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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치사량 lethal dose

관리자2026. 09. 07.조회 6#1차 BL

00.

나는 내 눈 앞의 남자를 죽일지 살릴지 고민하는 중이다. 세상사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죽였던 남자가 내 사랑을 구걸하고 있다니. 한영원: 수. 히트맨. 한서경: 공. 카지노 사장. 키릴: 공2. 러시아 마피아.

01.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확실하게 기억한다. 내가 7살이고 그가 9살. 그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생이 될 아이를 구하러 고아원으로 찾아온 날이 우리의 첫만남이었다. 아이를 입양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건 고아원 입장에선 큰 이벤트다. 고아원의 모든 아이들이 씻겨지고 단장되어 골라 줄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수풀 속에 숨어 훌쩍이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입양가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기대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 처음 보는 아이가 수풀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왜 울어? 아이는 그렇게 묻고 놀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놀이터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뛰어놀았다. 아이의 깨끗한 옷을 더럽혔다는 공포에 움찔거린 순간 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나는 이 애가 좋아요. 그렇게 나는 한씨 부부의 양자가 되었다. 아이는 고아원에서 가장 예쁜 아이였던 안나 대신 내 손을 잡아주었던 것이다. 한서경이 나의 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방종이 매력이 되는 경우는 흔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서경은 아주 매력적인 개새끼다.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과 섬세한 조형엔 분명 악마적인 매력이 있었다. 예쁜 머리 속도 악마적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도박장을 운영하더니 겸사겸사 마약거래를 시도해서 대박을 내고는 그 길로 코사 노스트라와 멕시코 카르텔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돈세탁과 무기밀매에 손대더니 결국은 미국계 마피아의 가장 훌륭한 사업 파트너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걸림돌들이 머리에 총탄을 박고 죽었다. 그건 내가 한 짓이다. 나는 늘 그의 곁에 있었다. 감옥에 다녀온 8년을 제외하고서. 서경은 때때로 '난 사람은 죽인 적 없으니 네가 더 나쁜 놈인가?' 하고 농담을 했는데 그의 말이라면 따르는 나로서도 그 말엔 웃을 수 없었다. 어쨌건 서경은 아주 잘나가는 사업가... 라기보단 비즈니스 마피아였고 그에게 범죄 이력이 없는 것이 내 자랑이었다. 호텔 MDT 1105호♥ -20:08 다이아 거래 루트에 끼어들어 귀찮게 굴던 이스라엘 놈 하나를 처리한 날 서경이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이번 일의 대가다. 서경이 부탁한 일을 하나 해 주면 그도 나를 한 번 사랑해 준다. 그의 성기를 빨면서 끙끙대거나 다리를 벌린 채 헐떡댈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달려갔다. 샤워를 끝내 촉촉하게 젖은 서경이 목욕가운 한 장만 입고 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 내 승리의 여신!" 그가 내 양 뺨에 뽀뽀하고는 마지막으로 입술에 뽑! 하고 큰 소리를 내어 부딪혔다. 색기있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가 사랑스럽게 휘어진다. 새삼 홀린 듯 바라보다가 괜히 부끄러워 물었다. "승리의 신은 왜 꼭 여신인데요?" "나한테 그딴 거 물으셔도... 바리데기는 왜 여잔데?" 우리는 같이 웃었다. 잠자리는 끝내줬다. 서경은 자기가 흡족할 때 마다 서비스가 늘어난다. 내가 좋아하는 짓과 싫어하는 짓이 제멋대로 섞여있는 점은 별로였지만 그 점이 더 자극적이라 좋기는 하다. 만족스러운 메이킹 러브였다. 떡질을 마친 서경이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 말했다. "아, 그래. 선물이 있어." "?" "세상천지 다 까먹어도 너한테만은 줘야하는데 내가 잊을 뻔 했네." 서경이 사랑스럽게 웃으며 흰 봉투를 건네주었다. 봉투 안에 또 봉투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나온 것은 살짝 비단기 감도는 흰색 종이를 덩굴같은 금색 종이가 감싸고있는 고급스러운 카드다. We are get married. 결혼식에 초대한다는 문구 아래로 한서경과 스텔라 맥런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씌여 있다. 고개를 들자 서경이 바로 눈앞까지 고개를 들이민 채 입꼬리를 들고 웃고 있었다. 쇼 프로 시청 중인 아이같은 얼굴이었다. 스텔라.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디트로이트 갱의 전대 보스의 애인이었다가 보스가 총 맞아 죽은 이후 그대로 보스의 자리에 앉은 여자였다. 늘씬하고 육감적인 몸의 골빈 섹스중독자처럼 보이는 그녀의 제일 무서운 점은 사실 골이 비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모두가 보스는 애인의 총에 머리가 터졌을거라고 생각한다. 새 보스와 서경이 결혼한다고? 나는 불편함을 숨기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반대. 결혼은 안 됩니다." 이어서 청첩장을 반으로 찢었다. 그리고 또 반으로, 반으로... 조각조각난 종이쪼가리를 바닥에 떨궈내고 손을 털며 서경을 노려보았다. 예상대로 재미있어하며 웃는 얼굴이다. 그도 아마 나를 보고 '예상대로'라고 생각했겠지. "흐음." 서경이 실망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내가 뭘 해도 날 좋아할 거라고 안 그랬냐?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면 안 쪽팔려?" "그건 당신이 독신일 때 이야기지요. 솔직히 우리 사이는 당신이 제게 사랑하는 척을 해 주고 저는 그 값으로 노동을 해 주는 일종의 계약 관계라고 생각했는데요.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계약이라니! 섭섭하잖아? 난 널 캔디나 쿠키보다 백배는 더 예뻐한다구." 비교대상이라고 튀어나온 게 애완견 이름인 데서 문제를 못 느끼는 걸까? 설마. 일부러 모욕감을 주기 위해 꺼내든 단어들일 터다. 대놓고 개 취급을 한 남자는 자신이 강아지라도 되는 양 아양 섞인 미소를 지었다. 눈꼬리가 휘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잘생긴 얼굴이 사랑을 구걸하는 애틋함을 더한다. "저기, 내가 결혼한대도 바뀔 건 하나도 없거든? 변하는 건 없어. 난 여전히 너랑 일주일에 한 번은 드라이브를 갈 거고 체크해 둔 맛집에 가서 고기를 썰다가 고급 호텔에 체크인해서 허리아래가 녹아내릴 만큼 사랑해 줄 거라고. 괜찮잖아? 들키면 총 맞는 스릴이 더해지는 거야. 야외 섹스나 카섹스라고 생각해 봐." "내 기분이 달라지거든요. 돈값을 하는 창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유부남이라니." "불륜은 싫어했던가? 여자애들이랑 놀 땐 터치 없었으면서." "사실 그것도 언제나 싫었습니다." "으음." 나는 여기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날 계속 쓰고싶으면 평생 독수공방해요. 그러면 못 들은 걸로 해 줄 테니까." "으으으음." 서경은 한참을 침묵했다.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작게 '진짜?', '정말로?', '진심이야?', '내가 없어도 괜찮겠냐?', '넌 내가 명령해주지 않으면 살 맛이 안나는 매저키스트잖아?', '아, 이건 슬레이브였나?' 하고 새처럼 조잘거리며 주변을 뱅뱅 돌았다. 그리고서 청첩장을 들고, 나를 한 번 보고, 청첩장을 보고, 나를 두 번째 보고, 그것을 정신사납게 계속 반복하다가 가련하게 물었다. "나 이미 턱시도도 맞춰놨다구. 꼭 입고 싶었는데. 안 돼? 턱시도 입은 나 보고싶지 않아?" ...될 거라고 생각하나, 이 씨발놈은. 그건 너랑 내 게이결혼에서나 보고싶은 패션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지금 와서 파혼하면 스텔라가 우릴 죽여서 사지를 토막내어 개집에 던지려고 들 걸. 그냥 꾹 참고 허락해주면 안 돼?" "그럼 스텔라를 죽여줄게요." "에엥? 진심이야?" "네."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우린 여기까진가? 고마워, 네 덕분에 그동안 재미있었어." 돌아온 말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서경은 어깨를 늘어트리고서 팔짱을 꼈다. 어깨에 대충 걸친 코트자락 아래로 팔이 감춰진다. 자연스럽게 젖혀진 채였던 코트자락이 앞으로 떨어지다가 팔에 걸려 각 진 곡선을 그린다. ㅡ그리고 그 아래로 도드라지는 총구의 실루엣. "빵-!!"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총알이 지나간 직선상에는 내 심장이 있었다. 나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총에 맞고 말았다. 그래도 잘나가는 히트맨이었는데 응사하지도 못하고 빠르게. 아니, 사실 시간이 있었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없었을 터다. 나는 저 놈이 다치고 상처입는 것 보다는 내가 죽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니까. 몸이 싸늘하게 식어든다. 피 웅덩이에 처박힌 내 머리채를 쥐어든 서경이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이제 좀 편하지?" 그가 다정하게 웃었다. 미친 또라이 새끼. 심장에 빵꾸 뚫린 인간이 이런다고 잘도 편해지겠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는 손가락은 차갑고 다정스러웠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근데 이거 어쩌나, 아주 영원히 평생 잠들어버리겠네? 우리 예쁜 영원이가 아주 영원히!!" 와하하 웃어대는 목소리엔 아무런 정도 없었다. 그랬는데도 꿀처럼 달았다. "이건 마지막 선물이야." 서경의 얼굴이 천천히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노크하듯 입술을 두드린 혀가 입 안으로 기어들어와 입천장과 입 안쪽 점막을 느릿하게 핥다가 떨어졌다. 서경은 마지막에서조차 혀와 혀가 얽히는 데는 비싸게 굴었다. 경련하는 혀가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르고싶어서 불렀다기 보단 몸이 기억한 버릇 같았다. 응,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나도 사랑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가라앉아가던 의식이 완전히 끊겼다. 다섯 음절의 거짓말이야말로 마지막 선물이었다.

02. / R19

눈을 뜨자 주변은 어두웠다. 나는 죽은 건가? 시야가 온통 흐릿했지만 눈을 깜빡이자 곧 초점이 바로잡아진다. 그리운 방 풍경이다. 그리고 뺨 옆으로 타고 흐르는 물기가 느껴졌다. 눈앞은 눈물 때문에 어른거렸던 것 같다. ...내가 왜 울었지? "울어?" 다정하게 묻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옆을 돌아보자 사랑스러운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겹쳐왔다. 서경이었다. 서경은 두 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고 볼을 부벼오며 물었다. "좋다, 좋다 해 놓고 왜 우는지 모르겠네. 아, 혹시 너무 좋아서 울었나? 내 빅좆이 역시 최고야?" 마주댄 살갗이 찐득하게 들러붙었다. 땀이 배어나 온통 후덥지근했다. 둘 다 맨몸이고 다리 사이가 질척거렸다. 이리봐도 저리봐도 애프터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방금 전에 총 맞아 뒈졌는데 연인의 품 속에서 울며 눈을 떴다. 행복한 악몽 속에 빠진 기분이다. 서경의 손이 손가락걸음으로 내려가 내 아랫배를 더듬었다. 박을 때 배를 만지며 여기야? 이 쯤이야? 하고 물어대는 건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가 만져오는 곳부터 살아나는 감각이 퍼졌다. 나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중이었다. 이건 꽤 정확한 사실인 것 같다. 나는 천천히 서경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 이질감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서경보다 좀 더 어린 얼굴이었다. 머리카락도 조금 더 길었고 뺨도 조금 더 통통했다. 성숙한 남편이 되기엔 아직 앳되어 보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뽀얀 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따스하고 보드라웠다. "...지금 혹시 몇 년 몇 월이에요?" "응? 2010년 9월 17일." 반사적으로 대답한 서경이 눈을 깜빡거린다. 색소가 옅은 눈동자 위로 속눈썹이 나비날개처럼 팔랑거린다. 나는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몇 년이라고? 나는 침대에서 기어나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침대(이 침대는 얼마 안 가서 '방 가운데 놔두니 걸리적거려!'라는 이유로 벽면으로 옮겨졌다.), 햇살을 부드럽게 투과시키는 살랑대는 하얀 커튼(이 커튼도 얼마안가 질렸다며 블라인드로 바꾸었다.), 전체적으로 흰 색과 다갈색을 기조로 한 클래식한 분위기의 침실. 7년 전까지 살다가 이사했던 포레스트 힐의 침실이 이랬다. 팔을 뻗어 베개 옆을 더듬자 리모콘이 척하고 잡혀나왔다. TV를 켜자 아침 뉴스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떠 있는 2010년 9월 17일이라는 글자. 핸드폰(무려 스마트폰이 아니라 폴더폰이었다!)을 열어봐도 떠오른 글자는 2010년 9월 17일이었다. 10년 전이다. "영원아?" 나는 멍한 얼굴을 한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경을 돌아보았다. 서경이 내 우는 얼굴을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 혹시 놀란 얼굴로 입 딱 벌리고서 '헉! 지금이 몇 년이라고욧? 이럴수가! 저는 21세기에서 왔답니다!' 라고 할 거야? 그거 이미 너무 낡은 클리셰라고 생각 안 해?" ".........낡았어요?" 그럼 나는 너무 낡은 클리셰 속에 있군. 시간여행인가? 아니면 꿈? 꿈이라면 전후 중 어느 쪽이 꿈이지? 클리셰라는 표현을 보면 책 속일지도 모르지. 장르는 스릴러겠군. 나는 정말 총에 맞아 죽었나? 방금 총에 맞았던 가슴이 뜨끔했다. 손을 얹어보자 피가 철철 흐르던 가슴에는 생채기조차 없었다. 맨 가슴을 만지작대는 걸 본 서경이 웃으며 내 손을 이끌어 유두 위로 가져갔다. 스스로 만지는 걸 보여달라는 노골적인 요구에 팔을 털며 퍽 치자 서경이 꺄르르 웃었다. "그래도 꽤 재밌었어. 타이밍이 적절했거든. 우리 영원이한테 이런 유머감각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 "...재미있어요?" "응." 내 눈물은 서경에게는 재미있는 유흥거리다. "그래서 눈물은 왜 흘린 거야? 좋아서? 아파서? 슬퍼서? 개그 치려고? 맨 마지막이면 좋겠네! 너무 새로운 매력이라 울끈불끈했거든. 그래서 으응... 몇 번?" 엉덩이 골 사이에 비벼지던 성기가 점점 단단해진다. 구멍을 찔러오는 끄트머리에 힛, 하고 짧은 숨을 토하며 허리를 든다. 익숙한 쾌감에 나는 금방 아래를 세웠다. 늘 비싼 몸이신 서경은 오늘은 부탁하지 않아도 계속 안아 줄 모양이었다. 왜? 유머가 마음에 들어서? 나는 멍청한 편이라 언제나 서경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음 직전까지도 불가능했던 게 죽었다 살아났다고 될 리가 없다. ...옘병, 왜 안 되는 거지? 독심술 능력 정, 도는, 윽! ...쨘, 하...고, 응, 생길 수도 있...있자, 나, 앗, 응, 흐으윽. 머릿속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나는 금새 짐승처럼 허덕이며 무너져내렸다. *** When I grew up and fell in love I asked my sweetheart what lies ahead? Will we have rainbows day after day Here's what my sweetheart said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귓가를 오래된 팝송이 간질거리며 지나갔다. 가물가물해진 눈을 억지로 뜨자 셔츠 단추를 꿰고 있던 서경이 손을 살짝 흔들고선 커피를 따랐다. 커피와 토스트를 가져온 서경이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허리를 굽혀 키스했다. 입술에서 커피 향기가 난다. "오늘은 푹 쉬어, 예쁜아. 올 때 맛있는 거 사올까? " 대답 없이 고개를 젓자 서경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건 서경이고 나는 식도락엔 심드렁한 편이지만 사주겠다는 걸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내게 베푸는 선물이라는 점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서경은 이불을 뒤집어 쓴 내 얼굴을 기웃대다가 급기야 이불을 팩 빼앗았다. 드러난 내 얼굴은 눈물이 닦지도 않은 채 말라붙어 못 봐줄 꼴일텐데도 서경은 이마를 짚어왔다. 차가운 손가락이 뱀처럼 이마를 덮는다. 서경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일단 몸살약과 진통제를 가지고와서 옆에 놓았다. "열은 없는데 진짜 아픈가봐. 뭘 갖다줘도 처먹는 우리 돼지가 맛난 걸 다 거부하고. 나 줄 서서 사는 케이크 집 들릴 생각이었는데..." 호의가 통하지 않을 때 서경은 가장 쉽게 삐진다. 삐지게 하면 절대로 곱게 넘어가는 일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나는 예외였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특별함에 취해 눈을 감는 순간은 늘 달콤했다. 서경이 약은 커피랑 먹는 거 아니라며 생수병을 가져오고, 핸드폰도 손 닿는 곳 바로 옆에 가져다 놓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청 아프면 꼭 병원 가야 한다? 911 불러!! 알았지?" 몇 번 더 강조하고서야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대로 60을 30번 세고는 몸을 일으켰다. 수십 수백번을 더 섹스한대도 그가 나에게 빠질 일은 없다는 것을 안다. 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의 욕구풀이용 섹스에선 끽해야 몸정이 최대라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깨달음에 입맛이 쓰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연인의 마음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인간이 되기를 소망했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서경은 스텔라가 줄 이득과 나를 너무 쉽게 교환했다. 나는 서경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그의 행복은 나의 행복과 동치 시킬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무엇으로도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고 싶다. 내가 원하는 관계를 이루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재력, 권력, 힘. 주도권을 내가 얻어야한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르쳐야 한다. 무능이 뼈까지 저리도록. 나는 우선 상황을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험해 볼 만 한 거리가 있었다.

03.

나는 조용히 서경의 뒤를 밟았다. 한 달에 1번, 그는 도박장에 마약을 공급하기 위해 거래에 나선다. 서경의 도박장이 돈 많은 정키들에게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이유는 사장이 그들의 은밀한 도핑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도박 안에서 거래되는 약물은 서경의 손 안에서 풀린다. 하지만 그런 그도 마약 유통 라인으로 따지자면 히스패닉 갱 찌꺼기들에게 물건을 떼 오는 소규모 소매상이다. 아직은 그렇다. 미래의 마약계 큰 손이 되실 몸인 서경은 지금은 고작 경호원 다섯만을 데리고 슬럼가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 내 기억대로라면 이 시기에 서경은 마약거래를 하다가 거래가 불발되면서 총상을 입고 죽을 뻔 한다. 피범벅의 서경을 받아들고 어쩔 줄을 모르던 기억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무사히 살아났지만 그는 10년이 지날 때까지 가끔씩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아까 몸을 섞을 때 본 서경의 몸은 흉터 하나 없는 완벽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서경을 10년 후까지 가끔씩 괴로워하게 만드는 폐의 구멍은 아직까지는 뚫리지 않은 상태, 즉 미래의 일이라는 이야기. 나는 그의 부상을 막아 볼 생각이다. ...아직까지? 이 단어를 자주 쓰고 있군. 마치 과거로 온 미래인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내 머릿속의 혼란인지 진실로 일어난 일인지 약에 취해서 꾸는 긴 꿈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어지러운 골목 사이를 걸어가던 서경이 갈림길에서 길을 꺾었다. 나는 따라가는 대신 반대쪽 길로 들어가 폐건물의 계단을 올랐다. 옥상 문엔 자물쇠 따위는 걸려 있지 않았다. 밀고 들어가자 녹이 슬어 끼긱 소리가 났다. “저기 누구 올라왔는데?” “뭐냐, 저 비리비리한 새끼?”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공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방만한 자세로 늘어져 있었다. 그들의 험악한 시선이 전부 내게 꽂혔다. 그들은 올라온 사람이 하나라는 걸 확인하고는 경계를 풀었다. “꼬마야, 어딜 잘못 찾아왔냐? 왔으니까 일단 돈부터 꺼내 봐. 그럼 보내주지.” 아, 여기 부랑아들이 약 빠는 곳이었지. 너무 하찮아서 잊고 있었다. 나는 엄지로 등 뒤를 가리키며 고개를 까닥였다. “너나 꺼져. 이 몸이 여기서 할 일 있으시니까.” 별 생각 없이 힐끔대던 놈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죽여 버린다, 장기 빼서 내걸어버리겠다, 예쁘장해서 아까우니 포르노를 찍겠다... 그리 신선하지 않은 협박들이었다. 나는 대꾸하기도 귀찮아서 대신 총을 꺼냈다. 남자들 사이에서 비웃음이 터졌다. “와! 저 새끼 총 믿고 깝쳤나 본데! 쏴 본 적은 있냐?” 대답 대신 쏘는 모습을 보여줬다. 총알이 남자가 겨눈 권총의 실린더를 맞추며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남자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리더의 손이 너덜너덜하게 날아가자 주변의 부랑자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부축했다. 내가 말없이 옥상 문을 가리키자 그들은 개처럼 달려 내려갔다. 원래 손님들을 쫓아낸 후 옥상 가장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가지고 온 케이스를 열어 총을 꺼냈다. 볼트액션식 M24. 구하기 쉽고 싸서 애용하는 저격용 소총이다. 설치를 끝내고는 확인 차 아래를 내려다본다. 거래 상대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우는 중인 서경이 보였다. 좋아, 정확하군. 나는 챙겨온 캔 콜라를 땄다. 시원한 탄산이 목을 긁으며 내려간다. 이 곳은 서경의 거래 장소를 직통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위치의 옥상이다. 총에 맞아 본 후의 서경은 나를 스나이퍼로 대동하지 않고서는 거래에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건물에서 총을 겨눈 채 한도 끝도 없이 서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홀린 듯이 스코프 너머의 서경을 들여다본다.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인식도 못하는 사이 나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서경을 겨눈 채 숨을 멈춘 상태였다. 이 손가락을 당기면 서경은 죽는다. 원한다면 경호원 다섯을 죄다 쏘아버린 다음 서경을 상대로 쫓고 쫓기는 게임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더러운 골목 벽에 뇌수를 튀기며 죽어버린다. 가볍고 사랑스러운 목숨이다. 아직은 안 된다. 나는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사랑이야. 나는 손을 떨며 콜라를 들이켰다. 얼마 안 가 남자 여럿이 나타났다. 이 근방에서 마약 장사를 하는 히스패닉 갱 똘마니들이다. 대량으로 구매하고 싶으니 보스와 연락하게 해 달라고 수십 번도 더 부탁하는데도 네가 경찰이면 어떡하느냐, FBI면 어쩔 테냐 핑계를 대며 들은 척도 않는다며 서경이 분통을 터트렸었다. 그는 의심이 가면 아예 팔지를 말 것이지 자기들끼리 남겨먹으려 드는 개수작이라며 싸움을 걸었다가 총에 맞았다. 이번에도 그럴까? 다 마신 콜라 캔을 구기곤 저격 자세를 취했다. 긴장했는지 약간 손에 땀이 배어난다. 지켜보는 사이 남자들 사이에서 언쟁이 일어났다. 삿대질을 하고 발을 굴러대며 논쟁을 벌이더니 한 놈이 기어코 총을 뽑았다. 서경이 물러나면서 경호원 하나가 대신 총에 맞았다.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스코프의 배율을 확대하여 서경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당황이 전면에 드러나 이를 악문 표정. 일 할 때는 그런 얼굴도 하는 주제에 내 앞에서는 언제나 여유 있게 미소를 짓는 허세를 사랑했다. 나는 드디어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렇게나 권총을 쏘아대던 갱 한 놈의 가슴을 총알이 관통한다. 쓰러진 시체에 깔릴 뻔 한 서경이 찡그린 얼굴로 품에서 총을 뽑아들어 응사한다. 나는 옆으로 총구를 움직여 뒤에서 다가오는 남자를 쏘았다. 그리고 다음, 다음. 총알은 정확하게 갱단 측을 쏘아 맞춘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저격에 혼란스럽게 주변을 두리번대던 남자들은 곧 전투를 포기하고 도망치려고 했다. 정신을 차린 서경의 경호원들이 도망치는 놈들을 끝까지 따라가 처리했다. 저 병신새끼들은 같이 있었으면서도 서경을 다치게 했었겠지. 탓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들의 무능이 나를 더 쓸모 있게 만든다. 우리 측에서는 1명이 죽고 둘이 부상을 입은 모양이다. 서경은 무사했다. 기쁜 사실을 자축하며 나는 M24를 정리해 넣으려고 했다. 그 순간 가만히 있던 서경의 고개가 휙 돌아가며 정확하게 이 쪽을 쏘아봤다. 스코프 너머에서 그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서경이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동그랗게 말아졌다가 숨을 내뱉듯 움찔거렸다가 다시 벌어지며 호선을 그리는 움직임. ‘누구야?’ 그리고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다음 입모양. ‘영원이야?’ 나는 서둘러 옥상에서 자리를 피했다. 내가 건너편 건물로 넘어간 직후 서경의 부하들이 내가 있던 자리로 들이닥쳤다. 난간 위에는 콜라 캔 하나만 찌그러져 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셔츠 한 장만 걸친 차림으로 침대 위로 다이빙했다. 좌우로 굴러다니며 시트를 구겨놓은 다음 다 식은 커피와 함께 토스트를 우물거린다. 입맛이 없다고 보이길 원했기에 반만 먹고 남기고는 진통제를 까서 삼켰다. 물병과 약 껍질을 일부러 버리지 않고 늘어놓은 채 서경을 기다렸다. 이불 안에서 깜빡깜빡 잠들어갈 때 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온 서경은 아침에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뒷골목의 오물 섞인 먼지 냄새와 피 냄새가 났다. 깔끔한 서경이 저런 꼴로 돌아왔을 정도라면 그 후에도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바빴던 모양이다. 그가 약속대로 케이크 박스를 협탁에 내려놓았다. 포크가 두 개 들어 있었다. 서경이 정장을 벗어 걸어두며 물었다. “자기야, 혹시 나 따라왔어?” 오죽 친구가 없으면 누가 도와주면 다 나인 줄 알까. 나는 올라가는 입 꼬리를 감추기 위해 베개에 얼굴을 부비며 대답한다. “아닌데요? 머리가 아파서 내내 집 안에만 있었어요. 으슬으슬한 게 몸살인가 본데.” “진짜?” “왜? 저 닮은 사람 봤어요? 지금 다른 사람보고 저인 줄 안 겁니까 지금?” “아니, 아니아니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지?” 서경은 입을 비죽거리며 침대로 파고들었다. 옷은 갈아입고 들어오라고 잔소리를 하기 전에 입을 막고 키스하면서 서경은 내 허리를 끌어안는다. 셔츠 안쪽으로 들어온 손이 등허리를 매끄럽게 더듬는다. 따끈따끈하네. 진짜 열이 있나, 하고 작게 속삭대면서 장난처럼 몸을 겹친다. 묵직한 무게감이 이불 한 겹을 사이에 끼고 드리워진다. “오늘 약 거래 중간에 트러블이 났거든? 왜 맨날 거래하는 남미 애들 말이야. 죽어도 윗선에 소개를 못 시켜 준대서, 그럼 그냥 거래 때려치우자다니까 또라이들이 총을 쏘더라구.” “미친... 어디 안 다쳤어요?” “안 다쳤어. 멋진 히어로가 등장하거든. 쨔쟌!” 서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놈들을 노린 저격수가 있었어. 우리가 싸울 것도 없이 다 잡아버리고 쿨하게 자리를 뜨셨지. 나랑 갱들이 접선하기 전부터 대기한 것 같던데, 재미있지 않아? 어째서 갱 똘마니 몇 놈 잡자고 저격수가 다 붙었을까?” 나는 들은 척 만 척 하며 서경의 몸을 살폈다. 상처가 없는지 살피는 척 여유롭게 맨몸을 구경하며 서경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원래 구멍이 났어야 했을 위치는 탄탄한 근육으로 막혀 있다.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린다. “아파도 같이 갈 걸 그랬어요. 당신 구할 기회를 남한테 다 뺏기고.” “괜찮다니까.” 어린애처럼 다리를 걸고 동동거리며 서경이 갸웃거렸다. “누구일까?” 그렇게 말하는 서경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구나. 서경은 자신이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걸 반기지 않는다. 뭐든 손 안에서 굴러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다. 오늘 이 순간, 원래 서경은 폐가 뚫리는 큰 상처를 입고 몇 달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마약 공급이 끊긴 도박장의 수익도 반 토막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의 서경은 무사하게 돌아온 채로 내 품에서 애교를 부린다. 그것이 내게 말하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일어날 일을 바꿀 수도 있다. 믿지도 않았던 신이 나를 과거로 되돌려 준 것인지, 죽기 직전의 주마등을 아주 길게 보며 죽어가는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이든 현실이든 뭐 아무래도 좋다. 그저 후회했던 순간순간에 충실할 뿐이겠지. 나는 웃으며 서경을 끌어안았다. 서경은 새침한 여자아이처럼 내 품에서 벗어나며 케이크 박스를 깠다. 다가온 입술에선 딸기 크림 맛이 났다.

04.

서경은 영 심사가 불편했다. 내가 거래 상대를 죽여 버린 덕분에 마약을 구입할 길이 끊겼다고 한다. 사 놓은 재고는 간당간당한데 찾는 손님들은 많다며 손톱을 깨물어대는 서경을 달래던 도중 서경의 앞으로 선물이 도착했다. 파란 공단 리본으로 장식된 꽤 커다랗고 묵직한 상자였다. 리본을 풀자 안에는 눈을 홉뜬 잘린 머리가 들어 있었다. “이거 폴 머리잖아? 어째 출근을 안했다 했더니.” “아는 사이에요?” “응. 우리 카지노 딜러. 카드 셔플을 기막히게 잘 하는 앤데...” 이젠 죽어버렸다. 서경은 안타까운 얼굴로 시체를 쳐다보다가 괜한 곳에 얽히면 귀찮아지니 안 들키게 처리해달라며 청소부를 불렀다. 나는 내 시체도 그렇게 처리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어쨌건 흉흉한 선물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서경이 그렇게 컨택하길 원했던 갱단의 상부는 서경과 거래를 끊는 수준이 아니라 아주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한 모양이다. 싸움이 났을 때 도와준 의문의 저격수를 히어로라고 지칭했던 서경은 오늘은 그 씨발 새끼 때문에 다 다져놓은 루트가 망가졌다고 지랄을 떨었다. "기운내요, 형. 가는 기회가 있으면 오는 기회도 있겠죠." "영원이 니가 뭘 알아! 내가 이 루트 뚫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빽 소리를 지른 서경이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외쳤다. "뭣도 모르는 애새끼들만 만나는 건 지긋지긋해! 나는 윗대가리를 원해! 좆같은 새끼들, 낯짝 한 번 더럽게 비싸네! 어차피 다 같은 약팔이 범죄자들 주제에!!" "네, 네, 형 말이 다 맞아요. 사람이 큰물에서 놀아야지요. 그런 잔챙이들을 만날 필요도 없어요. 이제 소매업자가 아니라 도매업자랑 거래합시다. 그럼 중간에서 빠지는 돈도 없고." 달래는 말에 서경은 짜증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그게 됐으면 이러고 있겠어? 안그래도 그 자식들, 이번에야말로 지들 보스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고선 갑자기 말을 바꿨다구.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윗대가리는 꽁꽁 숨기기만 해. 컨택할 방법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야?" "제가 다 방법이 있지요." "...뭐?" 서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엽다. 나는 멋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긴 우리 도박장이잖아? 여기에 판매책이 있다고?" "아뇨. 까마득히 윗사람입니다." 서경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설명하지 않고 vip 룸으로 걸어갔다. 몇 개의 룸을 지나 미리 언질받은 방의 문을 열었다. 룰렛 테이블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룰렛이 돌았는지 산더미같은 칩을 잃은 남자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른다. 아르마니 셔츠 위에 용무늬 창파오를 코트처럼 걸친 해괴한 패션을 하고 있었다. "크으윽...! 2센치만 옆이었어도!!" "룰렛에서 2센치는 너무 큰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웃으면서 창파오 남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다 올백으로 슥슥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으음, 이번에는 정말 잭팟일 줄 알았지. 아까 20만을 잃었으니 이번엔 100%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스트레이트로만 가는 겁니까?" "난 내 운을 믿거든. 그런데 자네, 방금 들어왔으면서 내가 어디에 걸었는지 어떻게 알았지?" "당신은 유명인이거든요." "그래?" 믿을 운이 따로 있지. 이 남자는 스트레이트 배팅만 하는 유명한 미친 놈이다. "뭐야. 콴 씨는 왜?" 서경이 작게 속삭이며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서경도 물론 알고 있다. 그가 아는 부분은 아직까지는 빙산의 작은 일각이지만. 서경의 도박장 손님 중에서도 가장 큰 돈을 날리고 가는 VIP 중의 VIP, 콴 바이산. 올 때마다 엄청난 돈을 잃고는 징징대다가 전화 한통에 일시불로 갚고 떠나는 이 중국계 졸부는 사실 베트남에서 마약농장을 경영하는 영농재벌이다. 서경이 콴과 거래를 트는 것은 앞으로 2년 후, 도시 안의 마약 루트를 모조리 말아먹은 서경이 원산지로 여행을 떠난 다음에야 성사된다. 우리에겐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파랑새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으음. 으흠흠. 이번엔 무슨 숫자가 좋을까..." 콴은 콧노래를 부르며 숫자를 고르고 있다. 늘 1가지 숫자를 고르고 맞추면 35배의 칩을 얻는 스트레이트 배팅만 하는 것이 그가 VIP 손님이 된 슬픈 비결이다. 도박장 입장으로선 그만한 호구가 없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배팅이 단 한 번 성공한 적이 있었다. 나는 시계를 흘끔 확인하고 말했다. "더블 제로에 배팅해요. 지금 가진 칩 다 걸고서." "응? 싫다네. 자네는 아까 스트레이트로만 건다고 잔소리를 한 주제에 더블 제로를 권하나? 도박은 자기 돈으로 하는 거야." "지금입니다." 나는 콴의 앞에 놓인 칩을 모조리 쓸어담아 걸고는 00의 정가운데에 걸었다. 칩이 전부 놓이자 휙 룰렛이 돌아간다. 같은 테이블의 손님들이 어차피 또 잃을 거 무슨 상관이냐며 낄낄거렸다. 오늘도 콴은 어지간히 많이 잃은 모양이다. 졸지에 가진 칩을 모조리 걸게 된 콴이 비명 지를 것 같은 얼굴로 내 멱살을 잡았다. "야, 이 미친 놈아! 배팅이 하고 싶으면 니 칩으로 걸어야지! 왜 내 돈으로 깽판이냐?!" "우리 영원이한테 무슨 짓이야?!" 서경이 끼어들어 말리려고 들었다. 짤짤 흔들대던 몸이 간신히 멈춘다. 서경을 알아본 콴이 절박하게 외쳤다. "여기는 남이 난입해서 마음대로 건 것도 내가 건 걸로 치나? 오너, 이건 무ㅎ...!" 테이블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빨간 색과 검은 색이 뒤섞여 뱅글뱅글 돈다. 판이 멈추고 주사위가 굴러 떨어진다. 숫자 00(더블 제로). 1/38의 확률을 뚫고. "...35배? 정말?" 이번에는 서경이 비명을 질렀다.
"콴 씨, 당신 아까 분명히 무효라고 하려고 했어." "아이고 오너, 그건 자네만의 착각이라네. 나는 무훼솬쓰촤라고 하려고 했지. 만세! 라는 뜻이라네!" "거짓말!" 이 자리엔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되는대로 내뱉은 말인 게 뻔해도 서경은 어찌 못하고 이만 갈았다. 딜러가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야, 미스터 콴. 축하드립니다! 살다보니 손님이 따는 날도 다 있군요!" "자네 그거 순 악담 아닌가?" 콴은 즐거운 얼굴로 칩을 촤락촤락 만지작대다가 룰렛 테이블로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의자를 빼려는 콴을 붙잡았다. "딸 만큼 땄으니 좀 쉬시지요. 잠시만 단 둘... 아니, 셋이서 대화해주세요." "싫은데. 나는 여기서 승리의 여운을 즐기고 싶다네. 지금이라면 거는 족족 딸 느낌이 오거든?" 다음 턴에서 콴은 방금 딴 금액을 모조리 잃는다. 자선사업을 하러 도박을 즐기는 게 아닌가 싶던 콴이 단 한번 대박을 냈던 35배의 더블 제로. 다행히 00이라 기억하기 쉬운 숫자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서경을 위해서라면 다시 쪽박차게 두는 쪽이 낫지 않나 고민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솔직히 아깐 제가 딴 거지 당신이 딴 거 아니잖아요. 제 덕에 50만불 벌었으면 30분 정도는 내 줄 수 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콴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내 허리로 팔을 뻗었다. 성추행 직전에서 멈춘 손이 팔걸이마냥 허리를 휘감아 당긴다. 실실 웃으며 콴이 질문했다. "무슨 수를 썼나? 딜러랑 짰어? 스퀘어 아래에 자석이라도 넣어 뒀나?" "기업비밀입니다." 그 때 00가 나올 걸 알고 있어서... 라고 대답하면 정신나간 놈으로 보일 것이다. "뭐 맨 입으로 가르쳐 주진 않을 줄 알았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지만 그는 납득하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왜 그랬나?" "당신은 놀 만큼 놀기 전까지는 진지하게 대화해 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 50만불을 떠안기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말이 뭐지?" 나는 허리에 둘러진 손을 무시하고 콴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네 농작물을 구입하고 싶어서요." ".....하하?" 웃던 얼굴에 그대로 쩍 금이 간다. 콴은 느물거리는 웃음을 싹 거두고 일어나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는 놀자고 온 거였는데. 그럼 사업 얘기를 해 볼까?" "너무 오래 기다렸어." 서경이 짜증을 냈다. 나는 서경에게 시크릿 룸으로 이동하자고 했다. 서경은 들러붙어 있던 우리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복도 끝의 방으로 걸어갔다. 이 방은 사방에 스펀지를 대어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는다. 콴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서경이 앞으로 나서 본론을 꺼냈다. 도박장에서 팔 마약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나야 좋지.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이곳에서 도는 약은 너무 저질이라 도박장 질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네. 코카인에 유리 가루를 섞다니 저급에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래서, 얼마?" 콴은 빙글빙글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노골적으로 값을 매기는 시선을 보낸다. 무표정으로 응수하자 곧 재미없어하며 고개를 젓고는 먼저 운을 뗀다. "오너의 판매이득의 6대 4... 정도면 어떤가? 물론 내가 6일세." "뭐?" 서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콴은 소파를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내 밭의 농작물은 여기서 유통되는 싸구려와는 차원이 다르다니까.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놈으로 보장함세. 아, 물론 우리 농장 딱지를 붙여서 파는 물건도 아니니 밀가루든 분필가루든 뭐든 섞어다 팔아도 괜찮다네. 마음-껏 뻥튀기 해도 좋아. 60%만 떼 줘. 저렴하지?" "저어려엄?" "하하. 고맙지? 내가 정든 오너라 양심있게 불렀어." 말도 안 되는 폭리에 서경은 웃는 얼굴 그대로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6, 당신이 4. 이 이상으론 오케이 못 해줘." "이런..." 콴이 침음을 흘리며 안타까운 얼굴로 일어났다. "거래는 불발이군." 안타까운 음성은 물론 흉내일 뿐이다. 콴이 몸을 돌리고 걸어가는 동작은 언제든지 서경이 붙잡을 기회를 주고 있었다. 서경은 붙잡지 않았다. VIP 룸의 문을 연 콴은 잠시 뒤를 돌아봤다가 비웃음을 흘리며 사라졌다. "따라가." 서경은 조용히 내 어깨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지하실로 데려가도 돼. 저 씹새끼한테 제발 그러겠다고 똥오줌 지리면서 말하게 해 줘. 할 수 있지?" 눈 앞에 다가온 동공이 가늘게 좁혀져 있었다. 금색으로 보일 정도의 연한 홍채가 섬뜩하게 번뜩거린다.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콴의 뒤를 쫓았다. 여기까지는 모두 예상 범위다.

05. R19

나는 조용히 콴의 뒤를 밟았다. 긴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콴은 나를 눈치 채지 못했다. 걸음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가 그가 3중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무릎 뒤편을 찼다. 오금이 걷어차이면 사람은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는다. 휘청하자마자 목에 팔을 걸고 목소리를 낮춘다. “마음대로 나가면 안 되죠. 아직 이야기 안 끝났는데.” “윽, 거래는 아까 네 보스가 거절했잖나?” 말은 겁먹은 척 하지만 기대하는 눈치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콴은 비실비실 웃음을 지었다. “내가 제시한 가격에 사 줄 마음이 들었어?” “아뇨. 대신 새 가격을 제시할까 싶어서.” 나는 그의 관자놀이에 총을 들이밀었다. “공짜로 1년만 공급해 줘요. 1년 뒤부턴 6:4로 드릴 건데 당신이 4인 걸로.” 잠시 침묵이 내리깔렸다. 나는 콴의 표정과 팔을 번갈아 살폈다. 덩치가 큰 사람이 돌발행동에 나설 경우 총을 쥐고 있어도 승산을 장담할 수가 없다. 근접전엔 그리 자신이 없다. 하지만 콴은 반항하는 대신 어이없다는 투로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6:4가 어떻게 갑자기 1년간 무보수가 되나? 사람이 상도덕이 있어야지.” “맨입에 해달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귀찮은 사람 있지 않아요? 관짝에 들어간 시체로 만들어 드리죠." “사업하는데 어떻게 귀찮은 사람이 없나. 굳이 따지자면 지금은 자네가 제일 귀찮구만.” 정확한 날짜가 언제였더라... 미리 딜러에게 물어본 출입기록을 머릿속으로 더듬어본다. 콴은 매달 꼬박꼬박 서경의 도박장에 들른다. 그러던 그가 저저번달부터 출입이 뜸해지더니 저번 달은 아예 들른 적이 없었다. 도박에서 손 떼려는 노력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가능성 있는 건수가 있었다. “ISTL 대장 카림 알 지브릴. 요즘 귀찮게 굴고 있을 텐데요.” 콴의 낯빛이 딱딱하게 바뀌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올해 말, 콴의 마약 농장에 테러리스트들이 들이닥쳤다. 극단주의 이라크 반군 단체 하나가 콴의 유럽 루트에 끼려고 깔짝거리다 거절당하자 폭탄을 실은 헬기를 갖다 박은 것이다. 마약농장주도 범법자긴 매한가지지만 IS와 엮이면 귀찮음의 레벨이 다르다. 콴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눈 돌아간 이슬람 반군에게는 죽여 마땅한 새끼로 보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서경과 손을 잡았을 때 콴의 사업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완전 철수한 상태였다. 내 말은 그를 한창 귀찮게 굴고 있을 무장 테러단체 대장을 죽여주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제안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삼류 악당이 된 것 같다. 내세울 특기라곤 사람 죽이기 뿐이라니 살벌한 인생이다. 죽다 살아난 김에 축구라도 배워봐야겠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죽일 수나 있나? FBI도 못 찾아서 못 죽이는 놈을? 사실 그 놈 목에 현상금을 걸려고 했는데 넙죽 받아들이는 놈이 없었어. 다들 미친놈한테 시비걸기 싫다던데?” “어떻게 죽이는지는 제 마음이죠. 그래서 받아들일 겁니까, 말 겁니까?” “난 자네가 카림의 목을 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들어. 예의바르게 거절하고 연락을 피할 생각이었다고.” 그렇게 예의바르게 거절했다가 폭탄테러를 당할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다. 나는 미래를 까발리는 대신 실패해도 댁에겐 별 리스크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로 했다. “대금은 후불로 받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제가 성공하고 돌아오면 그때부터 팔아주면 됩니다. 실패하면 내가 죽고 끝이죠 뭐. 하지만 서경이 한테는 돈 받고 판다고 말해줘요.” “그게 누구야? 오너?” 고개를 끄덕이자 콴은 재미있다는 얼굴이 되었다. 우리는 공범자가 되기로 했다. 콴은 서경에게 40%를 받고 농작물을 공급하고, 대가로 서경이 낸 40%는 내 주머니로 들어온다. 대신 나는 테러리스트 대장을 죽여준다. 1년 마약 무료 이용권은 사실상 암살 청구비다. 역시 부부간의 독립은 경제권을 쥐는 것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그런데 카림이 내게 접촉하려고 드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았나?” “기업비밀.” “처음부터 작정하고 왔군? 아쉽네. 유혹받은 줄 알고 기대했는데.” “당신 제법 매력적이에요. 쏘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그의 손목에 장착된 권총은 대화 끝까지 소맷자락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다. “뭐 좋아. 거래 성립일세. 자네가 어떻게 카림을 찾아 죽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우리 둘 다에게 좋은 거래가 되길 바라네.” 콴이 내 손을 붙잡고 휙휙 흔들며 웃었다. “아, 잠깐만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응?” 나는 웃는 얼굴을 후려갈겼다. 서경은 두들겨 패서 수락하게 만들라고 했고 내겐 6:4만 된다던 사람이 4:6을 받아들일 개연성이 필요했다. 퉁퉁 부은 얼굴로 돌아간 콴은 서경에게 40%만 줘도 괜찮다고 말했다. *** "아하하하하!" 콴이 돌아가자마자 서경은 숨도 못 쉴 정도로 웃으며 발치를 굴러다녔다. “으학, 하하하! 몇 대나 팬 거야? 눈탱이밤탱이가 다 되었던데.” “당신은 몇 번 쉬는지 세면서 숨 쉬어요?” "그건 아니지만!" 서경은 딜이 성공한 것보다 콴이 몇 대 째에 수락했는지를 더 흥미진진해 했다. 서경의 안에서 이 딜이 성공하는 것은 놀랍지도 않은 기정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기뻐하던 서경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우리 영원이, 오늘은 예뻐해달라고 안 하네? 필요 없어?” ...그러고보니. 나는 늘 요구하던 절차를 빼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의 성공에 한 번의 섹스. 예전이라면 일찌감치 안달이 나서 서경을 졸라대고도 남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서경의 어깨를 붙들어 돌려세웠다. 다급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서경의 마음이 바뀌어서 섹스를 건너뛸까봐 두려웠다. 서경이 다정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마치 개나 고양이를 쓰다듬듯이. 인간보다 낮은 존재를 예뻐하고 귀여워하는 손길이었다. "잘했어, 예쁜아. 발 핥게 해 줄게." 서경이 당당한 태도로 발을 내밀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몸을 숙였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입가를 가까이 대자 서경이 발을 빼고 내 머리를 밟았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장난이었어." 밟아 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내 이마를 카펫에 짓뭉개듯 밟으며 서경이 말했다. "아니, 사실... 장난은 아닌가? 나 좀 섭섭했나봐. 우리 영원이가 나랑 안 자고싶은 것 같아서?" "...그럴리가... 없는 거 알잖아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는데." "내가 좋은 거야, 내 주니어가 좋은 거야?" 나는 눈을 굴렸다. 이럴 때면 어느 쪽이 정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경이 좋다고 하면 섹스를 안 해 주고 주니어가 좋다고 하면... 생각하기 싫은 일이 벌어진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둘 다 좋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그는 머리에서 발을 뗐다. 나는 그의 구두에 혀를 댔다. 구두약이 발린 가죽의 화학적인 맛은 싫을 정도로 익숙하다. 먼지란 먼지를 다 샅샅히 핥아 반질반질하게 해 주고서 무릎걸음으로 기어 올라가 서경의 사타구니에 머리를 댔다. 조르듯 입술을 부비자 서경이 웃으며 내 뒷목을 쓰다듬었다. "...하아...." 귓가의 성감대를 스치듯이 쓸어내려져 흥분 섞인 소름이 돋았다.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지퍼를 이로 물어 끌어내리고는 반쯤 발기한 성기를 입에 담았다. 굶주린 사람처럼 매달려 혀로 핥고 빨아들이자 금방 입에 담기 괴로울 정도로 부풀어 오른다. 성기 끝이 목구멍을 찌를 정도가 되자 서경은 되려 입 안에 느릿하게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컥, 읍...! ...!! 윽, 응, ...!!" ".....후우... 이 세우지 마. 살살... 알지?" 목소리엔 분명 만족스러운 울림이 있었다. 웃음 섞인 울림이 강해질 수록 나는 컥컥거리며 피하지도 못하고 버둥거렸다. 눈가가 시큰해지다가 곧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 떨어졌다. 분명 우스운 꼴일 내 얼굴을 서경은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허리를 움직였다. 차라리 눈을 감고 박는 쪽이 흥분하기 쉽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 꼴로도 아래에 열이 몰렸다. 서경의 것을 허락받아 빨고 있다는 고양감에 발기한 성기가 바지 아래에서 빠듯하게 고개를 쳐든다. 흘깃 아래를 내려다본 서경이 큭큭거리고 웃더니 성기를 목구멍 안쪽까지 밀어넣고 사정했다. "응, 윽, 흐읍...! 흐읍, 으... 응, 컥,크흑...!!" 나는 미친듯이 기침하며 엎드려 몸을 떨었다. 쿨럭거릴 때 마다 반쯤 넘어가다 만 정액이 흘러나와 얼굴이 엉망이 된다. 서경의 손이 내 머리채를 잡아챘다. 목이 꺾일 정도로 뒤로 잡아당긴 채 눈을 맞춰 온 서경이 웃었다. "더러워서 키스는 못 해주겠다." 대신이라는 듯, 서경이 목덜미에 키스하며 옷을 벗겼다. 목 끝까지 채웠던 단추가 하나하나 풀러내려가며 맨살이 드러난다. 찬 공기에 움츠러든 순간 입술이 닿았다. 맨 가슴에 쪽쪽 입술을 떨어트리다 이를 박아 깨물어온다. 하나둘씩 생겨나는 자국을 멍하게 신음하며 내려다보다가 서경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서 하려고요?" "네가 잘 핥아서 흥분했나봐. 그러길래 왜 유혹하고 그랬어." 누가 유혹을 했다는 건지. 서경은 뒤를 돌아봤다가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방음은 잘 될텐데 뭐가 걱정이야?" 방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vip용 응접실에는 당연하지만 침대가 없다. 서경의 섹스 취향은 그리 멀쩡한 편은 못 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더 그렇다. 서경은 내 허리를 끌어안고 밀어붙여 유리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했다. 드러난 살갗에 차가운 유리가 닿아 움츠러든 채 뒤를 돌아보자 바지를 벗겨내리던 서경과 눈이 마주쳤다. 늘 차가운 시선이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손길이 급하게 엉덩이를 벌리고 안쪽의 예민한 살을 지분거렸다. 나는 흠칫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왜, 싫어?" "...싫은, 건, 아니고... 흣, 아으..." "안 풀고 바로 넣으면 너만 아프지, 그렇지? 손가락 좋아하잖아..?" "앗, 응, 좋, 좋은데... 흐윽!" 손가락이 내벽 안으로 기어들어온다. 장난치듯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대는 동작 만으로도 비명같은 신음이 나왔다. 서경은 내가 어떻게 해야 느끼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안쪽을 눌릴 때마다 움찔거리며 허리가 튀었다. 들어온 손가락 두개가 원을 그리며 천천히 입구를 늘려나가다가 빠져나갔다. 대신 뜨거운 것이 닿아 당황해 숨을 들이켰다. 손이 엉덩이 양쪽을 쥐어 벌린 훤히 드러난 구멍 위를 성기가 문질거리고 있었다. "안돼...! 저, 적어도 세개정도는, 넣, 고... 나서, 윽, 아..." 신음이 섞여 목소리가 띄엄띄엄 뭉그러진다. 서경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어떻게 할까?" 귀여운 행동과는 다르게 아래는 그리 귀엽지가 않았다. 흉악한 크기의 성기 끝이 채 풀리지도 않은 입구를 누르며 들어왔다가, 약간 밀려들어간 시점에서 다시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이성이 하얗게 타는 것 같다. 머리는 지금 들어오면 아플 거라고 생각하는데도 익숙한 자극에 구멍이 움찔거렸다. 서경의 것으로 쑤셔지면서 넋놓고 신음하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손가락을 물고 움찔대던 구멍이 더 큰 것으로 채워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 결국 서경의 것에 엉덩이를 치대며 눈물에 젖은 얼굴로 작게 웅얼거렸다. "아, 으, 흐윽... 어, 어서... 넣어줘, 욱, 흐으으... 장난치지, 말, 말고..." "응? 하하, 으으응? 애절함이 부족한데." ".....혀, 혀엉, 제발..." "영 간절하게 안 들려." "...흐윽, 씨발..." "하하! 이젠 아주 욕을 다 하네!" 허리를 살이 아플 정도로 꽉 붙든 서경이 등 위로 무게를 실었다. 아까부터 간보듯이 눌러대던 성기 끝을 정확하게 구멍에 내리 누른다. "뭐 좋아 좋아. 씨발은 원래 야한 뜻이니까아...?" 두툼한 귀두 끝이 구멍을 억지로 벌리며 좁은 안쪽을 꾸역꾸역 파고 들어온다. 억지로 뱃속의 공간이 벌려지면서 성기로 죄다 채워지는 감각에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헐떡거렸다. 물 밖에 억지로 끄집어내 진 금붕어가 된 것 같다. "힉, 아윽, 아, 아...!! 아악, 악, 으아...!! 이, 이 씨발새... 크흑, 악...!" 더럽게 아프다. 곧 기분좋아진다는 건 알아도 나는 언제나 이 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버둥거리는 손에 애꿎은 재떨이가 날아가 구른다. 등 뒤에서 여상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풀어주고 하면 내가 재미가 없잖아." 서경은 내가 아파하는 쪽이 처녀같아서 좋다고 한다. 할 때마다 처녀같이 잘 조인다고 칭찬해 줬다. 웃음같은 신음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가 손이 뻗어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간 몸이 이완된 순간 성기가 빠지기 직전까지 물러났다가 다시 처박혔다. "....힉..!!" "아, 하하, 좋다, 영원아. 아파...?" "...우, 윽, 아,파...아...!! 응, 흐앗, 그만...!" "아프면 어쩔 거야? 내가 좋다는데. 아까는 더 풀어달라, 지금은 넣어달라, 어느 쪽이야? 응? 하여간 제멋대로, 라니, 까, 응...!! 뭘 해도 좋아할 거면서...!" "...앗, 응...!! 흐윽, 앗,아, 아아아, 싫, 우윽, 아, 아...!" 손가락이 벌린 입 안으로 억지로 들어와 혀를 쥐고 목 안쪽을 긁어내린다. 헛구역질에 울 것 같아진 순간 서경이 허리를 물렸다. 배 안 가득 채우고 있던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간다. 두어번 느릿하게 왕복한 서경은 성에 안 찬 모양인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나는 울면서 엉덩이를 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세를 만드려고 꿈틀거리며 바르작댄다. 노력을 배신하며 서경이 재차 뿌리 끝까지 들어왔다. 젖은 점막의 어디인지도 모를 부분을 스칠 때마다 내벽이 흠칫흠칫 풀어지면서 성기를 물고 조인다. 서경이 아무리 제멋대로 다뤄도 아래는 이미 그에게 익숙해져 있다. 통증을 피하기 위해 외려 천박하게 구멍을 조이고 허리를 흔드는 법을 배웠다. 서경은 그 꼴이 만족스러운지 느끼는 부분을 집요하게 눌러주었다. 다리가 벌벌 떨리며 무릎이 꺾여내려갔다. 테이블에 늘어진 채 고개를 내저으며 울었다. "...읏...! 응, 하앗, 으,아...!!" 성기로 쑤셔질 때 마다 배 안쪽이 진탕이 된다. 근질거리는 뜨거움이 아랫배 아래로 가득 차올라 어쩔줄을 모르자 서경이 귀엽다고 속살거렸다. 귀를 깨물고 핥아내리는 진득한 감촉에 결국 울음이 터졌다. 내벽이 움찔움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사이 반쯤 섰던 성기가 확실하게 발기하여 묽은 액체를 흘렸다. 젖어서 미끌거리는 것을 서경이 쥐고 흝듯이 흔들어줬다. 나는 아예 자지러지며 무너졌다. 몸이 겹치며 쳐올려 질 때마다 흔들리던 성기에서 주륵 정액이 흘렀다. 사정하는 동안에도 뒤는 끝없이 쳐올려지는 중이었다. 서경이 사정했을 때 나는 제정신이 아닌 채로 녹초가 되어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서경이 유리 테이블 아래로 폰을 밀어넣어 사진을 찍었다. 화면에는 눈물과 침과 정액 범벅이 된 남자가 멍청한 얼굴로 늘어져 있었다. 유리에 눌린 가슴과 배가 온통 잇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예쁘게 나왔네. 역시 사진은 본판이 중요하다니까." 만족스러운 얼굴로 서경이 키스를 떨어트렸다. 그 입술이 녹아 사라질 사탕처럼 보였다.  서경은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좋아'를 '싫어'로 바꾸는 건 꽤 즐겁거든. 보통은 싫어하는 걸 좋아하게 만드는 게 어려운데 넌 좀 반대지. 날 너무너무 좋아해서 울 때까지 괴롭혀야 싫다는 소리가 나와. 그럼 당연히 나는 어디까지 네가 참을 수 있을지 알고 싶어지지. 늘 당신이 이긴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당신이 흥미를 잃지 않을지 알 수가 없다.

06.

콴의 골치를 썩이는 이슬람 테러단체 ISTL은 정작 중동 본토에서는 기도 못 펴는 놈들이다. 다른 반군 단체들은 국가 비슷한 꼴도 이루는 판에 군자금 모으겠다고 싸돌아다니는 시점에서 수준이 뻔하다. 하지만 잃을 것이 없는 만큼 더 과격한 행보를 자랑하기도 해서 암흑가의 인사들에게까지 골칫거리였다. 콴은 착수금조로 첫 거래의 10% 정도를 가불해 주었다. 암살이 성공하면 1년간 40%의 금액이 서경 몰래 내 주머니로 들어온다. 힘내야겠다. 나는 신문의 테러 관련 기사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기사는 언제나 떡밥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 급 인사를 추적하는 종군기자의 기사 하나는 연재물처럼 실리고 있었다. 물론 괄목할만한 성과는 없다. 하긴 어렵지 않으면 자본주의 사회의 영농갑부가 흔쾌히 수락했을 리가 있나. “우리 돼지가 신문도 봐?” 커피를 타 온 서경이 내 옆에 한 잔을 내려놓았다. 카페인이 필요한 참이라 감사히 잔을 들었다. 헤이즐넛 향이 난다. “6대 4로 해주는 대신 일 하나 맡기로 했거든요.” “귀찮게 왜 그랬어? 내가 그냥 패면 된다고 했잖아. 하여간 물러빠져서는.” 권투선수 같은 폼을 잡은 서경이 짧게 잽을 날렸다. 이 새끼가 자기가 안 팬다고 말은 쉽지...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엎어놓고 팰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원한을 산다. 상대가 눈 돌아가서 칼 들고 오는 건 예사고 길 가다 총 맞을 뻔 한 적도 많다. 이번에는 엔간하면 무던하게 해결하고 싶다... 는 소망을 담아 대답한다 “그러다 등짝에 칼 맞아요. 사람이 오고가는 게 있어야지." “나는 받기만 하고 싶던데.” 이 남자의 인생은 진짜 그랬다. 입맛이 써서 나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아무렇지 않는 척 신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FBI의 오랜 수사를 비웃듯이 카림 알 지브릴은 LA에서 검거되었다. 그는 다운타운에 근거지를 두고 무기과 마약을 맞바꾸어 테러 활동의 군자금을 대다가 결국 잡혀 들어간다. 기억과 신문의 기사를 대조하다가 WWE 챔피언의 사망 기사를 발견해냈다. 이 사람은 IS를 비꼬는 발언을 했다가 총알에 어깨가 날아가 죽었다. 그가 총격 당했다는 지역에 동그라미를 쳤다. “어쨌든 다녀올게요.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한 달? 그 안엔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오래? 너 없이 내가 외로워서 어떻게 살라고?” “그럼 죽지 그래요?” “...우리 영원이가 요즘 싸늘해졌어.” 나는 LA행 비행기 표를 샀다. 비행기가 미국을 가로질렀다. 내가 없어지는 것이 당신을 외로움에 죽어버리게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구름 위에서 그런 생각을 내내 하고 있었다.
내가 FBI보다 나은 점이 두 개 있다. 카림이 LA에 있다고 확신하고 찾아다닐 수 있다는 것과 어떤 사건들이 카림의 짓인지 알 수 있다는 것. 그 뿐이다. 한번 산 인생을 다시 산다고 해 봤자 예전에도 모르는 것은 지금도 알 도리 없다. 죽기 전에 로또 당첨 번호나 외워뒀어야 했다. 남은 부분은 돈으로 때우기로 마음먹고 사람을 샀다.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아지트를 찾는다는 의뢰에 대부분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의심스러운 정보에도 돈을 걸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수상한 아파트, 수상한 이웃, 수상한 무슬림 남자들... 별 수상하지 않은 정보의 홍수 사이에서 또다시 몇 가지의 조건을 더해 가능성 있어 보이는 장소를 솎아냈다. 의심 가는 주소로 피자 배달을 시키고 내 식사론 대충 패스트푸드로 때웠다. 그 날 시킨 피자 배달이 6군데. 그 중 하나는 배달부가 실종되었다. 찾았다. 아지트는 뜻밖에도 가정집 분위기의 2층 주택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집이지만 낮에도 커튼을 쳐서 안쪽을 살펴볼 수가 없다. 이란인 4인 가족이 산다는 설정이지만 드나드는 사람은 4명을 훨씬 넘긴다. 나는 카림의 검거 뉴스를 곰곰이 떠올리며 근처를 돌아다녔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가 맞다. 암흑가의 걸출한 인재들이 이웃들과 소박하게 교류하며 지내다 검거된 일은 제법 많다. 꽃은 꽃밭에, 나무는 숲에 숨기라지. 나쁜 놈들도 껍데기는 일단 인간이라서.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일주일을 넘긴 시점에서 아지트를 드나드는 자들의 움직임을 대충 파악했다. 그들의 행선지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꼭 들리는 곳은 있다. 이 근처는 중동계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지구라 꽤 큰 이슬람 사원이 있었다. 아지트에서 나온 남자들은 꼬박꼬박 예배를 하러 사원으로 간다. 하지만 그 인원 중에 목표물의 모습은 없었다. 정면 돌파는 무리다. 그렇다고 주택가 한복판에 폭탄을 떨어트릴 만큼 돌지도 않았다. 저 놈들이 테러를 하든 기도를 하든 나는 카림의 머리만 날리면 된다. 근처 건물들을 돌아다니며 사원을 내려다보기 좋은 장소를 찾아 뒀다. 정확히는 사람 쏘기 좋은 장소를. 이상은 한 밤중에 일어났다. 나는 아지트 근처에 설치해 둔 적외선 장치가 경보음을 울려서 잠에서 깼다. 이 장치는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면 원격으로 내게 신호를 보내는데, 개나 소나 지나갈 때마다 죄다 소리를 내는 탓에 나는 선잠을 자다 깨는 것을 반복하여 퀭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날은 평범한 외출이 아니었다. 총 맞을까봐 다들 외출을 꺼리는 한밤중, 아지트에서 차가 출발했다. 곧바로 거리를 두고 뒤를 쫓았다. 차는 몇 번이나 오가느라 익숙해 진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늘 예배하러 가던 사원이다. 나는 멀리서 차를 대고 미리 봐 둔 장소로 올라갔다. 사원 앞에는 이미 귀여운 아이스크림 트럭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덩치 좋은 남자들이 내렸다. 옅은 색소에 비해 묘하게 동양적인 느낌의 외모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슬라브계. 내가 쫓아간 차 안에선 역시나 중동계 남자들이 내렸다. 종교의식을 함께할 인원들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흉흉한 분위기다. 그래도 선두에 선 남자는 싹싹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시오. 늘 큰 도움을 받고 있소.” “인사치레는 됐으니 서로 물건이나 확인하지요.” “우리가 한두 번 거래한 것도 아닌데 뭘.” 그들은 서로 물러나 물건을 보였다. 중동계 남자가 내민 케이스에는 잘 포장된 흰 봉투가 빽빽이 들어가 있다. 한 봉지를 뜯은 슬라브계 남자가 손끝을 코에 가져다대고 깊게 들이키더니 황홀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만족스럽게 손짓했다. 늘어선 부하 하나가 아이스크림 트럭의 짐칸을 열었다. 트럭에는 구식 총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확인해 보시지요.” 드디어 목표물이 차에서 내렸다. 매부리코에 얇은 입술이 강퍅해 보이는 남자. 신문에서 본 얼굴. 틀림없이 카림 알 지브릴이다. 내 년 40%어치 지갑이 되실 분. 나는 카타르시스까지 느끼며 총을 들었다. 지루한 시간도 이제 끝이다. 목표물이 트럭으로 다가간다. 그가 총기의 수량을 가늠하듯 고개를 든다. 스코프의 배율을 조정해 목표에 맞추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목표물의 얼굴이 눈앞 가득 다가온다. 모든 집중력이 한 점으로 모인다. ...모여야 하는데. 벼려진 칼날 같은 상태의 정신에 잡음이 낀다. 뒤편, 한참 위, 어딘가에서 들리는 신경을 긁는 소리. 나는 반쯤 본능적으로 내 위치에서 이탈했다. "قتل !" 다다다다!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로 총알이 빗발쳤다. “تبادل لاطلاق النار!” “الميت?” 작게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죽을 뻔 했군. 엄폐물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살핀다. 총알은 옆 건물 옥상에서 날아왔다. “هناك! تبادل لاطلاق النار !” 주변엔 이미 사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마 이 거래를 위해서 처음부터 준비되었을 사람들. 그에 비해 나는 혼자에 트인 옥상이다. 어떻게 피해야 하지? 어떻게? 손가락질하던 놈에게 총알을 먹여주자 그의 뒤에서 나타난 다른 남자들이 재차 응사한다. 앞뒤 잴 것 없이 난간을 넘어갔다. 이를 악물고 건물 벽의 요철에 매달려 바로 아래층 창문을 쏜다. 쨍 소리와 동시에 유리창을 걷어차 부수고 그 구멍으로 몸을 던진다. “....크...” 아프다! 아파! 더럽게 아팠다. 무릎을 싸잡고 구르다 겨우 몸을 폈다. 다행히 중상은 아니었지만 총알이 스쳐지나간 부분마다 피가 철철 흐른다. 유리조각도 몇 개 쯤 몸에 박혔다. 꼴이 말이 아니군. 뚫린 창을 통해 옥상의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내려왔다. “젠장! 그 자식, 자살했나?” ”산 채로 끌고 와야 한다고 했잖아.“ ”뒈졌는데 무슨 수로?“ 곧 내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눈치 챌 것이다. 숨을 돌리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비상계단을 타고 옆 건물, 또 옆 건물로 이동하고서야 골목으로 내려서 주차해놓은 차로 기어들어간다.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내달리는 동안 밖에서 한 발 늦은 외침이 들렸다. “시체가 없어!” 여기에 있거든. 정신없이 엑셀을 밟아서 호텔로 돌아왔다. 몸에 난 상처에 붕대를 감다 결국 진통제를 털어 넣었다. 일일 복용량을 훨씬 넘기고서야 통증이 가라앉았다. 실수였다. 신중하게 시도했어야 했는데 빨리 처리하고 돌아갈 생각에 눈이 멀었다. 콴의 착수금도 이미 반 이상 써 버렸다. 남은 돈을 털어 정보꾼들에게 연락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카림이 내게 상금을 걸었고 액수가 꽤 커서 근처 갱단들은 모조리 눈이 뒤집혔다고 한다. 어쩐지 가끔 외출할 때 목덜미가 선득했다. 숙소를 어서 옮겨야겠다.

07.

나는 호텔 솔른체브스카야를 찾아갔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번호를 일정한 순서대로 누르자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층이 이 호텔의 최상층이었지만 엘리베이터는 그 위로 더 올라가서야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한 층을 전부 터서 만든 거대한 방이 나왔다. 내리자마자 빨간 빛이 쏘아졌다. 보란 듯 레이저 사이트로 얼굴을 겨눈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넌? 오늘은 미팅이 없는데." "미팅? 총 들고서 사업가같이 말하는 거 웃기다고 생각 안 해?" 어깨를 으쓱하자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안 웃긴데. 요즘은 개나소나 비즈니스를 하거든. 그래서 뭐냐? 제대로 설명 못하면 죽인다." 예상된 수순이었다. 사실 10자리의 비밀번호 패턴은 '우연히 올라왔어요.'라고 말하기엔 너무 길었다. 그 10자리 번호는 키릴이 자신의 애인들에게만 공개한 사적인 연락 라인이었다. 그래서 상대도 나를 바로 죽일 수 없는 거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데서 조금 당황한 것 같지만. "키릴을 만나러 왔어." "이 엘리베이터로 오는 애들은 다 키릴을 만나러 와." "왜 왔는지 너한테 말해줘야 하냐? 그렇게 네 보스의 잠자리 취향이 궁금해?" "엑. 너 지금 나 변태취급했냐? 돈 주고 들으래도 듣기 싫거든?" "1달러 줄테니 들어봐. 키릴은 사실 잠자리에선..." "내가 뭘 어쨌다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파자마를 입은 남자가 기둥에 비뚜름하게 기대서서 이쪽을 노려본다. 잠에서 불쾌하게 깨어난 티가 팍팍 나는 찌그러진 얼굴인데도 빼어난 미남이었다. 헤어칼라라기보단 금속 같은 색채의 백금발에 아이스블루의 눈동자를 가진 귀티 나는 미모의 남자였지만 딸기 무늬 핑크색 파자마가 귀족적인 분위기를 박살내버린다. 키릴 알렉세예비치 소로킨. 8년간의 감옥살이 중 만난 러시아 마피아의 대간부였다. 로맨스 소설의 왕자님같이 생긴 주제에 키릴은 열 손가락에 전부 해골 문신이 있는 프로페셔널한 인간백정이다. 그는 경찰에게 붙잡혀서가 아니라 일종의 통과의례로 감옥에 들어왔었다. 우리는 감방 동료 겸 그가 내 엉덩이를 이용하고 나는 대가로 평안한 삶을 보장받았던 사이였다. 나는 그의 계산에 공정한 점을 높이 산다. 한 번 대 주면 대신 하루 동안의 편안한 식사와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한다. 조금 하드한 플레이까지 허락하면 약이나 술, 사치품 따위의 감옥에서 무슨 수로 손에 넣나 싶은 물건도 제공해 준다. 만족스러운 거래 상대다. 나는 서경에겐 일을 제공하고 섹스를 샀고 키릴과의 관계에서는 섹스로 일이나 물건을 샀다. 이 차이가 꽤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야 키릴, 진짜 저 새끼 네가 불렀냐?" 남자가 이쪽을 삿대질했다. 키릴은 찡그린 눈으로 나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놈인데. 누구냐?" 예상했던 반응이다. 이 시점에서 나와 키릴은 만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의 쿨한 반응이 예상 이상으로 생소해서 나는 잠시 지체했다가 입을 뗐다. “나는 한영원이야.” “너 말고.” 뚜벅뚜벅 걸어온 키릴이 코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 비밀번호를 판 게 어떤 미친년이냐고.” 190이 넘는 장신의 남자가 일부러 찍어 누르듯 내려다본다. 일부러 압박하려 드는 태도라 최대한 어깨에서 힘을 빼고 대답한다. “네가 직접 알려줬어. 꼭 찾아와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웃기는 소리 하네. 내가 사내새끼한테 패스워드를 알려줄 리가 있나.” 댁은 감빵에서 여자 맛을 보지 못해 굶주린 나머지 남자 엉덩이를 탐합니다... 라고 말해주면 기분나빠할까. 갈 데까지 간 꼴 피차 뻔히 아는 사이에 아닌 척 질색하는 모습이 우습긴 하지만 지금의 키릴은 남자는 잠자리 상대로 고려한 적도 없어 보인다. 출소하기 전, 키릴은 바깥에서 뒷배가 되어주겠다며 연락처를 알려줬었다. 내겐 쓸모없는 정보였다. 나는 당연히 서경에게 돌아갔고 소식은 끊겼다. 몇 년 후, 다시 만난 키릴은 대뜸 화부터 냈었다. ‘왜 연락을 안 해? 패스워드도 알려줬잖아! 아무한테나 가르쳐 주는 줄 알아?’ ‘미안, 까먹어서.’ ‘......‘ 안 그러게 생겨서 요구가 많아서 귀찮다고 생각했었지. 패스워드도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쓸데없다고 생각했는데 요긴하게 쓸 날이 오다니 인생 참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키릴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역시 기억 안 나. 잠시만, 잠 좀 깨고 대화하지." 긴장하지 말아야지. 당당하게 말해야 신뢰가 간다. 키릴은 상대가 말 하는 태도에 자신이 없으면 내용 또한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타입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기억 안 나는 게 당연하지. 너와 내가 만나는 건 한참 미래... 음, 대충 3년쯤 뒤 일이거든. 나는 10년 후의 미래에서 왔어." “.....” “.....” 플로어 가득 침묵이 내리깔렸다. "........씨발, 정신병자였냐?" 이런, 어떻게 말해도 신뢰가 갈 이야기는 아니었나보다. 서경 때도 그랬지만 미래에서 왔다는 말은 전혀 진담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키릴은 더는 반응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키릴 대신 남자가 총구를 들이대고 시시덕댔다. “어쩔까, 키릴. 산 채로 껍질을 벗겨볼까? 손발가락을 죄다 토막 치는 건 어때? 몇 개째에 대답하나 돈 걸고 막.” “미쳤냐. 카펫 새로 샀잖아.” “무슨 상관이야? 비닐 많이 남았는데.” 대상을 눈앞에 두고 나누기엔 섬뜩한 대화다. 대화가 실행까지 에스컬레이트하기 전에 본론을 꺼내야겠다. "물론 맨입으로 믿어달라고는 안하지. 증거로 정보를 하나 줄게. 당신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일거야." “꼬마야, 패스워드 출처 없이는 대화도 없...” “ISTL 수장 카림 알 지브릴의 은신처를 알고 있어. 아지트 정보를 줄 테니 대신 그놈들을 없애주길 바래. 카림만 죽이면 나머지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물을 따르던 키릴이 등이 일순 멈췄다. 키릴과 남자 사이에 짧게 눈빛이 오갔다. 남자가 키릴 대신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귀찮게 왜?” “카림이 LA의 체첸마피아들의 자금줄이니까. 이번에 들여온 아편만 해도 몇 십만 달러일지 감이 안 잡히던데... 뿌리를 없애고 싶지 않아?” 키릴이 몸담은 솔른체보 여단과 체첸 마피아는 앙숙 관계다. 모스크바를 두고 패권을 다투던 러시아의 조직들은 다 피로 피를 씻는 전쟁을 거친 사이지만 키릴에게는 그들을 싫어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LA 시장의 사업권을 두고 키릴과 긴 시간 경쟁중인 사이였기 때문이다. 카림과 거래하던 슬라브계 남자들은 아마 체첸 마피아들일 것이다. 그들이 손잡은 사이라는 건 이미 정보상을 통해 확인을 끝냈다. 마약을 싼 값에 공급받을 루트를 가진 체첸 특 자금력 앞에서 갓 미국에 진출한 뽀송뽀송한 간부인 키릴은 내내 골치를 썩었다. 그 자금줄을 끊을 수 있다고 하는데 혹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솔직히 이건 나보다는 키릴 쪽이 득을 보는 제안이다. 그러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수상한 놈의 말을 황송하게끔 다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더 말해보라는 양 빈정거렸다. “걔네 손잡은 걸 누가 몰라? 어디 처박혀있는지 몰라서 못 잡지. 그걸 네가 알고 있다고?" “그래. 잘 알고 있고, 죽여준다고만 하면 당장 가르쳐 주겠다니까. 당신네들 입장에서는 손 안대고 코 푸는 격 아냐?” “어떻게 알아. 댁이 무슨 007이라도 되시나?” 결정권도 없는 놈과 대화를 이어가려니 조금 짜증이 난다. 키릴은 잠을 깨겠다더니 드륵드륵 원두를 갈고 있다. 고소한 커피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나는 핸드폰을 켜고 영상을 재생시켰다. 멀어서 핸드폰 화면으로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밖에 알 수 없는 영상이 얼마 안 가 어지러운 잔상과 뛰는 소리, 총 소리, 정확하게 알아듣기는 어려운 러시아어와 아랍어의 파편만을 재생시킨다. 그것만으로도 상황 파악은 충분했는지 남자가 휙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아... 젠장, 와... 키릴, 어떻게 할까!” 남자의 도움 요청에 드디어 키릴이 커피 한 잔을 들고 돌아왔다. 여전히 졸려서 짜증나 죽겠다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 얼굴로 커피를 홀짝대다가 소파를 가리키고는 먼저 걸어가 앉는다. 마주보는 위치에 앉자 잔을 내려놓은 키릴이 상체를 숙이며 손끝으로 미니 하트를 만든다. "이봐... 한영원 씨? 너 기본이 안 되어 있잖아. 거래를 하려면 신뢰가 최소한 요 정도는 필요해." “이해해. 나도 신뢰를 주고 싶어.” “그럼 제대로 대답해 봐. 또 재미없는 농담으로 넘기려고 들면 너는 죽어.” ‘우리 잘 지내봅시다.‘ 하고 친근하게 웃어줬다. 키릴이 웃는 얼굴을 무시하며 손가락을 꼽았다. “첫 번째. 여기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나는 번호를 팔면 죽을 걸 모를 여자랑은 안 자. 죽였냐? 두 번째. 카림의 아지트 정보는 어디서 얻었나? 그 놈이 어디 숨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는데. 우리라고 안 찾아봤겠어? FBI도 모르는 걸 안다고 하는 데 뭘 보고 믿어.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네가 알아낸 루트 자체가 찝찝해서 엮이고 싶지 않는데. 싫은 감이 온다고, 아주 찌릿찌릿하게...” “아까부터 미래에서 와서 안다고 했잖아. 검거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었거든.” “내가 농담하면 죽는다고 했지?” “저 놈 내보내면 가르쳐줄게.”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남자를 턱짓하자 남자가 “정체도 모를 놈을 어떻게 보스랑 단둘이 두냐?” 라며 고개를 저었다. 키릴이 눈치를 주자 그는 가진 무기를 다 내 놓으면 나가겠다고 했다. 일리 있는 이야기라 더 생각할 것 없이 옷을 벗었다. 어깨에 찬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고, 탄약과 소형 폭탄을 내려놓은 후 옷 안감에 달아둔 나이프까지 제거해보이자 남자가 질린 얼굴로 ok사인을 보냈다. 단 둘만 남자 고민이 시작되었다. 키릴 앞에서 아는 척 한 정보들은 너무 내밀한 것들이었다. 모스크바 시절부터 이어진 경쟁관계, 라이벌의 자금원, 시크릿 플로어의 비밀번호까지. 기업비밀이라는 대답으로는 거래를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이미 정답을 말했다. 믿지 않는 상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한 단계 더 내밀한 부분까지 아는 척 하기로 했다. "음... 키릴, 나랑 섹스 해.” “......” 키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가 막혀서 입이 안 떨어진 것 같은 표정이다. 얼음 같은 푸른색 눈동자에 순식간에 흥미 대신 경멸이 떠오른다. 예상한 반응에 작게 한숨을 쉬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일단 해 보면 알게 될 거야.” “............” 하. 헛웃음을 터트린 키릴이 손을 뻗어왔다.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통을 꽉 붙들어 흔들면서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새벽 3시에 기어 들어와서, 하는 소리가아, 뭐, 세에엑스? 웃기고 자빠졌어 아주. 나는 자다 깨는 걸 더럽게 싫어해. 미친 소리로 귀찮게 한 대가는...” 장난감처럼 흔들리던 머리가 순식간에 뒤로 휙 넘어간다. 헉하고 숨을 삼킨 사이 머리가 소파에 박힌다. 뒤로 꺾인 목이 아팠다. “하하, 우리 같이 찬찬히 생각해 볼까?” 지금 키릴은 새 카펫을 더럽히는 방법을 1000개쯤 떠올리는 중인 것 같다. 문득 키릴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초면에 대뜸 떡을 치자고 해서 당황시킨 건 키릴이었는데. 정말 별 의미 없이 ‘이 정도면 잘 수 있겠군.’ 하고 값을 매기고 식은 눈으로 쳐다보던 사람이었다. 눈앞의 키릴은 기억 속의 키릴보다 더 짜증을 잘 내고 화도 잘 낸다. 차갑게 가다듬어진 느낌은 덜하고 어린 느낌이 든다. 이렇게 펄펄 뛰는 키릴도 처음 봤다. 새삼스럽게 10년이 긴 시간이긴 하다는 깨달음과 나름대로 오래 알아온 사람을 향한 생경함이 동시에 들었다. 스스로도 구차한 변명 같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어간다. 멈췄다간 정말 죽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 진짜로, 일단 한 번 자 보기만 하면 증거가 된다니까. 내가 10년 후의 당신과 아는 사이였다는 증거가." “아주 지랄을 한다....” “키릴, 키릴, 정말 딱 한번이면 된다고. 내가 맨 입으로 믿어달라고 하진 않잖아. 설마 내가 당신이랑 떡 한번 쳐 보자고 이러겠어? 댁이 한 번 자면 죽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나도 몰랐는데 그랬나보지. 이따위로 좆같을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덜 잘생길 걸 그랬군.” 키릴이 자신의 '그런 성향'을 자각한 건 십대 소년 시절이라고 들었다. 그러니까 아마 지금도 적용될 것이다. 살아가는 건 늘 불안했지만 이번은 특히 도박 같다. 목덜미에 땀이 배어나 옷이 눅눅하게 붙어오는 느낌이 든다. 작게 심호흡을 한다. 조용히 손을 쥐었다 편다. 그리고 손가락을 곧게 펴고 손목을 젖혀 스핀을 걸어... -짜악!! 키릴의 뺨을 후려갈겼다. “....?!” 고개가 휙 돌아간 키릴은 반격하지도 않고 쩍 굳어버렸다. 새하얀 뺨에 시뻘건 자국이 떠오른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럴 만도 하지. 홈그라운드 한복판에서 키릴의 뺨을 때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상황파악이 되기 전에 다음 파트로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고 기억한다. 분위기가 중요하다, 분위기가. ”키릴. 무릎 꿇어.“ ”뭐, 이.... ...?!“ 버럭 소리 지르며 일어나려던 키릴이 그대로 굳었다. 무릎을 반쯤 꿇으려고 들다가 멈춘 자세라 엉거주춤하다. 나는 벌겋게 일어난 손자국을 톡톡 치고는 웃었다. 조금 지친 기분이 든다. “착해.” “.............” 키릴의 얼굴에서 썰물처럼 핏기가 빠져나갔다.

08. R19

키릴이 자신의 마조히즘 성향을 자각한 건 십대 시절이라고 했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던 것이 이름을 알자마자 순식간에 몸집을 불리는 순간이 있다. 쉬꼴라 시절 학생들 사이를 비웃음과 함께 돌아다니던 SM 영상이 그에게는 마지막 한 발짝이었던 셈이다. 어쨌건 마조히즘은 마초적인 사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성향이었고 날 때부터 성골 마피아인 키릴은 폐쇄적이고 마초적인 사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거기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지라 그는 평생 티도 내지 않고 살아왔다고 했다. 콜걸에게 채찍으로 때리면서 하이힐로 짓밟아 달라 따위의 주문조차 한 적이 없었다고.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자연스레 깨달았다. 이 남자는 감옥을 나서는 즉시 나를 입막음으로 죽여 버릴 생각이리라고. 감옥 침대에 사지를 묶어놓고 촛농을 떨어트리면서 든 깨달음치고는 비장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현 시점에서 그의 피학적인 성적 취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감옥 안, 자신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고립된 상대, 출소 이후 언제든 죽일 수 있을 만만한 뒷배, 동성이라도 거시기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의 적당한 체격. 이 모든 것이 갖춰지기 전인 이상 현재의 키릴은 누군가에게 알릴 생각조차 한 적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 승부처였다. 나는 키릴의 안색을 살폈다. 핏기가 빠져나간 흰 얼굴은 어쩐지 도자기 인형 같다. 식은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연한 금색의 머리카락이나 흔들리는 눈동자, 고집스럽게 악문 입매까지 포함해서 그랬다. 손을 뻗어 앞머리를 걷어 준 순간 키릴은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물렸다. “.....이... 이 새끼가 정말 미쳤냐?! 죽고 싶어서 작정을...” “키릴, 목소리가 떨려.” 키릴이 다시 눈썹을 움찔 구겼다. 아까까지의 오만한 태도와는 천지차이. 그 반응이 내 말이 사실이라고 자인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내가 미친 놈 같아?” 눈을 똑바로 뜨고 올려다보자 그는 다시 흠칫했다. 연푸른 얼음 결정 빛의 홍채가 정처 없이 헤매는 꼴이 보였다. 이건 꽤 익숙한 반응이다. 괴롭혀달라는 예스 사인. 합의하에 정한 것이 아니라 오래 몸을 섞어온 섹스파트너로서 알 수 있는 은밀한 반응이다. 그에 응해 반쯤 굽혀지다 만 채인 무릎을 걷어차자 그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대리석 바닥과 무릎이 부딪히는 소리가 꽤 크게 났다. 아래가 달아오를 정도의 아픔일지, 좋은 분위기를 깨는 선을 넘은 충격일지는 내가 무릎 박은 당사자가 아니라 알 수 없다. 싫으면 알아서 총질을 하겠지 뭐. 하하, 마른 웃음이 새 나온다. 처음 그와 잤을 때는 남창질을 했다는 자괴감에 잠도 이루지 못했었는데(그러나 대가로 받아낸 감기약과 이불은 너무 좋았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유혹을 하고 있다. 다시 자괴감에 빠지는 대신 그의 파자마 목깃을 붙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고개가 젖혀지면서 목울대가 도드라졌다. 윽, 하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끌려온 키릴이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기에 마주 웃어주었다. 섹시하군. “...돌은 새끼!” 키릴은 내 양 손을 꽉 붙들어 떼어내며 욕설을 뱉었다. 잇따라 빈정거림이 쏟아진다. “어디서 뭔 소리를 듣고 와서 이 지랄을 떠는지는 모르겠는데, 너 속은 거야, 한 영원 씨... 미스터 한? 으응? 이게 틴에이저용 영화도 아니고. 뺨 때린다고 반하는 놈이 어디 있어? 너 약 빨다 왔지?” “반하라고 한 짓 아닌데? 섹스만 하자고 했잖아. 내가 미래에서 당신이랑 자 봤다는 걸 믿게 해 준다고.” 때론 억지로 정리한 표정보다 체온이 더 많은 말을 한다. 키릴의 손은 이미 땀으로 축축해져 있다. 힘이 간헐적으로 들어갔다 빠지는 것을 반복하는 사이 반죽 주물리듯 주물러진 손목이 시큰해졌다. “손 놔, 키릴.” 개를 혼내듯 씁 혀를 차자 키릴은 다시 움찔거렸다. 어이없을 만치 간단히 손이 떨어졌다. “잘 했어. 착해, 키릴. 대화를 하자고 할 때는 눈길도 안 주더니 명령형으로 말하면 듣고... 역시 당신 취향이라 그렇지?” 칭찬은 중요하다. 모욕감과 함께 주면 더 좋다. 일부러 뺨을 붙잡아 고개를 쳐들게 하고서 충분한 주의를 끈 뒤에 속삭였다. “...마조히스트라서.” 키릴의 안색은 이제 빨개졌다 파래졌다를 반복하는 중이다. 한참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몇 박자 느리게 고개를 턴다. “아, 아, 아, 아니거든, 나는.” “아니긴 뭐가.” “난,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했-” "하지만 좋아하잖아. 당신 벌써 아래가 섰는데.” 아까부터 팽팽하게 일어선 그의 잠옷 바지가 신경에 거슬린 참이었다. 천 한 장 아래로 짐승처럼 아래를 세운 주제에 거짓말도 잘한다. 무릎을 툭툭 차며 지분대다가 중심을 꾹 눌러 밟자 키릴의 몸이 헉 소리와 함께 수그러들었다. 발 아래로 발기한 성기가 짓눌리는 감각이 생생했다. 발끝으로 짓눌러 비빌 때마다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물건이 더 부피를 늘린다. 그 틈을 타 나는 그의 잠옷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뺨 맞고 무릎 꿇고 욕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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