 수 없다는 조건이 악질적이다. 아무리 등골을 뽑아다 바치지 못해 안달이 난 호구같이 군다지만 요괴라 그런 거겠지. 인간을 엿 먹이며 낄낄대는 음침한 것들. 레드는 잠시, 주변 사람들도 그리 다를 바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털었다. “질병과 기근 쪽은 현대 기술력으로도 가능... 아니, 기쁠 것 같냐? 난 그냥 금 정도면 된다고! 이런 선택 따위......” [한 번 고르면 물릴 수 없지. 허나 인간 아이가 지기엔 너무 큰 판돈을 건 것도 사실이니 내 작은 부탁을 들어준다면 물러 줄 수도...] “......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너무 큰 짐에 눌려 당혹한 아이의 얼굴이 변검술의 가면처럼 색채를 바꾼다. 빙글거리는 미소를 띠고 레드가 웃었다. 잠자리의 양쪽 날개 중 어느 쪽을 먼저 찢을 지를 고민하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도키는 안쓰러운 마음에 기회를 주려다 말고 말문이 막혔다. 레드의 손이 두 상자 위를 까딱대며 정신 사납게 오갔다. 도키는 뭐라고 훈수를 두고 싶어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더 좋은 것을 밀어다 주고 싶은 호구 같다고 생각하면서 레드는 고르려다 마는 행동을 반복했다. 기실 레드가 보고 있는 것은 재앙과 무병장생이 담긴 두 상자가 아니라 그것을 내민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른 선택을 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어느 쪽으로 손이 가든 동요가 없다. 레드는 손짓으로 알아내기는 포기하고 직접 떠 보기로 했다. “당신, 내가 고민할 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무슨 생각을 하나?] “나는 지금 어느 쪽이 질병과 기근인지 알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데. 물론 그걸 피하려고 가 아니라 선택하고 싶어서야.” [제정신이냐? 다른 한 쪽은 무병장생이다.] “난 다른 쪽이 좋다니까. 이왕이면 아메리카를 덥쳐 주라. 그러면 농업 생산량이 전 세계적으로 확 망할 텐데.” [,,,,..] 도키는 긴 시간 침묵했다. 그러다 레드가 당고를 하나 다 먹고서야 질문을 했다. [아메리카?] 정말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 듯한 질문이었다. 레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가 말한 지명이 어디 국민 2명짜리 자그마한 나라도 아니고 미국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러다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아마 시대를 천년은 거꾸로 살고 있는 요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천 년 전엔 미국을 뭐라고 불렀을까. 애초에 미국과 문호 개방을 하기는 했나? “미합중국 몰라?” [모르겠다. 처음 듣는 지명이다.] 외래어 대신 한자로 말하면 알아듣지 않을까 싶은 기대도 무참히 박살이 났다. 레드는 나쁜 상자를 고른 순간 미국 대평원에 퍼져나가는 가뭄과 홍수와 서리와 기타 등등의 재앙을 상상하다가 도키의 세계지리 지식 부족이라는 장벽에 부딪혔다. 꿈이 깨진 레드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미국은 바다 건너 있는데.... 이렇게 말해봤자 모르겠지?” 레드는 포기하지 않고 설명할 말을 골랐다. 공항에서 비행기 표를 사서 몇 시간을 가면 된다는 설명이 어느 방향으로 몇 리를 가야 하냐는 질문에 중간에 끊기고, 1리가 몇 km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다가 환산하는 법을 알아봤자 미국까지의 상세한 거리를 알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십여 분. 옛날에도 외국과 교류가 있기는 했으니 색목인들이 사는 나라라고 설명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했다가 서양인들의 국적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1시간여가 지나갔다.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남자는 세계지리가 역사 강좌로 바뀌어가는 시점에서야 무릎을 쳤다. [그렇군. 미리견을 말하나.] “미리견......?” 레드는 생소한 지명에 입을 벌렸다. 분명히 같은 말로 대화하는 것 같은데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열심히 설명해줬는데 그러고도 못 알아먹고 저러는 거면 저 요괴는 지진아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메리카는 미리견인가보지 뭐. 쌀나라라고 부르는 것도 미국인이 듣기엔 라이스 컨츄리 쯤으로 들릴 텐데. 레드는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뭐 그런가보지.... 여튼 거기에 기근을 퍼트려줬으면 하는데.” 도키가 한참을 침묵하다가 질문을 했다. [...왜 그렇게 흉액 쪽을 좋아하지? 보통은 반대가 아니냐?] “가치라는 건 상대적이라는 거 알아?” 레드가 으스대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두 개의 상자 사이를 장난치듯 오가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까딱까딱 흔들린다. 영문을 모르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레드가 쯧쯧, 하고 짧게 혀를 차고는 입을 연다. “여기 맛있는 당고가 있다고 쳐.” [알겠다.] “.....달라고 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치라고.” 레드는 땅에서 솟은 것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어디에서 꺼낸 것도 아닌 당고가 어째서 눈앞에 나타났는지가 더는 신기하지 않았다. 지극히 정상적이던 감각이 이미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핀잔을 주면서도 반질반질한 윤기를 이기지 못하고 받아들어 입에 넣는다. 쫀득한 떡을 이로 질겅거리면서 레드는 말을 이었다. “나랑 남이 둘 다 당고를 먹고 있는 거야. 그럼 맛있기야 하지만 그걸로 끝이지. 하지만 남들은 굶어 죽어 가는데 나 혼자만 당고를 먹고 있다고 쳐.” 레드는 한 덩이가 빠져 꼬치가 비죽이 튀어나온 떡 세 개짜리 당고 꼬치를 지휘봉처럼 휘둘렀다. “그러면 이 당고는 꿀맛이겠지? 남들은 다 이걸 부러워하겠지? 모조리 매점매석 해다가 장사까지 한다면 대박이 나겠지? 나는 너무너무 행복하겠지?” [측은지심을 느끼지는 않고?] “그런 거 느낄 거면 칼밥 먹고 못 산다. 남들이 다 망하고 거기서 나만 잘 살아야 진짜 행복이지. 알겠어? 나는 질병과 기근 쪽을 고르고 싶다고. 그러니까 무를 필요는 없고, 뭐가 뭔지 가르쳐 주면 고맙겠는데. 무르는 게 아니라 가르쳐 주는 대가라면 뭔가 해 줄 수는 있다.” [...그런가. 그렇게 입을 놀려서 내게 무병장수 쪽을 말하게 할 생각이었겠구나. 얕은꾀를 부리는군.] 말의 내용과는 달리 남자는 반색했다. 입도 열지 않고 묵묵한 표정 그대로 어찌 그리 화색이 도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레드가 자신을 속이려 든 것 보다도, 쾌락을 위해 흉액을 고르는 악취미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기쁜 것 같았다. 자신을 보는 시선에 인품에 대한 신뢰가 담겨있어 레드는 별 짓도 안 했는데 어마어마한 배신을 한 기분이 들었다. “가르쳐 줄 건가 보지?” [그럴 수는 없다.] 레드는 표정을 살피는 짓을 그만두고 눈을 감은 후 손에 잡히는 쪽을 골랐다. 고른 순간 낮은 탄식이 들려와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상자는 묵직하지도, 뭔가가 든 것처럼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딱 나무 상자 하나의 무게를 차지하는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던졌다 받았다 하는 레드의 태도는 도키의 눈에는 일어날 결과를 모르는 무지에 근거한 것 같았다. 물론 레드는 안에 든 것이 폭탄과 비견될만한 재액임을 잘 알았다. “내가 제대로 고른 것 같군. 그래, 그럼 질병과 기근이 일어나는 기준은 뭔데. 내 주변 사방 몇백 리? 아니면 이 나라 전체? 이걸 열면 내 주변부터 질병과 기근이 풀려나는 건가?” 기쁨을 넘어서 숫제 이죽대며 놀리는 어조였다. “근데 당신 그런 짓 하면 또 봉인되는 거 아니려나? 지진 내고서 봉인됐다며. 근데 누가 잡아 처넣는 거야? 요괴들도 경찰 같은 게 있나?” 도키는 선택된 상자와, 자기 앞에 남겨진 선택되지 못한 상자와, 아무렇지도 않게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방법을 생각하는 인간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후회하지 않을 것 같나!] 레드는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리도 아닌 무언가였지만 찡하게 공기가 진동하는 느낌이 났다. 순식간에 등골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입가를 끌어올린 건 거의 허세였다. “가치라는 건 상대적이라고 했잖아? 장생엔 그리 흥미가 없어. 나는 오래 사는 대신 탱탱하고 예쁠 때 죽고 싶거든.” [내게는 네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후회할 미래가 보인다.] “내게는 다시 봉인된 댁이 이 내기를 후회하는 미래가 보이는데.” 레드는 시시덕거리며 악의에 찬 얼굴로 웃었다. 정말 기뻐 보이는 얼굴이라 도키는 금을 주었을 때와 비교해보며 아연해졌다. 손이 상자의 뚜껑을 열 듯 잡은 순간, 나란히 서 있던 상자 두 개가 동시에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레드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만, 열지 마라. 열지 마. 이 내기는 무효다.] 도키는 결국 무르고 말았다. [고백을 하나 할까.] 도키는 긴 한숨을 쉬었다. [네가 무병장생을 위해 답을 묻거나, 재앙 쪽을 택하곤 물러달라고 떼를 쓸 줄 알았다. 그러면 물러주는 댓가로 매일 찾아와 달라고 할 생각이었지. 내가 네게 죄를 짓게 할 리가 없지 않으냐? 나는 감로를 주고 싶었다.] “내가 뭘 고를 지 멋대로 정하지 말지 그랬나.” [그래도 네가 오래 살기를 바란다. 나는 내일이라도 네가 죽어서 오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요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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