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Au
'무슨 계집애가 무기를 다 휘두르고…….'
감상은 그것이 다였다. 직계의 도키는 문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소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그 이상 표정의 변화 없이 소녀를 걷어찼다. 배를 걷어차인 소녀는 컥, 하고 걷어차인 고양이처럼 높은 소리를 지르며 가볍게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날아가는 내내 쥐고 있던 직도가 그제야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 챙그랑. 날카로운 금속성을 울리며 구르는 도를 밟고서 도키는 방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등 뒤가 밝고 방 안은 어둡다. 복도에 불이 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은 군데군데 난 불길에 휩싸이기 직전이었다. 그대로 기름을 붓고 큰 불을 지른 후 빠져나가자는 동료도 있었지만 도키는 그래서는 생존자가 남을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내젓고 일부러 직접 들어온 참이었다. 이 방은 별채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던 차에 발견한 지하실이다. 어두운 방 안에 절망이 물때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키는 역광이 들이쳐 시꺼먼 덩어리처럼 보일 것이다. 어쩌면 염부의 나졸이 죄인을 끌고 오려고 찾아온 것처럼 보일 지도 몰랐다. 도키는 죄인의 가족들에게는 연좌제를 적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하나하나를 훑어보았다. 겁먹은 면면들이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몇몇은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았으나 도키가 장난처럼 걷어찬 돌에 머리가 깨져서 절명했다.
도키는 알려진 식구 수와 이미 죽인 자, 지금 발견한 자들을 하나하나 대조해보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숫자가 맞지 않는다. 하인임이 분명한 자들을 제하고서도 숫자가 더 많았다. 도키는 납득한 표정으로 건물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째 별채가 너무 외따로 떨어져 있다 했다. 신분이 지나치게 낮은 첩과 그 소생들을 숨겨두거나, 정을 통할 동남동녀들을 숨겨두거나, 여하간 드러내놓고 보일 수 없는 것들을 숨겨 둔 장소였을 것이다. 도키는 사람을 만난 경험은 별로 없었으나 명문가의 사람들이 뒤에서 얼마나 더러운 짓을 하는지 알기는 했다.
어찌 보면 이 자들도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도키는 머리를 휘저어 상념을 털어내었다. 저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쓸데없이 이입을 하는 것은 우울해 진 탓인 듯 했다. 피는 피로 씻어야 한다. 도키가 살면서 마음에 새긴 유일한 진리가 그것이었다. 도키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손을 치켜들어 사람 하나를 더 죽였다. 하인으로 보이는 자들을 모두 죽였을 때엔 여자들이 어여쁜 모습은 간데없이 울며 빌었다. 원수와 정을 통한 것도 죄다 싶어 모두 죽였다. 그리 넓지 않은 지하실 안에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참담한 광경이었다. 도키는 어쩔 수도 없이 미소를 지었다. 마공이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다더니 진실로 그러한 모양이었다. 양심의 가책도 뭣도 들지를 않으니. 오히려 기분이 좋고 상쾌해서 도키는 그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벽에 처박혔던 소녀는 금이 가고 부스러진 횟가루 사이에서 기침하며 엎드려 있었다. 소녀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로 어린 아이였다. 제 몸만 한 도를 들고 덤벼드는 것이 가소로웠다만 나이를 감안하면 훌륭하다고 못 해줄 것도 없었다. 도키는 그 소녀는 첩이 아니라 첩 소생 자식이거나 사생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미 죽인 사내와 얼굴이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무가의 자식인데도 팔다리는 가늘고 색은 희었다. 계집아이에 본처 소생이 아니니 훈련을 시킬 필요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도를 쥐는 법은 알고 있었다. 제법 좋은 기량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뿐이다. 저 아이를 죽이고, 다른 방을 뒤져 보고, 남은 사람이 없으면 그걸로 이 가문은 끝이다. 도키는 칠절곤을 치켜들었다.
"대협, 지금 뭐하고 계시오?"
휘두르려던 칠절곤을 거둔 것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탓이었다. 마교에서 이곳까지 함께 온 자들 중 하나였다. 도키는 그의 이름이나 별호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무공이 제법 고강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일류는 못되어도 삼류도 아니라, 꾸준한 수련과 좋은 인연만 닿는다면 말년엔 일류 고수로서 대성할 것 같았다. 그 전에 미치지만 않는다면. 그는 방 안의 꼴을 보고 엑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다가 아직 죽지 않은 아이를 발견하고는 걸어 들어왔다. 남자는 조그만 몸을 짐승 다루듯 발로 차 뒤집어 보더니 후후 웃음을 지었다. 구미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죽이기 전에 내가 좀 맛을 봐도 될까?”
“아직 어린 아이요.”
“어리던 늙었던 무슨 상관인가? 할 수만 있으면 돼.”
“끝나고 기루에나 가시오.”
“처녀동정으로 죽으면 한이 남아서 구천을 떠돌 텐데, 하고 죽는 게 저 아이에게도 낫지 않겠나?”
남자는 쭈그려 앉아 아이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다. 머리를 공을 돌려보듯 휘휘 돌려보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얼굴이 예쁘장하니 첩으로 들여도 괜찮을 것 같군. 직계님은 이 집 핏줄에 원한이 있었던 것 같지만 어린애에게 까지 그럴 것 무에 있는가? 자비를 베풀자고.”
도키는 넘겨주는 게 더 자비가 없는 짓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어떤 집에서 태어났든 간에 제 집을 풍비박산 낸 자에게 능멸을 당하며 사는 게 좋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키는 아이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동그란 곡선조차 없는 앙상하고 뻣뻣한 몸은 방사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넘겨준다면 아마 오늘 새벽을 지나지 못하고 죽는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상대가 마교에 몸을 담고 있는 한 계속 부딪힐 자라는 데에 생각이 미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일개 병졸이나 그보다 무예가 떨어지는 자이기만 했어도 거슬린다는 이유를 들어 목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와 급이 비슷한 젊은 고수들 중 하나였고 강호에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야인이나 다름없는 도키와는 달리 집안도 굳건한 자였다. 올라갈 생각만 있다면 앞길이 탄탄대로일 텐데, 일이 끝나면 은퇴하여 조용히 살고 싶은 도키로서는 미래의 권력자와 사이가 틀어져봤자 좋을 것이 없다. 도키는 반색하며 아이를 안아드는 남자를 찌푸린 눈으로 일별하고는 등을 돌려 걸어가다가 문을 나서기 전 멈추었다.
“빨리 끝내고 나오는 게 좋을 거요. 동이 트기 전 불을 지르고 몸을 뺄 생각이니.”
“내가 그런 걱정을 할 만큼 오래 할 거라고 본 것 같아 기분이 좋군. 그런데, 정말 같이 할 생각은 없나?”
“없소.”
“나중에 아까워해도 나는 모른다.”
도키는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간간히 불똥과 시체가 보이던 복도가 끝나고 정원으로 나오자 시체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도키는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았다. 연기가 피어올라 별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것 같았다. 강호에 이름을 떨치던 가문 하나가 완전히 끝났다. 별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이었으면 오히려 웃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도키는 자신이 하려고 노력해 왔던 것이 모두 종결되었다는 것을, 그는 아직 젊었지만 그의 인생은 여기서 닫힐 것이고 그리하여 남은 삶은 완성된 복수극에 따라붙은 군더더기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군데군데 성에 차지 않는 데도 있었다. 그래도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걸어 완성시킨 종점이었다. 도키는 그 밤이 화려한 축배를 드는 별이 아름다운 밤이기 보단 조용하고 안온해서 그가 다시 민초로 돌아가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밤이기를 바랬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별은 하나도 뜨지 않았지만 불이 거세고 인영이 시끄럽게 움직이는 밤이었다. 같이 온 자들이 방이며 시체의 품속을 뒤져 돈과 패물과 그보다 더한 가치를 지닌 독과 암기를 챙겨 넣고 있었다. 등 뒤 복도를 타고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난장판이다. 도키는 한 쪽 밖에 남지 않은 눈을 감고 기둥에 고개를 기대었다. 술을 한 잔 꺾고 잠들면 내일부터는 평온하리라.
암살을 업으로 삼던 가문 하나가 멸문했다. 십여 년 전 사라진 혈풍련. 그 주인의 장손이었던 자가 장성해 멸문한 집안의 원수를 갚았다. 십여 년에 걸친 복수가 끝났다. 도키는 거기에 인생을 바쳤다. 이제는 쉬어도 될 것이다.
적영은 그 실력보다는 미모로 유명한 청년이었다. 지금도 젊지만 그보다 더 젊은 시절엔 혈교의 일원으로서 어마어마한 수의 피를 손에 묻힌 살수였다고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를 배신하고 뛰쳐나와 한적한 시골에 처박히더니 적영문이라는 문파를 세우고 개파조사가 되었다. 적영문은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 문파였는데, 새로운 문도를 환영한다고 대문짝만하게 적어 붙인 주제에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즉시 지네나 두꺼비 따위의 독물에 파묻혀 목숨을 잃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술로 거대한 석상까지 움직이기 때문에 장원 안에서는 돌을 상대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던가, 문주의 최종 목표는 활강시를 만드는 거라던가. 거기다 비전절기는 도법이라고 한다. 하나하나만 떼어보면 무섭지만 결국은 괴이하고 사특한 기술을 그러모은 잡탕 문파였다. 사람들은 적영의 내력이 거짓말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외모에 있었다. 적영은 화려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미목수려한 미남자라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첫째인 암살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몰려든 여인들 때문에 백리 밖에 있어도 눈에 띌 남자인 데다가, 성품 역시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붉은 천을 목에 두르고 붉은 옷을 입고 다니니 천지사방에 나 여기 있소 하고 광고하는 꼴이라 도저히 암살을 해 낼 사람이 아니었다. 비수를 품고 은밀하게 숨어있기보다는 음악을 연주하고 꽃을 뿌리며 가마를 타고 등장할 것 같은 남자였던 것이다. 좋은 집안에 태어났었다면 행차하는 곳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쓰러트려 미공자로서 이름을 날렸을 텐데 널리 미모를 떨치지 못한 탓에 사는 고장에서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도 얼굴만 반지르르한 사기꾼에 난봉꾼이라는 소문이 따라붙는 덕에 그의 문파는 사람하나 없는 개털이었다. 시골구석에서 문파를 열어봤자 동네 청년들 노닥대는 도장 비슷하게 되는 게 최대로 흥한 것 아니겠냐만. 그렇대도 '그럼 일인전승이라고 하지 뭐. 나는 내 후학을 이을 만큼 소질 있는 아이를 찾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전혀 좌절하지 않는 것이 적영문 문주의 담대한 점이었다. 그 적영문주 적영은 붉은 장포를 걸친 채 객잔에 앉아 불퉁하게 볼을 부풀리고 있는 참이었다. 앞에 앉은 자는 방갓 그림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장년의 남자라는 것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에게 몇 안 되는 여인들의 시선이 모조리 죽일 놈 보듯 꽂혀 있어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여인들과 같이 있는 사내들에게 목하 죽일 놈 취급 받는 중인 적영이 젓가락으로 삶은 돼지고기를 깨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죽일 놈이 있으면 길게 말하지 말고 돈을 주면 돼. 사람 공짜로 부려먹으려 들지 말고.” “문주께서는 본인의 내력을 알고 싶지 않소?” “내 내력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것만이 아닐 텐데요.” 피로 피를 씻다 나와 문파를 세우고 어쩌고 하는 거창한 내력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도 적영은 꿋꿋이 자기 과거를 그리 밝혔다. 그가 정말로 뭘 하던 사람이고 어느 집안 출신의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는데, 살수 출신이라면 고아들을 모아 길러내곤 하니 어느 집안 출신인지 모르는 거야 당연하다. 그러나 누구의 휘하에서 얼마나 죽였는지는 남을 텐데 적영의 과거는 시골에 정착하기 이전이 지워진 것처럼 깨끗했다. 그것이 오히려 적영에게 뭔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는 상대의 출신으로 추정되는 살수 가문을 떠올리고는 작게 몸을 떨었다. “적영문엔 문도가 몇이요?” “하나도 없다.” 적영은 시비 거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방갓을 눌러 써서 겨우 보이는 입가가 미소를 지었다. “문주가 이미 소실된 명가의 자손이라고 하면 문파에도 힘이 들어갈지도 모르지요. 입문을 권할 때도 좀 더 어깨가 펴 지지 않겠소?” “좋은 집안 하나를 날조해다 붙이는 건 나도 할 줄 알아. 내 할아버지는 사실 소림사의 파계승의 사돈의 팔촌의 매제의 사촌동생이었네 하는 식이겠지.” 삼류 문파에서 유명한 이의 후예를 자처하는 경우는 많고도 많다. 적영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제 이름을 걸고 문파를 열어 이름을 떨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후예라는 것은 구색이야 좋지만 그게 천상에서 내려온 천손의 후예쯤이 아닌 한에야 극적인 맛이 부족하다. 적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역도로 몰릴 생각을 하고는 돼지고기를 씹었다. “아니요, 날조가 아니오. 우리는 문주가 어느 가문 출신인지 알고 있소. 문주께서 해 주시는 것을 보아 가문 재건에 한 수 보탤 수도 있으니 고려해 보시구려.” 적영은 처음 듣는, 별 관심 없는 대화주제에 예의상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처럼 물었다. “그 가문이 어딘데.” “멸문지화를 당했으니 모르는 척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오. 그러나 사내로서 가문의 원수를 보고도 그냥 넘길 수야 있겠습니까.” “있는데?” “…….” 어르고 달래도 통하지를 않는다. 방갓의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적영의 태도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거절하고 무안을 줌으로서 저열한 즐거움을 얻는 무뢰배의 그것이었다. ‘이런 자가 명가의 후손이라니…….’ 하지만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직계의 도키를 쓰러트리기 위해 그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을 자극하고 있지만 지금 이 상대같이 부정적인 반응은 처음이었다. 협의에 관심조차 없는 태도가 아닌가. 적영은 제 잔에 술을 따르고는 남자의 잔까지 채워주더니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곤 탁자에 딱 내려놓았다. 신경질적으로 딱딱대는 모양새가 어딘가 불만이 있는 사람 같다. “오늘 놀라운 이야기 많이 듣는군. 저 누군지도 모르는, 아니 이름이야 알기야 알지만, 그 직계의 도키가 내 가문의 원수고 내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하하? 금시초문이지만 대충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그 가문 후계자를 도와 줘서 네놈에게 무슨 이득이 있나?” “일찍부터 문주의 가문의 위명을 듣고 있었으므로 그 가문을 멸망시킨 무도한 자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어…….” “그냥 돈 줄 테니 거슬리는 놈 죽여 달라고 하지. 나 사람 죽이는 거 좋아하는데.” 적영은 창살 아래로 1층을 힐끔 보았다. 건물 바깥에 놓인 몇 개의 간이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남자가 있었다. 값비싼 차도 아니고 객점에서 흔하게 내 놓는 풀이며 곡물 우린 물이다. 지위가 높은 자라면 입맛을 버린다며 입에도 대지 않을 텐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홀짝대면서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술 한 잔도 같이 하기 싫게 생겼군.’ 적영의 감상은 그랬다. 교우를 쌓아 봤자 돈 한 푼 안 생길 인상의 남자였다. 머리는 간신히 산발을 면했고 입은 옷은 누덕누덕해서 거적때기나 다름없었다. 어깨가 넓고 기골이 튼튼해 한눈에 보기에도 무인일 것 같았는데도 그 흔한 검 하나 패용하지 않았다. 대신 성인 남성의 키에 달하는 길이의 지팡이가 옆에 세워져 있었는데, 적영은 지팡이 중간에 6개의 금이 마디처럼 나 있는 데서 그냥 지팡이가 아님을 알아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직계의 도키는 살계를 범한 것을 반성하고 묵언수행을 하며 도를 닦고 있다던가. 그러고도 십걸집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꾸준히 죽이고 있을 것이다. 일단 죽여 놓고 나중에 반성하면 된다는 소리 같아 적영은 실소를 머금었다. “저 놈이 내 원수라고?” 적영은 재미있는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물었다. 남자는 적영이 혹여 증오를 기억해내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렇소. 십여 년 전 문주의 가문을 멸문시킨 것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지요. 부모형제를 죽이고 본디 누려야 할 것들을 빼앗은 원수가 저놈이외다. 당시 10세에 가까웠을 테니 기억나는 것이 없지는 않을 텐데요?” “내 나이를 모르나?” “그 정도 되지 않으셨소?” “흐흐흐……. 그래, 모른다 이 말이지!” 적영은 유쾌하게 웃고 일어나 자리에 밥값을 올려놓았다. “좋아! 직계의 도키는 이 적영이 해치운다! 천만금으로도 치를 수 없는 값이니 내 문파의 부흥으로 받기로 하지. 이 몸이 십걸집의 일좌를 해치우고 최강의 10인에 들어 보이겠다!” 적영은 술을 한 잔 따라 단숨에 들이키더니 연극배우 같은 동작으로 돌아서서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입이 당장에라도 소리 칠 듯이 크게 벌어졌다. 적영이 즉시 도키를 칠 듯이 굴었기 때문이다. '문주의 특기는 암습이 아니오?' 그렇게 물을 생각이었던 그는 건너편에서 입가에 손가락을 대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고, 붉은 장포 자락을 펄럭이는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부흥이라니. 적영문은 흥한 적도 없는, 갓 만들어진, 이름도 없는 문파가 아닌가. 방갓의 남자는 곧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적영이 두고 간 돈은 식대의 절반도 못 되었다.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휘두를 것 같은 기세와는 달리, 적영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멈춰 서서 품속을 뒤졌다. 곧 찾던 것을 끄집어 낸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을 폈다. 들려나온 것은 긴 붉은 천이었는데 얇고 하늘거려서 들고 있어도 들었는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얇아도 독기와 화기를 거뜬히 막는다. 살수들이 독공에 나설 때 쓰는 것인데 적영이 훔쳐 낸 물건 중에서도 각별히 아끼는 것이다. 그는 천을 펴 복면처럼 얼굴을 가리고 머리 뒤에서 질끈 묶었다. 내내 맨 얼굴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얼굴을 가려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구면인 자들은 다들 적영의 기벽이려니 할 것이다. 적영도 새삼 정체를 숨기려 든 게 아니니까 상관없었다. 그가 얼굴을 숨기려 드는 상대는 직계의 도키, 방금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십걸집이다. 적영은 복면이 단단히 묶였는지 확인하고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1층으로 내려간 적영은 2층에 비해 압도적으로 북적거리는 정경에 인상을 구기고선 품속을 뒤졌다, 돈 몇 푼을 꺼내 든 적영은 안면이 있는 점소이를 불러 세워 돈을 떠안기고는 뭐라 작게 속살거렸다. 점소이가 사라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등을 돌려 걸어간 적영은 위에서 봐 둔 자리에 조용히 주저앉았다. 밖으로 창을 낸 벽 자리라 식사를 하고 있는 도키의 모습이 잘 보였다. 그는 국수를 산처럼 쌓아놓고 먹고 있었다. 도를 닦는 중이라는 설명과는 따로 놀고, 거지꼴인 행색과는 아주 잘 어울렸다. 가게에서 제일 저렴한 국수 그릇이 몇 개나 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깨끗하게 빈 그릇이었다. ‘저 놈 걸신이 들렸나.’ 남자는 열흘 쯤 굶은 기세로 국수를 뱃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거지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만 천하의 십걸집이라고 생각하면 어이없는 모양새였다. 객잔 1층에서 찾는 것도 웃기는 말이지만 품위가 없다. 적영은 남자가 먹는 꼴을 한참 쳐다보다가 동파육 한 접시를 주문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주문을 받고 달려가려던 점소이가 당황해서 멈춰 섰다. “아니, 시켜 놓고 어딜 가시는 겁니까?” “볕이 좋으니 밖에서 먹겠다. 밖으로 가지고 와라.” 그는 적영을 정신 나간 놈처럼 바라보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볕이 좋기야 하다. 때는 정오가 갓 지난 여름날이라 뙤약볕 아래로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1층이 미어터지는데도 밖의 간이 탁자를 이용하는 대신 그늘 안에 있으려 들었다. 꾸준히 다섯 그릇째의 국수를 비우는 거지꼴의 남자 외에는. “……?” 남자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동석해도 되냐고 묻지도 않고 맞은 편 의자에 걸터앉은 적영이 팔로 턱을 괸 채 느슨한 목소리로 물었다. “직계의 도키?” “…….” 남자는 아무 반응 없이 국수 가락을 마저 씹어 삼켰다. 후루룩 하고 입 안으로 들어간 국수를 우물거리는 모양새가 싸구려 국수가 아니라 천하의 진미를 먹는 것 같다. “네놈 같은 게?” 남자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표정에 불쾌감이 깃들자 표정이 알아보기도 힘들만큼 변했는데도 압박감이 공기를 누른다. 적영은 흐흐 웃으며 손짓을 했다. 접시를 들고 나오다가 흠칫해 뒷걸음치던 점소이가 후다닥 접시를 놓고 나갔다. 적영은 김이 오르는 돼지고기에 턱짓을 했다. “내가 사는 거다. 그 덩치에 국수나 먹고 있는 꼴이 좀 불쌍해야지. 그런데 직계의 도키 맞지?” 남자는 의심스런 눈길로 적영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직계의 도키와의 첫 의사소통이었다. 적영은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 정도에 감격하는 자신을 느끼고 어이가 없었다. 도키가 풍기던 태도는 그 만큼 같잖은 것을 대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적영은 자신이 공기 중의 먼지에서 까마득한 하수 정도로 격상된 기분이 들었다. 도키는 돼지고기와 국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침묵에 빠졌다. 목울대가 꿈틀거리면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적영에게까지 들렸다. ‘궁상맞은 데도 정도가 있지.’ 적영은 친근한 척 웃어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도키는 애타는 눈길로 고기를 바라보다가 눈을 꽉 감고는 찻잔에 손가락을 담갔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찻물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을 넣기에 적영은 조금 당황해서 바라보았다. 찻물을 뚝뚝 흘리는 손가락이 나무 탁자에 두 글자를 썼다. 금육(禁肉).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신 도 닦나?” 도키의 고개가 두 번째로 끄덕거렸다. 그는 고기 냄새의 유혹을 참아내고는 완고한 태도로 국수에 젓가락을 댔다. “그런데 이거 아나?” “?” “이 집 국수 국물은 닭고기 끓인 물이야.” “…………………….” 도키는 침음성을 내며 머리를 싸쥐었다. 그는 적영의 말을 받아주고 있는 게 귀찮아졌다. ‘찾지 말라.’는 서찰 하나만을 남기고 본교를 떠난 지 일 년이 넘었다. 말이 일 년이지 마교의 추적을 피해 일 년을 버티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다. 책사는 도키가 수족처럼 부리던 혈풍련을 추적대로 보냈다. 그들이 무릎을 꿇으며 제발 돌아와 달라고 애걸하는 탓에 도키는 도를 닦기는커녕 피해 다니느라 바빴다. 수많은 도사를 배출했다는 명산마다 추적대가 깔린 탓에 종남산에서는 고작 보름을 버텼다. 명산을 포기하고 시골구석의 절벽으로 숨어버렸다가 파계한 도사인 번서로부터 오뢰천심정법을 사사하겠다는 약조를 받고서야 내려오던 길이었다. 말 나누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난 일 년은 너무 길었다. 십걸집인 그가 오만불손한 시골 청년의 말을 짧게나마 받아준 것은 그 고독 탓일 터다. 도키는 더 이상은 말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듯 냉정한 시선을 보내곤 국수그릇을 들어 국물을 삼켰다. “여기 지삼선 하나요.” “…….” 도키는 탁자에 올라온 야채 볶음에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적영이 이제 먹을 수 있겠지? 라고 묻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적영이 접시를 슥 밀어주자 도키는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까닥이고는 젓가락을 댔다. 남들이 바치는 것을 받아먹는 게 익숙한 태도였다. 적영은 튀긴 가지가 도키의 입으로 들어가는 내내 주시하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미소를 지었다. ‘진작 처먹을 것이지.’ 도키는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요리에 조금 감동하고 말았다. 불맛이 나는 음식은 거의 반년 만이다. 원래 대식가였던 만큼 쑥과 생쌀을 씹으며 보낸 세월은 그에게는 같은 길이의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가진 돈이 부족해 가장 싼 음식으로 요기했을 뿐, 미식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인 법이다. 칼날 같던 분위기가 만족스러운 듯 누그러졌다. 열심히 야채를 씹어 삼키던 도키가 적영에게 그제야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왜?’ 고개가 한번 갸웃거리고, 턱이 설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 까닥였다. 적영은 뒤에서 탁자 수만큼 술병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린 것을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대협의 위명을 익히 듣고 흠모해왔기 때문에, 이런 시골구석에서 만나게 된 우연에 벅차 말을 걸고 만 것이라면?” 객잔의 손님들은 난데없이 놓이는 술병에 어리둥절해 했다. 점내를 돌며 술병을 돌린 점소이는 적영의 부탁대로 최대한 요란스럽게 문 밖을 가리켰다. “저 분이 사시는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문 밖에 앉은 붉은 장포의 사내에게 향했다. 거지의 앞에 앉아 음식을 권하던 사내가 쑥스럽다는 듯 좌중을 둘러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예의바르고 단정한 태도로 적영이 말했다. “적영문주 적영이 감히 십걸집이신 직계의 도키 님께 한 수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오.”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도키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술 한 병씩 돌리고 시선을 모아 거절하기 힘들게 만들자는 속셈 같았다. 치근덕대는 꼴을 보아하니 뭔가 목적이 있을 것 같긴 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요리 한 접시 얻어먹은 보답으로 받아 줄 요량이었다. 적영은 도키의 눈썹이 미미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도키는 묵묵한 무표정으로 일어셨다. 낄낄대며 따라간 적영은 마당에서 멈춰 서서 일부러 화려하게 옷자락을 휘둘렀다. 사람들이 객잔 안에서 하나둘씩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 십걸집이 행차하셔서 비무를 견식할 기회를 주겠다는데, 그 귀한 기회를 누리는 자들 치기엔 반응이 시원찮았다. 아무도 적영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이름도 없는 산골의 객잔. 대부분이 무림과 거리가 먼 상인에 농민에 양민들뿐이다. 그들은 동네 패싸움 보듯 한 마음으로 사내 둘을 구경했다. 동네 양아치보다 조금 더 나은 적영문주가 왜 거지를 붙잡고 전설 같은 고수라고 주장하는지 궁금해 하면서. 도키는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걸었다. “이봐! 비무를 청한다니까!” 적영이 소리를 질렀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도키는 자신에게 감히 소리를 지른 청년을 돌아보다가 따라오라는 듯이 휙 턱짓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땡볕 아래를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던 적영은 점점 기분이 저하되어 갔다. 적영은 틈을 보아 목을 따 버리자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그러나 도키의 등은 뒤 한번 안 돌아보고 걸어가는 중에도 칼을 꽂아줄 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도키는 한참을 걸어가다가 멈췄다. 산 속에 자리한 공터였다. 고개를 내저으며 땀을 닦던 적영은 훙 하는 파공음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들이닥쳐서 눈을 크게 떴다. 도키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쏴아아- 천천히 나뭇잎이 흔들렸다. 적영은 그대로 굳은 채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도키가 지팡이를 휘두른 것도 몰랐다. 정작 한 번의 손짓으로 공기를 바꿔놓은 도키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휘휘 돌렸다가 땅을 툭툭 쳤다가 손목을 돌렸다가 하고 있었다. 그 6개의 금이 가 있는 지팡이는 사실 칠절곤이라는 7개의 마디를 가진 곤봉으로 근거리에서 원거리까지 변화무쌍한 변화를 보여주는 기병이다. 언제 어떤 움직임을 보일 지 예상할 수 없어서 어떻게 보면 암기에 가깝다. 적영은 칠절곤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모습을 쳐다보던 도키가 고개를 까닥였다. “선공을 양보하겠다고?” 도키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고개가 다시 끄덕거렸다. 적영은 사양하지 않고 등에 맨 직도를 뽑아들었다. “아, 싸우기 전에 참고로! 난 네 손에 멸문한 가문 후예인데 아마 네놈은 기억도 못할 거다.” 도키는 예상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적영이 비소를 지었다. ‘나도 사실 몰라. 이 끄덕거리기밖에 못하는 오뚝이 같은 놈아.’ 적영은 빈틈을 살피는 것도 없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도를 휘둘렀다. 따라가는 내내 빈틈 찾기에 지쳐있던 참이다. 없는 빈틈을 찾느니 직접 만드는 것이 낫다. 깡! 칠절곤과 직도가 맞부딪힌 순간 불꽃이 튀었다. 겉으로 보기엔 나무인 칠절곤에서 쇳소리가 났다. 도키는 적영의 일격을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받아냈다. 적영은 멈추지 않고 도를 휘둘러 공격을 이어갔다. 칠절곤은 늘어나고 휘어지며 꺾이는 무기. 적영이 도가 닿지 않는 범위로 물러나는 순간 뻗어와 한방에 승패를 가를 것이다. 허나 품속까지 붙으면 변화무쌍한 경우의 수는 훨씬 줄어든다. 적영은 곤과 도의 대결로 축소시킬 작정으로 나섰다. 일합에 무위로는 하수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공격을 예상할 수 없는 기병보다는 곤을 상대하는 게 낫지 않나. 처음부터 적영에게는 정정당당하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낙관 따위 없었다. 일격 일격이 엄청난 속도를 가진 공격이 퍼부어졌다. 직도의 잔영이 점점 늘어나 적영의 주변 반경 이장이 다가갈 수조차 없는 풍압에 휩싸였다. 하수는 간단히 죽을 것이다. 버틴다 해도 화려한 도초에 시선을 뺏기는 새 왼손의 암기가 목줄을 노린다. 그러나 도키는 하수는커녕 십걸집의 일좌를 차지하는 고수. 무위가 이미 절정을 넘었다. 적영은 몇 번이나 암기를 출수하려다 그 때마다 완벽하게 대비하는 움직임을 보고 이를 갈았다. 도키는 왜 상대가 암수를 쓰지 않을까 조금 의아해졌다. 암기를 쥘 왼손을 날려버리지 않은 것만도 충분히 기회를 준 것이다. 그 순간, 적영의 도가 눈앞을 수평으로 훑고 지나갔다. 눈이 베이지는 않았으나 이어지는 풍압에 눈이 시렸다. 그 순간 적영의 왼손에서 암기 다섯 개가 동시에 흩뿌려졌다. 아마 도키는 암기를 모두 쳐 낼 것이다. 그러나 칠절곤이 암기를 쳐내느라 흐트러진 순간 직도가 목을 가른다. 캉캉캉캉캉! “……아니?!” 도키는 암기를 팔을 감싼 수갑으로 쳐냈다. 암기가 모두 빗겨나가고 튕겨나갔다. 어떤 독이 발려있을지 모를 암기를 상대로 하기엔 위험천만한 곡예다. 적영은 물 흐르는 듯한 연속동작으로 도키의 목을 노리다 삐끗하고 말았다. 도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칠절곤을 단순한 막대기처럼 휘둘렀다. 도키의 움직임은 이렇다 할 초식도 무엇도 아니었으나 단순한 만큼 힘이 담겨 있었다. 적영은 급히 직도를 끌어당겨 막아냈다. 격돌한 순간 머릿속까지 쩡하고 울리며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적영은 도신을 휘며 충격을 흘리면서 급히 고개를 들었다. 빗나간 비도가 나무에 박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이어 적수를 향했다. 적영은 그 순간 소리 높여 웃고 싶었다. 비장의 한수가 빗나갔대도 실패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공격을 소나무처럼 한 자리에서 받아내던 도키가 드디어 세 걸음을 물러난 것이다. 십걸집 중 하나를 세 걸음이나 물러나게 한 것이다. 적영은 희열을 느꼈다. 적영은 무릎을 굽히고 내려앉았다. 머리 위를 칠절곤이 스치고 지나갔다. 적영이 뒤로 쓰러지며 구르자 지나간 자리마다 칠절곤이 내려찍혔다. 적영은 구르던 서슬 그대로 미끄러지며 오른쪽을 스치고 지나가 도키의 감은 오른쪽 눈의 사각을 타고 돌았다. “에에잇! 거지새끼 지팡이 따위 잘라내 주마!” 적영의 도가 흐릿하게 빛났다. 끓어오른 기가 도신을 둘러싸자 붉은 빛이 돌았다. 적영이 도를 휙 던지자 손잡이가 손에 붙은 듯 핑그르르 돌아 역수로 잡혔다. 도키는 그 순간 상대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살수들은 도를 저렇게 쥐곤 한다. 시야의 사각을 노려 날리는 일격필살의 쾌도. 직도가 칠절곤과 도키를 동시에 베어버릴 기세로 쇄도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도 덤빌 만한 실력은 있었군…….’ 도키는 괴이한 적색광을 흩뿌리며 날아오는 움직임을 쫒다가 피하지 않고 막아섰다. 무기를 잘라 내 주겠다는 도전을 받았으니 그 무기로 붙어 줘야 할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진신내력을 끌어올렸다. 칠절곤의 대나무 자루가 우웅 떨었다. 칠절곤이 직도의 진행 방향에서 모로 세워 들렸다. 적영의 눈에 그 동작은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느렸다. 도로를 바꾸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느려!” 그대로 격돌할 것 같던 직도가 칠절곤에 닿기 직전 비틀리면서 표면을 탔다. 적영의 입 꼬리가 흉흉하게 올라갔다. 기묘하게 휘는 칼끝이 심장을 갈라놓으려 들었다. “…어…?” 카가각! 벽력같은 소음이 귀청을 찢었다. 적영이 도로를 바꾼 건 격돌하기 직전의 찰나. 대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허나 칼날이 부딪힌 건 도키의 가슴이 아니라 칠절곤이었다. 직도를 감싼 적색광이 떨리다가 폭발하듯 터졌다. 내력끼리 맞부딪혀 생긴 파동에 튕겨 날아간 적영은 버텨 서려는 시도를 계속 실패하다가 십여 장이 넘게 밀려 간 뒤에야 멈춰 섰다. 벌어진 거리를 단 한 걸음으로 좁힌 도키가 손을 뻗어 적영의 턱을 올려 쳤다. 그것으로 적영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도키는 끝까지 칠절곤의 일곱 마디를 발출하지도 않았다. 살업을 지은 것을 후회하고 은거한 고수들은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자에게 흔히 약해지곤 한다. 자기가 범한 죄이니 이제는 대가를 치를 차례라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목이다. 누구나 제 목숨은 아까운 법이라 순순히 목을 내어 주는 자들은 드물지만 상대를 용서 없이 죽이는 자도 드물다. 방갓을 쓴 남자가 굳이 적영을 찾아 온 이유도, 그가 도키를 죽일 수 있다고 믿어서라기 보단 도키가 베풀 자비를 노린 것이다. ‘안 죽었잖아?’ 그 덕에 적영은 살아 있었다. 적영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도키가 장저로 올려쳤던 턱이 빠질 듯이 덜걱거렸다. 턱뼈가 박살나지 않은 게 고마운 일이다. 적영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턱을 쓰다듬고 옷을 가다듬었다. 객잔 마당에서 뻗었으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을 테니 산 속에서 맞붙은 것이 다행이었다. ‘뭐 이 정도면 선방한 거지. 온 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구만……. 그래도 이길 수 있다.’ 일부러 시선을 잔뜩 끌어놨으니 객잔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산에서 노숙할 만한 곳은 뻔하다. 조금만 쉬다가 일어나야겠다. 집에서 챙겨 나올 것이 많다. 독공을 쓰는 자에겐 소지한 암기와 독이 곧 힘이다. ‘내가 이긴다.’ 저녁이 오면 독이 퍼질 테니까.
괴담 중에 인육만두라는 것이 있다. 관아와 먼 산골에는 손님을 죽이고 그 고기로 만두소를 만드는 객잔이 있다는 것이다. 가진 짐은 털고, 고기로는 만두를 빚고, 그 만두를 또 손님에게 파는 상술은 알뜰살뜰한 재활용의 극치다. 적영은 낭비 없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영은 김 오르는 만두를 우물거리며 길을 걸었다. 인육이 들어있는 만두는 아니다. 객잔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을 죽여다 만두를 빚을 만큼 담이 크지는 못했다. 다만 적영의 언질에 따라 음식에 독을 타 내 오기는 한다. 적영은 그렇게 몇 명의 여행자들을 죽였고, 다친 적조차 없이 쉽게 이겼다. 죽은 이 중에는 이름난 고수도 있었다. 객잔에 돌아가자 심부름을 시켰던 점소이가 먼지투성이가 된 적영의 꼴에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독을 먹고도 적영을 패퇴시킨 고수를 두려워 한 건지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했다는 타박을 겁낸 건지 적영은 알 수 없었다. 어깨를 안심시키듯 툭툭 쳐 주고 끼니 때울 음식을 받아 나오자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그 놈들도 슬슬 죽여야 할 텐데…….' 오지 산골 화전민촌, 오가는 자들이라곤 상인들만 겨우 다니는 좁은 마을에선 여행객이라면 모를까 마을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게 쉽지 않다. 적영은 마을을 뜰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들어서자 발치에서 파란 색 뱀이 발등을 스르륵 타고 올랐다. 적영은 발을 휘저어 천천히 털어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 딛는 곳 마다 작은 뭔가가 사사삭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벌레들이 밟히든 말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적영은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창고를 뒤적거리다 다시 나왔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사하는 게 좋겠다.’ 적영은 새삼 미련이 남는 표정으로 집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정원엔 직접 키운 독물들이 없는 데가 없다. 소일거리로 키운 것들이지만 돈으로 바꾸면 한 재산을 차리고도 남는다. 살아있는 것들을 데리고 떠날 수는 없으니 떠나기 전에 처분해야 할 것이다. 손해가 막심하다. 적영은 미리 소지하기 쉽도록 가공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도키를 죽이면 바로 마을을 뜨고 싶었다. 도키는 노숙할 준비를 마치며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곳에서 잠을 자 보나 했는데 이 꼴이다. 평생 야인으로 떠돌다 객사할 팔자인가 보다. 도키는 낮에 덤벼들었던 청년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도키는 딱히 적영의 정체가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가 강호를 떠도는 동안 덤벼든 젊은 놈들을 쓸어 모으면 작은 강 하나가 넘친다. 그가 도전자를 죽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돈 다음부터는 끝도 없었다. 져도 목숨은 보전하지만 이기면 십걸집을 꺾는 영예. 도키만큼 구미가 당기는 사냥감도 드물다. 정오 조금 넘어 상대한 젊은 청년도 그런 부류일 것이다. 그는 도전자들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과거의 은원이 얽혀있다고 하면 말이 달랐다. 죽이고 싶은 자들은 모두 죽였으니 그들의 친지들을 죽여 봤자 입맛만 배로 써진다. 오늘 만난 청년도 제 가문이 자신의 손에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말했지만 그의 눈에는 순수한 살의와 호승심밖에 없었다. 복수자 특유의 가슴에 맺혀 엉킨 덩어리가 보이지 않는다. 멸문지화의 원한이 있다는 말까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맹랑한 놈이었지.' 얼굴과 이름은 벌써 잊었다. 그보다는 까마득하게 높은 상대를 태연하게 옭아매려 든 수작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고도 도전한 것은 놀랍지도 않았지만 새파랗게 젊은 주제에 도에 기를 두른 것에는 놀랐다. 믿는 것 없이 덤빈 건 아니라는 소리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독 냄새를 봐선 암기를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키는 발칙한 놈이라고 생각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도키는 천성적으로 무골이라 얕은 수를 쓰는 자들을 싫어한다. 허나 그는 한창때의 젊은 것들에게 약했다. 젊은 나이에 꼭대기에 앉아본 사내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 들 시점부터는 후학들을 지켜 볼 때 마음이 좋아졌다. 도키는 가끔 자식이나 손자를 보는 마음이 이럴까 궁금했지만 가정을 이루지 않은 그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적영은 산 깊숙한 곳에서야 도키를 찾아내었다. 사람이 왕래하는 길이 아니라 사냥꾼이나 다닐 으슥한 길 중간, 계곡에 면한 작은 공터에 불빛이 타고 있었다. 목표한 남자는 한가롭게 걸터앉은 채 소나무가지를 부젓가락 삼아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적영은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본 것 마냥 눈을 크게 떴다. ‘왜 저렇게 한가로워……?’ 도키는 전혀 곧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중독 된 기미가 없었다. 음식을 사 주는 걸 핑계로 독을 먹였고 싸우는 동안 에도 옷자락을 펄럭일 때 마다 독분을 뿌렸다. 입으로 먹고 숨으로 들이쉬었으니 지금쯤엔 반응이 나타나야 한다. 적영이 사용한 독은 서서히 기력을 빼앗다가 적영이 나타날 때쯤에는 숨이 멎어가도록 조절한 것이었다. 중독된 후 세 시진을 넘었으니 얼굴에 병색이 완연해야 정상인 것이다. 적영은 대체 뭐가 잘못된 지 알 수 없어서 이를 갈았다. 도키는 왠지 머리가 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마를 짚었다. 이마는 미열은커녕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몸도 한기가 드는지 으슬으슬하다. 도키는 여름밤인데 춥다니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고뿔이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낮의 비무 후로 왠지 피곤하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간만에 몸을 움직였으니 날 듯 활기가 솟아야 정상인데 사지가 물 먹은 종이처럼 축 처졌다. 도키는 자신이 새삼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후기지수를 만나자 흘러간 세월이 비교되어 침울해 진 것이다. ‘그 놈만 없었으면 간만에 침상에 누워 잤을 텐데.’ 밥을 사 주든 말든 무시할 것을 그랬다. 도키는 편한 잠자리가 아쉬워 툴툴거렸다. 생전 아픈 일이 없던 몸인데 몸살이 날 정도면 하루 정도는 객잔에서 묵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도키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깊은 산 속이라 주변 기가 맑았다. 체내의 탁기가 빠른 속도로 밀려나갔다. ‘…….’ 적영은 어이없는 눈으로 목표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먹고 숨쉬는 걸 확인했는데 독에 중독된 게 아니라 여름감기에라도 걸린 것 같다. 적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매를 살살 흔들어보았다. 무색무취의 독이 퍼지는 것을 적영은 감지해낼 수 있었다. 고수의 걸음으로 세시진이면 따라잡기 힘든 거리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평범한 봇짐장수와 다를 바 없는 거리를 이동한 후 휴식을 취하는 것은 제 독이 체력을 떨어뜨린 덕분이라고 적영은 추측하고 있었다. 도키는 급작스러운 피로에 시달리며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 적영이 도착했을 때엔 이미 절명했거나 발작을 일으켰어야 했다. 최소한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뒹굴어야 할 놈이 지나치게 멀쩡했다. ‘그 정도 독은 안 통하신다? 죽일!’ 적영은 공격하기 전부터 패배감이 몰려와 이를 갈았다. 독으로 많은 사람을 죽여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바리바리 챙겨온 독을 써 봤자 낭비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키를 죽이려면 지금껏 쟁여 둔 독과 암기를 다 소모할 각오를 해야 한다. 독은 한번 쓰면 주워 담을 수 없는 소모품이다. 귀한 동물, 식물, 광물에서 얻어내어 오랜 시간 정제해야 겨우 몇 방울을 얻어낼 수 있기에 그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가 없다. 도키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지금껏 모아둔 재산이 거덜이 날 것이다. 목표를 죽일 수만 있다면 득 보는 투자지만 실패한다면 한 순간에 길거리에 나앉는 수준이다. 적영은 애써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했다. ‘혹시 만독불침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괴물이 나왔으면 독문의 역사가 바뀌었어야지.’ 적영은 도키를 죽이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손해를 볼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에게 허세를 부렸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위험과 이득을 저울질했다. 그 순간이었다. 어떤 병색도 없이 불을 쬐고 있던 도키가 일어났다. 그는 곧게 앉아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는 동작이 살짝 불안정한데서 독이 아예 통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비실거리는 앉음새에서 적영은 확신했다. 상대는 중독 상태다. 독이 ‘통했다.’고 하기엔 말도 안 될 절도로 미약한 증상이지만 중독 시킬 수 있었다. 가능하다. 하늘이 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영은 그 순간 움직였다. 그는 품 안에 든 독탄을 물가로 집어던졌다. 독탄은 물과 만나자마자 녹아들면서 뿌연 기체를 뿜었다. 순식간에 계곡이 독연으로 자욱해졌다. 도키는 독연이 터진 후 첫 호흡과 동시에 피를 토했다. 정순한 내공이 일순간에 흐트러지고 독기가 차올랐다. 도키는 기를 퍼트려 주변을 훑으려고 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낮에 만난 붉은 장포의 사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적영은 쉬지 않고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끼리릭- 하고 작고 불길한 소리가 났다. 적영의 수갑 안쪽에서 독 바른 바늘이 발출되었다. 바늘은 소리 없이 날아가 목표에 박혀들었다. 도키는 팔을 휘둘러 바늘을 털어냈지만 독이 퍼지기 시작했다. 도키는 칠절곤으로 바닥을 찍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어 유엽비도 열 두 자루가 꽉 들어찬 나무들 사이를 스치지도 않고 직선으로 쇄도했다. 도키가 칠절곤을 들어 휘둘렀다. 풍압에 궤도가 흐트러진 비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칼날이 닿은 지면이 물에 적신 종이처럼 녹아들었다. 연이은 실패에 적영은 이를 갈았다. 공격이 빗나갔으면 모를까 적중했는데도 상대가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멀쩡히 움직인다는 것은 독을 사용하는 자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영은 비기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일단 움직임을 봉하고 뼈 채로 녹여주겠다!’ 동시에 도키에게 등골이 쭈뼛 서는 예감이 스쳤다. 그가 크게 뛰어 자리에서 멀어진 순간, 밤하늘을 빗발 같은 은색 실선이 가득 메웠다. 피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도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은색의 비를 올려다보다가 칠절곤을 두 손으로 쥐고 들었다. 눈으로 확실하게 판별할 수는 없었다. 허나 진짜는 빗발 사이에 있다. 도키는 칠절곤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이어 눈을 감고, 더 선명해 진 감각을 향해 칠절곤을 내뻗어 당겼다. 반경 1장이 패여 나가고 칠절곤 자루에 여인의 머리카락보다 가는 철사가 휘감겼다. 일순 팽팽하게 당겨진 철사가 금방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주인이 위치를 옮긴 것이다. 도키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튕겨 날아간 수백 개의 바늘이 모닥불 불빛에 무딘 빛을 흘리고 있었다. 숲은 어둡고 이쪽은 밝다. 도키는 자신만 위치를 훤히 드러낸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영은 도키가 바늘과 철사를 모두 막아낸 것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독을 발라 빛을 죽인 암기지만, 빛을 받으면 고수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티가 난다. 적영은 모닥불을 끄기로 마음먹고 비도를 하나 꺼내 쥐었다. 도키의 빛에 익숙한 시야는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도키도 어둠에 묻히겠지만 적영이 가진 것은 자객의 눈이다.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게 기척을 느끼고 급소를 판별하는 것은 숨 쉬듯 당연한 능력이었다. 적영은 비도를 던졌다. 비도가 모닥불을 흐트러트린 순간, 도키 역시 모닥불 걷어차고 있었다. 순간 적영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어둠 속이라면 아무리 고수라도 자신을 상대하기 어려우리라고 믿었다. 아니었다. 상대의 눈은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불을 껐다. 적영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직도를 꺼내들었다. 찰나의 순간, 도키는 이미 지척지간에 다가와 있었다. 적영의 도에서 시뻘건 불빛이 타올랐다. 적영은 칠절곤의 마디가 분리되는 것을 드디어 보았다. 적영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눈을 뜨자 적영은 천장이 낮은 방 안에 있었다. 공기 중에 쓴 냄새가 가득했다. 적영은 그것이 말라가는 약초의 향이라는 것을 곧 알아챘다. 벽에 흔히 볼 수 있는 약쑥 따위가 매달려 말라가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격통이 밀려왔다. 적영은 사지가 다 붙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통을 참으며 창을 열자 탕약을 달이는 냄새가 났다. “일어나지마! 죽다 산 놈이 어딜 일어나나?” 탕약을 달이고 있던 노인이 깐깐한 표정을 지었다. 적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인은 마을의 유일한 의원이었다. 적영과 가끔씩 차를 같이 하던 사이이기도 했다. 독과 약은 뿌리를 같이 하는지라 독에 능한 자들이 약에도 능한 경우가 많았다. 적영 역시 기본적인 본초학을 익히고 있었다. 점혈 역시 잘 하니 시골 의원 노릇을 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노인이 먼저 치료하고, 그러고도 낫지 않으면 적영이 맡는다. 특히 독사에 물린 상처를 기가 막히게 치료하는지라 그를 출세길과는 소원한 사파 떨거지쯤으로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도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며 고마워했다. 그 덕에 마을의 유일한 의원과 의원 비슷한 남자는 친분이 있었다. 노인은 기절한 적영을 치료하고 간호하며 사흘을 기다렸다. 적영은 인덕을 쌓아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탕약을 받아마셨다. 노인은 미친놈이라며 욕을 하다가도 적영이 궁금해 하는 것을 알려 주었다. 산 중턱에서 엉망진창이 되어 뻗어있는 적영을 약초꾼이 구조해서 데려왔다고 했다. 안 그래도 빨간 옷이 피에 젖어 누더기가 되어있어서 산짐승에게 먹힌 줄 알았는데 살려달라고 바지자락을 붙들고 애걸했다던가. “그렇게 고수인 양 거들먹거리더니 자네도 별 수 없구먼?” “그 놈이 거짓말 한 거 아니요? 사례 하고 싶으니 누군지나 부시지.” “지금 자네 눈이 사례할 사람 눈이 아닌데?” “헛소리 한 놈 한 대만 때려주고 갚아주려고 그럽니다.” 죽어갈 고비를 넘기니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놀리려 드는 노인을 노려보며 적영은 그럴 리가 없다고 질색을 했다. 노인은 적영이 부끄럽고 민망하여 그러는 줄로 아는 듯싶었지만 적영은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누군가 우연히 주워준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물이 흐르는 곳이니 목이 말라 왔을 수야 있지만, 독연이 자욱하게 깔렸던 장소라 흙과 공기에 독이 배어 내공이 낮은 자는 발을 들여놓은 순간 급살을 맞을 것이다. 가능한 경우는 세 가지 밖에 없다. 그 약초꾼이 내공이 깊었던가, 죽어가던 자신이 계곡에서 빽빽한 나무를 거쳐 사람 다니는 길까지 기어나갔던가, 아니면……. ‘그놈, 날 안 죽인 것도 모자라서 주워가라고 옮겨놓고 갔다는 거지? 거 속도 좋군.’ 적영은 자존심이 상했다. 죽을 각오 따위 한 적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동귀어진이 되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상대는 살아남은 걸로도 모자라 자신을 살려 보냈다. 적영은 암습을 실패하고도 목표의 자비로 목숨을 구했다. 수치스러웠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자객으로서의 수치였다.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다지만 적영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은원도 없고 십걸집의 자리도 그럴듯한 전리품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는 직계의 도키의 목에 목숨을 버려가며 딸 만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은원이 생겨났다. 그를 죽이려 했는데도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구해 준 은혜고 자신을 쓰러트리고도 죽이지 않아 모멸감을 준 원한이었다. 적영은 가라앉은 얼굴로 이불을 꽉 쥐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손이 희어졌다. 의원은 피를 많이 쏟았으니 한동안 피곤하고 몸이 저릴 것이라고 했다. 적영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에 힘을 주는 훈련과 소일거리를 겸해 대나무를 깎았다. 농기구 수리나 겨우 하는 대장간에 큰돈을 주고 이음쇠를 만들었다. 긴 막대 둘이 끝의 이음쇠에 연결되어 있는 형상으로 모두 합해 6쌍이었다. 늘어놓으면 제법 길이가 길어 대나무 대롱 안에 모두 숨기는 데에 차질을 겪었다. 대롱을 연결시키면 하나의 막대가 되고 털면 늘어나도록 해야 했다. 적영은 3매의 설계도를 찢어버린 후에야 대롱과 쇠막대를 곤의 형태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일곱 개의 마디를 가진 곤이었다. 도키의 칠절곤을 본떠 만든 것이다. 적영은 도키가 이 일곱 마디를 어떻게 운용할지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을사람들이 걱정을 해 주었다. 고기를 가져다주기도 했고 약초를 가져오는 자들도 있었다. 적영은 그들과 술집에서 수다를 떨거나 독사에 물린 것을 치료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놀리듯이 웃으며 용태를 물어 올 때마다 적영은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민망해했다. 죽일 생각을 가진 채 감사받기고 사랑받기 민망한 것이다. 적영은 마음 한편이 간지러웠다. 민망하지만 따뜻한 감각이었다. 이런 순한 사람들을 없애겠다고 생각하다니 마땅히 죄스러워 해야 옳지 않은가싶어 싱숭생숭했다. 그리 죄스럽지는 않았다. 적영은 그 생각을 여행길에 가져 갈 수 없는 독물들을 마을에 방생할 생각과 동시에 했다. 적영은 몸이 걸을 만큼 회복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떠나기 전 노인에게 인사했다. 그는 적영을 나이 차 많이 나는 친구로 생각했으므로, 더는 만날 리 없을 테니 인사라도 하고 헤어지자 싶었다. 적영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 생에는 우리 만나지 맙시다.”
도키는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은 길었고 언제 끝날 지 알 수가 없었다. 쉬지 않고 달린다면 훨씬 빨리 도착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걸으나 도착하나 기다리는 것은 귀찮고 싫은 일 뿐이다. 그는 귀찮은 일을 늦게 맞이하기 위해 굳이 귀찮게 느릿느릿 걸었다. 도키는 젊은 시절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려서 남들은 해내지 못할 일을 해 냈고, 대신 남들보다 일찍 지쳐 속세에 신물을 냈다. 사람은 그리워도 사람 사는 세상이 싫으니 마음 편히 있을 곳이 없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지쳤다. 사흘 전 계곡을 메우며 빗발쳤던 독은 큰 마을 하나를 깨끗이 몰살시고도 남을 독을 뿜고 있었다. 도키는 독공을 익힌 적도 없고 만독불침의 몸도 아니다. 금강불괴에 가까워가는 몸이었지만 아직 완벽하지는 않은 것이다. 사흘 전 도키가 몸으로 받아낸 독들은 하나하나가 가문의 비전으로 전해질 법한 극독이었다. 운기를 통해 모두 몰아냈지만 이미 터진 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걸음마다 진기를 흘리며 걷는 것 같다. “내 생각엔.” 도키는 전혀 놀라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복면에 붉은 장포의 청년이 서 있었다. “내상을 입은 것 같은데.” 적영은 자랑스럽게 허리를 펴고 기쁜 얼굴로 웃었다. 도키는 청년의 얼굴이 남자치고 곱상하다고 생각했다. 복면으로 코와 입가를 가려서 다 알 수는 없지만 웃을 때 가늘게 휘어지는 눈매는 값비싼 고양이 같았다. “내 독이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만은 아닌 것 같군. 다행이다. 하마터면 상처를 받을 뻔 했지 뭐냐. 네놈이 독에 당하긴 하는 몸이라 기쁘다.” 도키는 청년의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다정스러워서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굵은 목소리가 귓가를 훑듯 달짝지근하게 달라붙어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적영은 터진 얼굴이 당겨 몹시 쓰라렸지만 우호적인 웃음을 유지하며 말했다. “도와줄까?” 도키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길은 엉망이었다. 인간이 다니라고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짐승들이 오가면서 생긴 오솔길이었다. 풀이 조금 덜 나고 죽어있다는 것을 빼고는 길이라고 하기도 뭣한 길이 끊어질듯 말듯 나 있었다. 길 양옆으로는 무릎을 넘게 자란 풀이 빽빽이 돋아 있고 폭도 사람이 지나가기엔 형편없이 좁다. 걸음을 방해하는 널려있는 암석들은 잘못 밟으면 그대로 깨져 마른 흙으로 부스러졌다. 걷기에 전혀 좋은 길은 아니지만 장점은 있었다. 인간이 다닐 수도 없는 길인만큼 주변 풍광이 인세의 것 같지 않았다.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면 똬리를 튼 영물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길을 누더기 꼴을 한 남자 하나가 걷고 있었다. 남자의 발걸음은 평지를 걷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기계적으로 한 걸음을 내딛고 이어 다음 걸음을 디딘다.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시원스레 나아가는 걸음걸이지만 묘하게 패기가 없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간간히 떠올랐다 사그라졌다. 도키는 고개를 들어서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빽빽이 솟아난 나무 틈새로 올려다 본 하늘은 녹색 그릇 밑에서 사금파리가 나간 자국을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등나무 덩굴이 잎을 늘어트려 그늘을 만들고 하늘을 쪼개 놓았다. 발치를 살피지 않고 반복되는 걸음 탓에 넝쿨이 발목에 걸렸다. 한번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 한 남자는 발목을 휘저어 덩굴을 터는 대신 그대로 발을 들었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덩굴이 끊겨나갔다. 어떻게 꼬였나 살펴보고 털기도 귀찮아 보이는 태도였다. 사실 그는 피곤이 쌓여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키는 며칠 전에 독에 중독되어 내상을 입었다. 치료는 받았지만 체력이 회복될 만큼 휴식을 취하지 않고 바로 여정을 재개했으니 축적된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독을 치료해 준 건 도키의 새 동행이 된 적영이라는 남자였는데, 중독된 연유가 그의 독공 덕분이었으므로 동행으로 받아들이기엔 영 꺼림칙했다. 도키는 그가 따라오는 것을 내버려둔 것뿐이었으니 동행이라는 것은 적영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우연히 길이 겹친 것 같군. 그러면 같이 갈 수도 있지 않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일부러 사람 길에서 벗어난 결과가 지금의 이 오솔길이다. ‘너와 나는 우연히 길이 겹친 것이 아닐 텐데.‘ 경공조차 쓰고 싶지 않아 느적대며 걷는 도키지만 편히 난 길을 마다하고 숲 속을 통과할 이유는 없다. 같이 갈 마음이 없다고 행동으로 티를 낼 작정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뻔히 드러나는 뜻을 눈치 못 챌 리가 없는데도 적영은 제멋대로였다. 도키가 아무리 험한 길로 접어들어도 꾸역꾸역 따라붙었다. 다리에 생채기가 생기고 옷에 풀물이 들고 절뚝대기 시작해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갈 길, 같이 가면 좀 좋아?” 도키는 굳건한 태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려보는 눈은 따라온다면 육시를 내겠다고 협박하는 것 같았지만 적영은 무시했다. “내가 치료도 해 줬잖아.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정도가 있어야지.” ‘치료를 허락한 거지 동행을 허락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도키는 진력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칠절곤으로 바닥에 금을 그었다. 그리고 경고를 무시하고 금을 넘어온 적영은 흠씬 두들겨 맞은 채 뻗어서 한동안 따라오지 못하는 꼴이 되었다. 도키는 이번에야말로 징그러운 거머리가 떨어지길 바랐다.
도키는 처음에는 적영을 용인할 작정이었다. 저 남자는 도키에게 들러붙을 셈인 것 같고, 무슨 연유로 따라붙는지는 몰라도 목적은 그를 죽이는 것일 터였다. 그리고 도키는 남자에게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독 역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니 흥을 돋우는 요소로 못 쳐줄 것도 없었다. 도키는 분명히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적영이 거슬리는 말을 하지만 않았더라도 길에서 동물을 주운 기분이 들어 소소한 재미를 느끼며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지루한 노정에 젊고 활기찬 동행이 싫을 리는 없다. 훨씬 더 앞서 출발한 도키를 기어코 쫓아온 적영이 도움을 허용하자마자 꺼낸 첫마디는 이러했다. "좋다. 그럼 우선 바지를 벗어라!" “.....?” 도키는 적영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의아한 표정의 도키를 불쌍히 여기는 표정을 얼굴 한가득 떠올린 적영이 자상한 스승 같은 어투로 설명을 붙였다. "음기의 독을 몰아내기 위해 나의 양기를 주입해 주겠다는 뜻이다." “..........?” 도키는 상대가 무슨 미친 소리를 하나 싶어 입을 벌렸다. 독이고 양기고 하는 설명은 이해할 가치조차 없다 싶었지만 적영이 정사를 요구했다는 것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도키는 자기가 뭔가를 착각했다고 믿고 싶었다. 도키의 상식선에선 어제까지 자기 목숨을 노렸던 남자가 운우지정을 나누자고 말하는 상황은 있을 수도 없었다. 도키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으로 적영의 하반신을 가리킨 다음 자신을 가리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영이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의 고개가 힘차게 끄덕거렸다. 도키는 마주 끄덕거리며 칠절곤을 치켜들었다. 통,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악! 왜, 왜…?” 적영의 머리에 칠절곤이 내리꽂힌 소리였다. 도키는 속 빈 수박을 두들기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몇 번을 더 두들겨 보았다. 적영은 연이어 악 소리를 지르다가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도키의 입장에서는 반은 장난이었지만 적영에게는 장난이 아니었다. 칠절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눈으로 따라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받은 철저한 교육 덕분이었으나 몸은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절없이 다섯 대째의 매질을 당한 적영이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으아아아! 치, 치료해 달라며! 도와달라며? 왜 때리는 거냐?” 어지간히 아팠던 모양인지 눈가에 눈물이 어룽어룽한다. 도키는 자연스럽게 더 때리려 들다가 손을 멈추었다. 어떻게 들어도 남자의 낮고 굵은 목소리인데도 이상하게 앵앵거리는 아이 같은 감이 있어 더 때릴 수가 없었다. 열대여섯은 어릴 나이를 감안하면 아이로 못 봐줄 것도 없기야 하다. 성적인 농지거리를 던지는 아이가 세상 어디에 있겠냐만 스물 초반의 남자들이 아랫도리에 끌려 다니느라 도를 넘은 지랄을 떠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도키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손을 내렸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비역질을 즐기는 놈인가? 아니면…….’ 도키는 독에 대해선 문외한이었고, 사창가에서는 반항이 심한 기녀들이 손님을 받게 하기 위해 독에 중독 시킨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있었다. 물론 생사를 건 전투 중에 춘약에 가까운 독을 사용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도키는 하도 문외한이다 보니 다른 독의 효과를 강하게 하기 위해 함께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하긴 약으로 쓰는 산삼과 꿀도 잘못 복용하면 죽음에 이른다는데 독공의 고수가 작정하고 독을 조합하려면 무슨 기기묘묘한 조화가 일어날지 어찌 알겠나 싶었다. ‘정말 남자의 양기…를 통해서만 치료되는 독인가?’ 도키는 깊이 고민에 빠졌다. 그는 우선 적영이 남색가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치료를 위해서라면 싫어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확인을 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도키는 말을 금하는 수행 중이었다. 겨우 안심한 적영은 곧이어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온몸의 털이 순식간에 곤두서는 살기가 도키에게서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나뭇잎이 쏴하고 떨었다. 핏, 하고 볼이 터져 피가 흘렀지만 적영은 닦을 생각도 못했다. 죽일 기세로 살기를 흘리는데도 표정은 무덤덤하게 가라앉은 채인 도키가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설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이. “……노, 농담도 못하나? 안 벗어도 된다! 물론 다리에 상처가 났다면 당연히 벗어야겠지만…….” “…….” 도키는 다리에 난 상처가 있나 떠올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 생판 처음 보는 놈과 뒹굴 필요가 없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만 그런 농을 던진 놈 앞에서 바지를 벗기는 싫다. 적영은 잔뜩 심사가 꼬인 도키를 앞에 둔 채 아무리 작은 생채기라도 독이 타고 들어갔을 수 있으니 벗어야 한다, 내가 쓴 암기는 바늘이니 꽂힌 게 아니면 당연히 생채기밖에 나지 않는다, 스치기만 해도 죽는 게 당연하다며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했다. 변하지 않는 불신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적영이 억울한 어투로 빽 소리를 쳤다. “나도 남자 맨다리를 보기는 싫다고!” 도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턱짓하고는 주저앉았다. 각반을 풀고 바짓단을 끌어올리자 가는 생채기 몇 개가 드러났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딱지가 앉지도 않고 피가 방울방울 흘렀는데 피가 보라색에 가까웠다. “이런 걸 두고 안 벗으려 들어…?” 적영이 질린 듯이 투덜거리며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가락으로 변색된 피를 훑어 맛을 보자 혀가 아리고 비위가 상했다.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있는 자신도 맛보기가 괴로운데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도키가 인간 같지 않아 적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키를 올려다보았다. 도키는 자기 다리를 쓸었다가 핥는 적영을 속이 안 좋아진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그가 게슴츠레한 시선을 던지자 그만 주먹을 날렸다. “…윽…! 이, 이번엔 대체 왜 때린 거냐? 비겁한 놈! 치료해 주려는 사람을 폭행하다니 이런 후안무치한…!” 도키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뿌득뿌득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적영은 폭력에 굴복해서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 크지 않은 보따리 짐을 풀고 약을 꺼낸다. 깨끗한 천으로 환부를 닦고 약을 붙이다 말고 아깝다며 욕을 한다. 개도 은혜를 알겠다, 녹림의 산도적보다도 못한 놈, 무도한 놈, 주절주절 끝도 없이 늘어놓던 적영이 도키의 등에 손바닥을 펴서 대고는 입을 다물었다. 직접 기를 불어넣어 기맥을 짚어가려는 것이다. 도키는 적영의 기가 몸 안을 돌수록 독이 걷히는 것을 느꼈다. 독이 막고 있던 흐름이 뚫리며 근육에 힘이 돌고 찬물로 씻은 것 마냥 상쾌해진다. 그에 비례해서 등 뒤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적영은 도키의 몸에서 빨아낸 독이 자기 피 속에서 걸러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순간 손을 떼고 엎드려 토했다. 썩은 파채같은 색의 묽은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자 엄청난 부취가 피어올랐다. 도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적영은 바닥의 액체를 아까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도키를 노려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녹광이 희번뜩 돌았다. “네놈, 대체 왜 안 죽는 거냐?” 어이가 없어서 한 질문이긴 했지만 적영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치료를 하면서 은근슬쩍 살펴 본 적영은 내심 크게 놀랐다. 너무 강해서 죽지 않은 것이다. 그뿐이었다. 도키의 몸 안은 난다 긴다 하는 강호인도 평생 구경할 수도 없는 영약과 내단으로 쌓아놓은 견고한 성벽 같았다. 적영은 괴물을 보듯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해독은 다 했으니 나머지는 직접 처리해라. 한 몇 주 운기조식 안 거르고 잘 쉬면 독 때문에 상한 곳도 다 해결될 거다. 네놈이 워낙 건강하니 며칠 안 가 나을 지도 모르고.” 적영은 독이 만들어 낸 탁기까지 처리하지는 않았다. 둘 사이에는 그럴 의리도 없고, 얼굴이 새파래져서 구토를 하는 남자에게 거기까지 바라는 건 과하기는 하다. 도키는 적영이 너무 지친 얼굴이라 그가 독을 쓴 장본인인데도 불구하고 미안해졌다. 적영은 주구장창 욕설을 늘어놓긴 했지만 끝까지 치료를 했다. 부담스러운 농담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치료하는 손놀림은 딱히 끈적거리지도 않았다. 도키는 농담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나 싶었다. “으…음, 죽겠군. 메슥거려……. 내가 골이 다 띵한데 멀쩡하게 걸어 다니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몸인 거냐?” 도키는 멀쩡하지는 않았다고 해 주고 싶었다. 독에 당한 입장에서는 비난인지 칭찬인지 애매하지만, 까마득히 어린놈이 자신의 능력에 자신없어하며 화내는 꼴이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도키는 묵언수행 중만 아니었더라도 그렇지 않다, 괜찮은 실력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하고 칭찬했을 것이다. 혈풍련이라면 누구도 바라마지 않는 도키의 칭찬이 바닥에 쓴 글씨로라도 나올 뻔 했다. “그럼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겠지. 바지를 벗어라.” 도키는 아무 생각 없이 바지를 내릴 뻔 했다가 적영의 웃음을 보고 손을 멈췄다. 못된 장난이 성공한 아이 같기도 하고 여인을 희롱하는 난봉꾼의 웃음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도키는 치밀어 오르는 오싹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타부타 따질 것 없이 적영을 후려갈겼다. 장난도 아니고 봐 주지도 않은 일격이었다. 키에 비해 가벼운 몸이 붕 떴다가 산중이라 멀리 날지도 못하고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며 떨어져 처박혔다. 아까까진 칠 때 마다 악악대던 적영은 아무 소리도 없이 가만했다. 통증과 놀람이 정도를 넘어 비명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맞은 곳을 싸쥐고 부들부들 떨던 적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젠장! 뒈질 놈 살려놨는데 육보시 하나를 못해?” 도키는 천박한 말을 싫어했다. 계집을 두고 하는 소리라도 듣기 싫었을 말을 들은 그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한쪽밖에 없는 눈을 찌푸린 도키에게 더는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 스쳤다. 애초에 독에 중독당한 것 자체가 누구 탓인가. 도키는 적영을 자근자근 밟아놓은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몸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으나 정신이 피곤했다. 도키는 사람 독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간만에 사람 사는 곳에 가니 마음이 약하고 물러져 답지 않은 짓을 한 것 같다. 한창때의 도키라면 내상이 있든 말든 적영을 죽여 놓고서야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도키는 말벗이 가지고 싶다는 바람을 포기했다. 적영은 나무에 기대 누운 채 헝겊조각처럼 구겨져 있어 따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맛있는 거 먹네. 나도 한 입 주지 그래?” 불을 피우고 앉아 벽곡단을 씹던 도키는 잠시 굳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모닥불 불빛을 받은 얼굴에 드리운 음영이 우울하게 어른거렸다. 신경 쓰지 않고 옆 자리로 걸어온 붉은 장포의 남자가 앉으란 말도 없었는데도 털썩 주저앉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시나. 나도 댁한테 먹을 것 사 줬잖아. 곡식 뭉친 환 쪼가리 하나가 뭐 그리 아깝다고.” 적영은 손에 토끼 하나를 틀어쥐고 있었다. 도를 닦느라 고기도 먹지 않는다는 사람 앞에서 휘파람을 불며 가죽을 벗기고 손질을 하더니 모닥불 위에 올린다. 산 중에서 하는 요리인데도 소금과 향초를 뿌려 구워낸 고기는 지글지글 익으며 좋은 향을 풍긴다. 도키는 조그마한 토끼 고기를 보며 간에 기별도 안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 안에 절로 고이는 침을 삼키며 외면하는 도키에게 적영이 다 익은 뒷다리를 찢어 내밀었다. 도키는 무의식적으로 건네받을 뻔 했다. “아, 고기 드시면 안 되는 몸이셨지? 이거 내가 큰 실례를 할 뻔 했군. 미안하오!” “………….” 도키는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일어났다. 그는 적영을 뒤에 남기고 숲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밤중이라도 도키에겐 큰 장애가 되지 못한다. 대놓고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으니 무안해서라도 더는 말 걸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적영은 토끼 고기를 씹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 도키도 추종술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적영에게는 혀를 내둘렀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 가는 길을 버린 지는 오래되었다. 일부러 짐승들이나 다닐 법한 길을 택했다가, 걷는 방향으로 풀 자국이 꺾일 것을 염려해 바윗돌 위만 딛기 시작했는데도 적영은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다. 도키는 적영을 떨쳐내기 위해 점점 더 험한 길을 택했다. 사람 사는 민가로 내려갈 목적이었으나 자취를 남기지 않기 위해 움직이다보니 험한 계곡 가운데에 서 있기도 했고, 절벽 끝까지 몰린 적도 있었다. 기분 나쁜 것은 피떡이 되어 계곡물에 처박혀 흘러가거나 절벽에서 떨어져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던 적영이 그러고도 자신을 쫓아온다는 것이었다. 암기를 벽에 박아 넣고 꾸역꾸역 기어 올라오는 꼴을 보고 있자면 가파른 벽도 평지처럼 걸을 수 있는 도키조차 귀신을 목도한 기분이 들어 오싹해지곤 했다. 절벽을 거의 다 기어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손을 발로 밟아 걷어차 떨어트려도 다음날이면 돌아오는 것이 적영이었다. 도키는 얼마 안가 그를 피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보다 그를 때려눕혀서 쫓아오지 못하게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키의 깨달음 이후 적영의 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매끈하고 부드럽던 붉은 장포는 진흙탕과 먼지바닥과 풀 위를 굴러 제 빛깔을 알아보기가 힘들고, 엉망으로 찢긴 옷자락에 풀씨를 잔뜩 달고 비척거리는 꼴은 거지가 따로 없었다. 둘 다 거지꼴이긴 했으나 낡은 거적을 걸친 수준인 도키에 비한다면 적영은 거지중의 상거지였다. * 도키는 산길이 점점 고와지고 잘 정비되고 걷기 쉬워진다고 느꼈다. 시내가 가까워오는 것이다. 도키는 드디어 편히 잘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싫었다. 사람에 얽혀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종남산을 떠나 근처 산으로 숨었으니 아직 섬서성 주변일 것이고, 아마 멀지 않은 곳에 장안이 펼쳐질 것이다. ‘사람이 치여 죽을 만큼 많겠지…….’ 도키는 그 틈에 끼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독은 외로움 사이가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기어오른다. 혼자 있으면 자기가 고독하다는 걸 모르는 법이지만 사람 사이에 있으면 흰 종이에 찍힌 검은 점 마냥 고독이 도드라지는 것이다. 도키는 젊은 시절 그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감내하며 몇 안 되는 인연조자 모두 쳐내었는데, 그 결과 지금의 그는 고독으로 녹이 슬어 벌건 쇳물이 흐르는 검과도 같았다. 예전엔 두렵지 않은 것이 지금은 두려우니 이것이 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무림인임을 감안하고서라도 많은 수의 사람을 죽였다. 흑도무림의 사람이 어떻게 손에 피를 안 묻히고 살겠느냐만 서도, 도키는 혼자 힘으론 없앨 수 없는 거대 문파 자체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필요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부하를 두고 비슷한 고수를 빌려올 수 있게 되기까지 그가 일으킨 살겁은 셀 수가 없다. 제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도 없는 사람들의 원수가 된 것이다. 도키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법을 몰랐다. 그저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웠다. 사람들 틈에 있으면 마음 편할 때가 없다. 본교 안이든 저잣거리든 똑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에 모여 재잘대는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안 맞은 옷을 입은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이 그립지만 사람 틈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도키는 스스로도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건가 싶었다. 물론 목표는 확실하다. 그는 모든 번뇌를 벗고 인세를 떠나고자 했다. 애초에 그것을 위해 본교로 돌아가는 중이다. 번서는 비록 파계한 도사지만 가르침 자체는 이선산 나진인에게서 사사받은 것이다. 속세를 바꾸자고 생각하지만 않았더라도 하산하지도 않았을 사람이다. 그가 돌아온다면 선인이 되는 법을 전수하겠다고 약조했으니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에 따른다면 득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도키는 그 목적을 위해 몇 년은 더 무상으로 일해야 할 것을 알았다. 번서는 도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하며 설득할망정 돌아오는 대신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조건을 걸 사람이 아니다. 분명 책사의 계책일 것이고 쓸 데가 있어 부르는 것일 터다. 그리고 또 죄를 짓겠지. 도키는 도시의 초입에서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은 하늘이 새파랬다. “안 들어가고 뭐하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키는 지친 어깨에 돌이 더 얹히는 기분으로 돌아섰다. 도키를 내내 괴롭혔단 붉은 장포의 남자가 보란 듯이 부목을 대고 절뚝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도키는 적영의 다리를 가리키고 가지를 하나 꺾은 다음 똑 분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리가 부러졌나?’ 나름 염려 섞인 질문이었는데 적영은 ‘네 부러진 다리를 2단으로 부러트려줄까?’ 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잠시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표정에 별 악의가 없고 고개가 퍽 귀엽게 갸웃거리고 있으니 다리가 부러졌냐는 질문 같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적영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 아주 깔끔하게. 뼈를 박살내는 대신 곱게 동강내줘서 고맙다. 부서진 조각이 곪지도 않을 테니 움직임만 자제한다면 멀쩡하게 붙을 것 같군!” 도키는 이죽거리는 사람을 별로 만나 본 적이 없었던 탓에 미안해해야할지 화를 내야 할 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적영이 너무 밝게 웃는 얼굴로 칭찬하듯 말을 건네서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하고 말았다. 적영은 적영대로 다리 잘 부러트려줘서 고맙다고 빈정거렸더니 도키가 얼굴을 붉히며 험험 헛기침을 해서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널 쫓아오려고 너무 열심히 걸었더니 병신이 될 것도 같다. 책임져라.” 도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엔 무슨 뜻인지 알기 쉬웠다. 아마도 그러면 자빠져서 쉬기나 하지 왜 따라왔냐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다리병신이 되는 걸 감수하고 따라와 줘서 너무너무 반갑고 기뻐?” 적영은 추측과는 정 반대로 말했다. 도키는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적영은 도키가 왜 걸음을 멈추고 섰는지 의아했다. 그들은 몇날 며칠을 험한 산 속에서 헤매다 왔다. 편한 길도 마다하고 고생을 한 몸이니 사람 사는 곳을 보면 편한 잠자리, 술, 맛있는 음식에 눈이 도는 게 당연한데 도키는 돌처럼 서 있기만 했다. 원체 야인 몰골을 한 사내이긴 하지만 산과 들을 떠도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람이 최소한의 교류도 없이 살 수는 없다. 적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사람이 만든 집과 음식과 옷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셋도 최소한으로 줄인 것이다. 그는 오는 동안 도키를 은밀히 지켜보았는데 도키는 주로 벽곡단과 풀뿌리와 나무껍질 따위를 먹었다. 적영은 객잔에서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 혼자 납득했다. ‘제대로 된 음식에 굶주려 있었으니 고기 한 점 안 들어간 소면도 꿀맛일 수밖에 없겠지.’ 마을을 떠난 지 보름이 넘었으니 안 들릴 수가 없을 것이다. 적영은 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느냐고 재차 물었다. 도키는 몹시 고민되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도시를 우회해서 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벽곡단이 다 떨어져가는 바람에 식량을 보급할 필요만 없었더라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큰 도시를 우회하는 쓸데없는 고생은 차치하더라도, 도키는 끼니 때 쓴 물이 올라오는 풀만 소처럼 씹기는 싫었다. 육류는 포기한 몸이지만 최소한 곡식 맛은 보고 살고 싶었다. 그는 고뇌에 빠졌다. 흔치않게도. 적영은 잠시 기다리다가 아무리 기다려봤자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민하게 놔두어봤자 ‘도시를 우회해서 산을 타고 빙 둘러 지나간다.’ 라는 정신 나간 결론밖에 안 나올 것 같다. 적영은 도키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우선 목욕부터 해야겠지? 내내 씻지를 못해서 찝찝해. 계곡 물에 옷 입은 채로 처박혀서 옷도 버렸고……. 따뜻하게 덥힌 물에 푹 담그고 싶다. 이거 간만이라 기대되는데. 아……. 아니지, 식사가 먼저인 것 같다. 넌 배 안 고픈가? 나는 정신 차리자마자 밥도 거르고 쫓아오느라 뱃가죽이 등가죽이랑 들러붙을 지경이야. 네놈, 왜 그렇게 빨리 걷는 거냐? 평소라면 물론 가뿐히 따라잡았겠지만 나는 부상자란 말이다. 그것도 네놈이 절벽에 던져서 다리가 부러진! ……윽!” 청산유수로 이어지는 말에 넋을 놓았던 것도 잠시, 도키는 적영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기겁해서 손을 쳐냈다. 적영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가 쳐내진 손목을 느릿하게 까닥대며 말을 이었다. “이젠 내 손모가지마저 부러트리려고 들어? 야, 이 개잡놈아. 네놈에겐 인간의 마음이 없냐?” 도키는 쥐었던 손의 감촉을 떠올리면서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매끈하고 가는 손가락이라 조금만 힘을 주면 간단히 으스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적영은 도키의 표정을 보더니 말을 하다말고 뒷걸음질 쳤다. 도키는 새삼 부러진 적영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사내라면 약자를 괴롭히는 게 아닌데 거슬려서 조금 두들겼더니 저 꼴이 났다. 생각해보면 그저 길동무 되자는 사람을 복날 개 마냥 때려잡은 것이라 비틀거리면 부축이라도 해 주는 것이 도리 같았다. 도키는 우회할 생각을 접고 도시를 향해 묵묵히 걸었다. 눈치를 보던 적영이 눈을 빛내며 곧장 따라붙었다. “미안한 줄은 아는 모양이구나. 자, 그러면 이제 날 업어라! 나는 다리가 아프다!” 도키는 무시하고 걷기만 했다. 시끄럽게 주절거리던 적영은 도키가 칠절곤을 들어보이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적영은 한동안 조용하다가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자 다시 기가 살았다. “너무하는군.” 본교에 처박혀 거의 봉문한 채 세월을 보내고, 나와서도 산 속에 숨어 사느라 들려봤자 벽촌이었다. 이런 큰 도시를 방문하는 건 간만이었다. 예상대로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이 가득했다. “정말 너무하다. 다리 아프다는데 업어주지도 않고.” 도키는 당혹스러운 심정을 애써 감추고 거리를 둘러보았다. 적영의 쉬지 않는 빽빽거림이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는 일부러 못 들은 척 하며 잘 곳을 찾았다. “내가 병신이 되면 책임질 거냐?” 도키는 귀찮은 표정으로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영이 비웃듯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오. 어떻게 책임질 건데?” 도키가 바닥에 죽일 살殺자를 썼다. “………내가 미안하다….” 도키는 병신이 되어 제 구실을 못하는 자는 죽여주는 게 자비라고 생각하므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적영은 도키의 진지한 시선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일단 짐을 풀고 식사를 할 곳을 찾아 도키는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다. 원해서 온 것은 아니지만 도시에 도착했으니 쉬어가고 싶었다. 그는 만사에 무욕한 사내였지만 식욕은 멀쩡했다. 몸이 덩치가 있어서 배가 고프면 힘을 못 쓴다. “이봐, 방금 지나간 여자 봤나? 저기 저 여자가 예뻐. 으음, 간만에 여자 생각나는군. 질펀하게 즐기면 딱 잠 잘 올 것 같은데.” 식욕이 왕성한 편이라면 성욕은 유독 무딘 편이다. 도키는 여색에 대한 화제가 경멸스러웠지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적영은 식사를 끝내고 의원에게 보이고 나면 더는 지킬 의리도 없는 사이다. 적영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도키의 팔짱을 끼며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로 갈까?” 홍등을 내건 기루였다. 도키는 책망하는 눈빛을 던지고 고개를 돌렸다. 적영이 안주로 배를 채우면 된다고 소리치며 따라오다가 곧 농담이라고 아양 떠는 소리를 냈다. 그러든 말든 도키는 처음으로 발견한 객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장기가 올라와 걸음이 빨랐다. 갑자기 빨라진 걸음을 뒤뚱대며 쫓아가던 적영이 목적지를 눈치 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미쳤냐? 저기는 너무 낡았잖아! 제대로 된 건 뭣도 없을걸! 이불은 좀이 슬고 침상은 삐걱거리고…….” 도키는 낡아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침식에 욕심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는 땟국물이고 음식은 쉬어 터져서 나올 거다! “…….” 하지만 음식에는 욕심이 있었다. 모든 것에 무뎌져가는 그가 유일하게 끊지 못하는 것이 식탐이었다. 도키는 낡은 객잔과 주변에 꼬인 파리를 살펴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 틈에 적영은 지나가던 남자와 대화를 나누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도키는 못 이기는 척 따라가 주었다. 적영이 고른 곳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객잔인데다 깨끗하고 퀘퀘한 냄새가 없었다. 도키는 적영이 으스댈 만큼 정도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니 그럭저럭 만족했다. 도키는 옮기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빈자리에 가 앉았다. “여기 주방장이 세가의 숙수 출신이랜다. 그래서 음식 맛이 훌륭하다더군.” 적영이 당연한 듯이 앞자리에 앉았다. 도키는 눈을 치켜뜨고 적영을 노려보았다. ‘안 뻗도록 살펴보며 데려다놨으면 감사히 여기고 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과 지낼 때는 아랫사람들이 처리했고 혼자 다닐 때엔 풍찬노숙을 해온지라 도키는 돈과 시설을 따져 가게를 고르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요령이 없다. 가장 먼저 보인 곳에 묵고 가장 싼 것을 먹는다. 그러다보니 만족감을 느낀 적이 드물다. 괜찮은 곳을 알려 준 것은 고맙지만 이러다 은근슬쩍 들러붙는 거 아닌가싶어 도키는 불만이 컸다. 적영은 도키의 눈초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음식을 주문했다. 그는 뭘 먹을 건지 묻지도 않은 채 요리를 고르고 당장 칭찬하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도키는 먹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음식 자체에는 고기, 생선, 소채다 하고 막연한 구분만 겨우 했다. 그래서 고기를 금한 후로는 식사 때마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이 컸는데 오늘은 선택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고가 없는 요리 둘과 볶음밥 하나, 자기 몫의 소총반두부를 시킨 적영은 고기가 안 들어간 음식을 골랐다며 감사히 여기라고 으스댔다. 도키는 귀한 대접에 익숙해서 남이 음식을 골라 바치는 게 편안했다. 도착할 요리가 마음에 들지 궁금해 하던 도키는 문득 적영은 자신의 동행이 아니며, 그가 음식을 골라 바치는 것도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도키가 가격의 반을 치르려고 하자 적영이 손을 휘저었다. “필요 없어, 거지야.” 도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돈이 없어 보이나? ……정말 없기는 하지만.’ 도키는 개털인 주머니를 떠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래서 적영이 시킨 걸로는 배 채우기에 모자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입을 다문 것이다. 도키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을 찾아서 표사 일이라도 맡아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잘못 엮이면 일만 많아지고 피곤할 테니 당기지 않았다. 그럼 호위 일을 찾을까. 기간을 정해 그 기간만큼의 수당만 챙기고 다시 움직이면 괜찮을 듯싶었다. 여비를 벌기 위해 지체했다고 하면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책사라도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도키는 당연히 적영이 모든 요리에 젓가락을 댈 줄 알았는데, 적영은 다른 요리엔 눈길도 주지 않고 두부 접시를 끌어당겨 슥슥 비빈 다음 수저를 떴다. 소총반두부는 가늘게 썬 파를 얹은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한 순두부로 도키의 눈에는 도저히 한 끼 식사로 보이지 않았다. 도키는 제 몫의 식사를 시작하면서 불안해했다. 인간이 두부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을 테니 남은 두 요리 중 하나는 적영의 몫일 터다. 도키는 도저히 배를 채우기 힘들어 보여서 고민하다가, 얼마 남지 않은 돈을 긁어모아 싼 음식을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때를 생각하면 여비를 아껴야겠지만 부끄러워서라도 사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왜 돈을 안 가지고 나왔는지 서글퍼졌다. 고민과 별개로 음식 맛은 좋아서 더 비참했다. 안 그래도 음식 고르기 힘들었는데 볶거나 찐 야채를 먹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적영은 놀리지 않고 고기가 안 들어간 음식을 골라주었다. 도키는 식사가 끝나면 감사를 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키의 불안과는 상관없이 두부를 다 퍼먹은 적영은 접시바닥에 양념을 남긴 채 손을 뗐다. “넌 밥 먹기 힘들겠다. 고기 안 먹고 어떻게 사냐? 중들도 시주 받은 고기는 먹는데.” 도카는 고기를 먹지 않고 적영은 파 얹은 두부를 골라서 식탁 위엔 육류가 없었다. 적영은 젓가락으로 볶음밥을 뒤적대다가 노랗게 익은 계란쪼가리를 집어 올렸다. “그럼 계란도 안 먹나? 이것도 태어나야 할 생명을 꺼트린 살업이잖냐?” 도키는 침묵했다. 묵언 수행 중이라서가 아니라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육을 결심했을 때 가르침을 구하기는 했으나, 그가 가르침을 구한 대상인 번서는 편식은 몸에 좋지 않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했다. ‘자네는 고기 안 먹고 살 수 있는 몸이 아니다.‘ 라고. 안 그래도 먹는 재미 말고는 취미 하나 없이 인생을 사는지라 다들 해탈 직전이라느니 열반에 들었다느니 수군거리는 도키를 정작 파계한 도사인 번서가 안 될 거라고 시작부터 못을 박았다. 그 바람에 욱해서 뛰쳐나온 게 이번 출도였고, 모르고 먹은 육수 같은 것만 제외하면 일 년 넘게 고기를 입에 안대는 데에 성공했다. 새삼 육류의 범위에 대해 고민하게 된 도키가 나도 모르겠다는 시선을 보냈다. 적영이 웃으면서 도키의 그릇에서 파를 건져 올렸다. “불가에서는 파도 금하는 걸로 아는데 도가는 잘 몰라서. 먹는 수행은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 도키는 창백한 얼굴 가득히 불신을 띄웠다. 적영 쪽에서 먼저 손가락에 물을 묻혀서 오신채라고 쓰고는 말을 잇는다.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는 강한 향으로 마음을 흩어놓아 수행을 방해하고, 공양하면 입가에 귀신이 들러붙고, 날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익혀 먹으면 음심을 일으킨다던가.” 이미 파를 먹어버린 도키가 손을 떨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외침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적영은 이어서 생선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도키의 고개가 끄덕거렸다. “치(鱼) 자가 들어가는 생선도 먹으면 안 될걸. 삼독 중 치심을 일으킨댄다.” 삼독은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냄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번뇌를 말한다. 맵게 조린 갈치, 간장을 발라 구운 꽁치, 회를 뜬 참치 등등을 떠올리자 도키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바다에 간 일이 드물어 바다고기보단 민물고기를 많이 먹었던 몸이긴 하지만 멀쩡히 먹던 음식을 못 먹게 되자 서글픔이 치솟는다. “윤기 자르르한 구운 꽁치에 간장과 파를 섞어 만든 양념장을 부어서 먹으면 그렇게 맛있지. 참치는 크기가 커서 부위별로 맛이 다 다른데 배 부위의 살을 회쳐 먹으면 야들야들하고 담백하다. 이런! 넌 못 먹겠군. 수행 때려치우시지? 다 잘 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 도키는 내가 왜 도를 닦자고 결심했는지 고뇌에 빠질 뻔 했다. 마교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뜯어말릴 때도 못 느낀 후회를 이제와서 느낄 뻔한 도키는 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를 닦는다 하고 생각을 고치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음식에서 파를 하나하나 골라내기 시작하자 적영이 다시 폭소를 터트렸다. 적영은 음식에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 도키는 인간이 저것만 먹고 살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기루에 가겠다고 했지. 지금은 간단히 요기만 하고 술이라도 마시러 갈 생각일까. 적영은 다 먹은 접시를 구석으로 밀어두고는 탁자에 팔을 괴고 엎드렸다. 순식간에 몰려온 피로에 눌려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어디로 가나? 내가 따라가기 쉽도록 순순히 불어주실까.” 적영은 그의 행보에 대해 처음으로 물었다.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으니 동행하자고 주장한 놈이 묻기엔 늦은 질문이었다. 도키는 ‘우연‘이라며 부득불 따라붙던 그를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리다가 적영이 드디어 실토했다는 작은 승리감에 화를 참았다. 도키는 탁자에 찻물로 글을 썼다. 십만대산(十萬大山), 광동 흠현(欽縣) 서북 200리. 봉우리가 십만 개라 십만대산이라고 한다. 광동과 광서를 아우를 만큼 크고 남단으로 가면 아득한 남해와 맞닿는다. 험준한 산세와 끝없는 봉우리는 영산으로 불리기 모자란 점이 없다. 그 십만의 봉우리 속 어딘가에 교주가 잠들어있다고 하여 마교도들은 그곳에 자리를 틀었다. “십만대산이라고…….” 적영은 중얼거렸다. 최남단에 붙은 산이니 도착할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죽일 기회는 충분하다. 적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본교로 돌아간 뒤의 도키를 맞서고 싶지는 않았기에 적영은 가는 도중에 처리할 결심을 굳혔다. 도키는 적영의 웃는 얼굴이 어딘지 꺼림칙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성정 상 감사를 표하는 게 당연했는데도 식사를 끝내자마자 그냥 일어나 버린 것은 그 꺼림칙함 탓이다. 도키는 적영을 남겨두고 일어나 방을 잡고는 대금을 치르려고 전낭을 여는 순간 뻣뻣이 굳었다. 전낭엔 구멍이 뚫려 있었고, 분명히 남아있긴 했던 몇 푼마저 사라져 있었다. “무슨 문제 있냐?” “.......” 도키는 빈 전낭을 보여주었다. 적영은 도키를 병신 보듯 바라보다가 품속을 뒤졌다. 방 값은 적영이 치렀다. 적영은 도키가 하려고 했던 1인실 대신 큰 방을 잡고는 당당히 같이 들어갔다. 도키는 안에서 쉬면서도 내내 깔깔대는 비웃음을 들어야 했다. 도키는 슬슬 적영이 주는 게 받기 버거워졌다. 밥 한 두 끼 정도야 까마득한 후배의 선배대접으로 치고 받아먹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착한 선배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적영한테 죽어줄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놈도 자기 죽이려고 붙어 있는 게 뻔한데 그놈 돈으로 먹고 자기가 뭣했다. 도키가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원한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도키는 원한 있는 자들의 눈빛에 익숙했는데 적영은 그 중 어느 것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큰 화를 입고 원한을 품었다고 속여 죄책감을 자극해서 목숨을 보전하려 드는 얕은 수다. 갑자기 잘해주는 것도 방법을 바꿔 빚을 만들고 자비를 구걸할 속셈일 터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들러붙는 자이니 모른 척하고 이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으나, 도키는 성정이 고지식하고 곧아 빚을 지고는 참지를 못했다. 도키는 망설이다 전음을 보냈다. [이 빚은 나중에 꼭 갚겠다.] 적영은 그때 도키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도키가 새침한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아, 그래……. 말은 고마운데. 설마 전음이었으니 묵언을 깬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묵언수행 중엔 글도 못 쓰고 다른 의사표현도 하면 안 될걸. 수행의 골자가 말을 전해서 짓는 죄를 끊고 의식의 흐름까지 멈춰서 무에 닿겠다는 거니까.” “……………….” 도키는 침통해졌다.
“파를 드셨으니 이제 여자를 사셔야지. 음심 좀 불끈불끈해?” 도키는 사기꾼을 보는 눈으로 적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금방 다시 떠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도키는 며칠을 더 머물렀다. 적영은 방 안에서 뒹굴 거리며 도키가 돌아오는 것을 살폈다. 매번 저 징글맞은 놈을 떼어버리겠다는 얼굴을 하고 나갔던 도키는 한숨 쉬며 축 쳐진 어깨로 돌아오는 짓을 사흘째 반복하더니 완전히 우울해졌다. 떠날 때 챙겨 나온 독초들의 무게를 달고 찧고 말리고 빻고 뭉쳐 독단을 만들며 소일하던 적영도 그 즘 돼서는 대체 무슨 일을 겪고 돌아온 것일까 의아하여 몰래 뒤를 밟았다. 도키는 표국에 가서 일을 구하고자 했다. 남쪽으로 가는 일이라면 방향이 좀 틀어져도 감안할 생각이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 끝에 그는 인생에서도 드문 좌절을 맛보고 있었다. 표사 일을 하려면 여럿이 숙식하며 단체행동을 해야 한다. 도키 같은, 벙어리는 둘째 치고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남자가 환대받으려면 증거가 필요하다. 그것은 의사소통도 어렵고 쓰기 힘든데다 조직 내에서 다툼을 일으키기 쉬운 성격을 상회하고도 남을 만한 압도적인 무위다. 수많은 단점을 넘어서서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별호를 대는 것이다. ‘직계의 도키‘ 라는 별호와 이름은 마교 최정상에 선 십인의 것이다. 일개 표국이 아니라 천하를 떨게 할 힘이 있다. 하지만 마교의 고수인 그로서는 자신의 이름을 댈 수가 없고, 삼류무사라 별호가 없다며 가명을 댈 만큼 요령이 좋지도 못했다. 따라서 표사들의 눈에 비친 도키는 이름도 밝히지 않을 만큼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에, 말 못하고 눈도 하나에 별호 하나 없는 삼류무사였다. 아니, 무사이기나 한지 의심스러운 걸인이었다. 벙어리 애꾸 걸인이 들어와서는 무턱대고 일이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을 들이대는데 덜컥 일을 주는 미친놈은 없다. 돌아서는 도키의 등에 대고 한 남자가 ‘듣지도 못한다면 완벽한 병신이었을 텐데.’라고 외쳤다. 손 안에서 돈을 굴리며 표국 건물을 올려다보던 적영은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들켜도 몇 대 맞는 수준에서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홀라당 가진 돈을 다 털 줄은 몰랐다. 겨우 이 정도가 도키의 전 재산일 줄도 몰랐고. 어쨌든 그의 행보를 묶은 데다 빚까지 지웠으니 성공적인 시도였다. 적영은 도키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순간 부탁을 거절하기는커녕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 자들이 콧대 높게 거들먹거리는 꼴이 퍽 우스웠다. 백 위 안에도 들지 못할 삼류들을 상대로 일을 청하는 도키는 숙식과 돈 몇 푼이 절실한 사람 같았다. ‘당연히 절실하겠다. 자기 죽이겠다는 놈 돈으로 먹고 자는데 마음이 편하면 그게 정신 나간거지. 하지만 같이 있기 싫다고 저 지랄을 떠는 꼴은 마음에 안 드는데.’ 적영은 입을 삐죽거리며 도키를 지켜보았다. 그는 상회의 호위무사 일을 얻으려 들다가 오늘 하루만 4번째의 거절을 당하고 물러났다. 마교에서는 아무리 작은 일을 시킬 적에도 어마어마한 선물을 안겨주며 송구스러워했다. 도키 스스로 일을 달라고 구걸한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도키는 처음으로 본산이 그리워졌다. 지켜보던 적영이 건물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부터 새빨간 것이 도드라지는 형상이었는데도 도키는 미동 없는 시선을 던졌다. “넌 상식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말도 못하는 놈이 와서 일이라고 쓴 종이하나만 들이대는데 어디서 받아줘?“ 도키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얼굴이 싸하게 굳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적영은 한 대 치기 전의 표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선수를 쳤다. “돈이 필요하냐? 도와줄까?” “…….”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부담 많이 가지고 받아주면 된다. 가끔 시키는 일도 좀 해 주고. 잡것들 사이에서 빌빌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걸?” 도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해 왔던 것처럼 노숙을 고려하던 참이었던 도키로서는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적영의 돈을 받아봤자 뒷일이 좋을 리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적영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내가 일을 물어다 주는 건 어떠냐? 네놈이 주구장창 거절당하는 건 말도 안하고 표정도 그따위라서지. 이 몸의 싹싹한 미소 한방이면 천금을 주고라도 쓰고 싶어 할걸. 네놈 같은 놈도 일자리에 꽂아 넣어 주고.” [미소로 돈 버는 일은 여자나 하는 일 아닌가? 날 죽이겠다던 놈이 갑자기 돕겠다는 건 또 뭐고.] "죽이기 전에 밥 값 받아가려는 거지. 한 푼도 없는 놈이니 일자리를 소개해줘서 뜯어내려고.“ 한참 침묵을 지키던 도키가 고개를 숙였다. 부목을 대어 천에 둘둘 감긴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적영은 그 꼴을 하고도 잘도 걸어 다녔지만 불편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적영의 다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다리 상태를 물었다. [다리는 좀 괜찮은가?] “무사해. 걸을 때 절뚝거리긴 하지만.” [네 다리가 무사한 이상 더는 같이 다닐 필요는 없겠군. 내 갈 길을 갈 테니 따라오지 마라. 진 빛은 다시 만날 날 갚겠다.] “무슨 개소리냐? 네놈은 돈 한 푼도 없잖아. 남쪽 끝까지 돈도 없이 가겠다고?” [늘 하던 일이다.] “밥 주면 아귀처럼 처먹는 주제에, 풀뿌리만 뜯으며 잘도 사시겠다.” […….] 긴 시간 침묵하던 도키가 마침내 전음을 보냈다. [돈 보다는 일거리로 부탁하지. 그쪽이 덜 빚지는 것 같군.] “잘 생각했다. 쉽고 돈 많이 주고 좋은 구경 많이 하는 일로 가지고 오지.” [고맙군. 그런데…….] 도키는 불쾌한 표정으로 턱을 까딱하고는 발치의 돌을 밟았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냐?] “아? 그거야 네놈이 마음에 들어서지.” […….] 도키는 그제야 적영의 차림에 신경이 닿았다. 그의 옷은 붉은 색 비단 장포로, 매끄러운 광택을 뿌리는 고급 비단이 선명한 붉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아무리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라도 저런 붉은 옷을 입지는 않는다. 살행을 과시하려고 걸치는 피 같은 검붉은 색이라면 또 모를까, 천박할 정도로 선명한 붉은 옷에 수놓인 자수는 좋은 비단을 순식간에 고급기녀나 걸칠 천으로 만들어 놓는다. 금사를 기반으로 오색실을 다 갖추어 수놓은 양귀비 꽃 문양은 장인의 손길이 돋보인다. 남자 옷에 저런 악취미적인 수를 놓을 장인은 없을 터이니 분명히 직접 주문을 맡긴 옷일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훑어본 결과는 명료하다. 상대는 비역질을 즐기는 놈이다. 도키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한 기분이 들어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그것이 상대에겐 오히려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다. 적영은 후후 웃음 지으며 질세라 따라붙어 왔다. 도키는 남색가에게 마음에 든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창백하게 안색을 굳힌 채 본능적인 혐오감에 몸을 떨었다.
천하에서 가장 빠른 이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천속성天速星 신행태보神行太保 대종戴宗이다. 공손승 일청이 말로 변해 달리면 하룻밤에 천리를 간다고 하는데, 사람 대신 준마와 비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오가는 것을 고려하면 가장 빠른 이는 명실 공히 대종일 것이다. 천하제일의 경공을 자랑한다고 일컬어지는 그는 겨우 스물여덟 먹은 청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구대천왕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종은 민초를 돌보고 지키라는 정신에 따라 수행을 쌓던 참이었는데, 술김에 이름 있는 무림인이라 자랑한 덕에 주막에서 새벽나절부터 끌려나와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관과 무림은 상호불가침이라고는 하지만 시골 작은 관아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청을 수락한 대종이었지만 사건 장소에 도착하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껏해야 도적질 정도일거라는 예상이 크게 빗나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동그란 구멍이 나서 죽어 있었다. 이마를 뚫린 자, 눈을 뚫린 자, 벌어진 입 안부터 목구멍까지 구멍이 난 자 등 다양한 시체가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중독된 증상을 보이는 시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머리를 뚫어 확인사살을 한 것 같았다. 같이 쓰인 독은 흔해빠진데다 다른 데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이 산에서 모은 독이라 어느 독문의 짓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양산박에서는 마교 고수들의 정보를 수집한다. 특히 십걸집의 능력에 대한 것은 중요한 정보였다. 곤이나 봉으로 찍어 뚫어 죽인 이런 상흔을 징표처럼 남기는 자들이 있다. ‘혈풍련?’ 대종은 삿갓을 쓴 타격대를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사파의 무리라지만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는 게 있다. 목적 없이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혈풍련은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는 사병 집단. 그들이 나섰다면 배후에 있을법한 이름은 하나밖에 없다. 직계의 도키. “그 엉덩이 무거운 양반이 웬일이지?” 대화교는 윗선으로 갈수록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해 십걸집으로 일컬어지는 자들은 체면을 중요시해서 어지간해서는 나서는 법이 없다. 그 중에서도 만나볼 일이 없는 자가 바로 직계의 도키였는데, 그는 십여 년 전의 출도 이후로 종적을 감추고 꼭 나서야 할 본교의 일에만 간간히 모습을 내비추었다. 그마저도 직접 나서는 대신 사병으로 부리는 혈풍련을 내보낼 뿐이라 천하에 안 가본 곳 없는 대종조차 마주친 적이 없었다. 듣기로는 지난 살업을 후회하여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한 채 도를 닦고 있다던가. 도키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은 것이 없다. 그가 중하지 않은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마지막 출도 이후 십여 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마교 고수 여럿이 나선 자리라면 끼여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도키와 혈풍련은 똑같은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구분이 어렵다. 그 은거한 고수가 마교의 본거지와는 한참 먼 곳에 갑자기 등장해 산골 마을을 몰살시켰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대종은 양산박에 남아있는 도키의 용모파기를 떠올리려고 했다. 애꾸눈과 산발한 머리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대종은 더는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털었다. 본산에 가면 해결책이든 지령이든 뭔가가 나올 것이다. 머리를 쓰는 것은 오학인의 일이다. 대종은 다리에 갑마를 묶었다.
개열심히 썼는데 BL전개 말고도 보고파서 판키울라다가 접은듯도 하지만 십걸집 VS 양산박 다인전쟁적 BL이 보고싶단 말이에요
적영은 그 실력보다는 미모로 유명한 청년이었다. 지금도 젊지만 그보다 더 젊은 시절엔 혈교의 일원으로서 어마어마한 수의 피를 손에 묻힌 살수였다고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를 배신하고 뛰쳐나와 한적한 시골에 처박히더니 적영문이라는 문파를 세우고 개파조사가 되었다. 적영문은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 문파였는데, 새로운 문도를 환영한다고 대문짝만하게 적어 붙인 주제에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즉시 지네나 두꺼비 따위의 독물에 파묻혀 목숨을 잃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술로 거대한 석상까지 움직이기 때문에 장원 안에서는 돌을 상대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던가, 문주의 최종 목표는 활강시를 만드는 거라던가. 거기다 비전절기는 도법이라고 한다. 하나하나만 떼어보면 무섭지만 결국은 괴이하고 사특한 기술을 그러모은 잡탕 문파였다. 사람들은 적영의 내력이 거짓말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외모에 있었다. 적영은 화려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미목수려한 미남자라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첫째인 암살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몰려든 여인들 때문에 백리 밖에 있어도 눈에 띌 남자인 데다가, 성품 역시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붉은 천을 목에 두르고 붉은 옷을 입고 다니니 천지사방에 나 여기 있소 하고 광고하는 꼴이라 도저히 암살을 해 낼 사람이 아니었다. 비수를 품고 은밀하게 숨어있기보다는 음악을 연주하고 꽃을 뿌리며 가마를 타고 등장할 것 같은 남자였던 것이다. 좋은 집안에 태어났었다면 행차하는 곳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쓰러트려 미공자로서 이름을 날렸을 텐데 널리 미모를 떨치지 못한 탓에 사는 고장에서 최고의 미남이라 불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도 얼굴만 반지르르한 사기꾼에 난봉꾼이라는 소문이 따라붙는 덕에 그의 문파는 사람하나 없는 개털이었다. 시골구석에서 문파를 열어봤자 동네 청년들 노닥대는 도장 비슷하게 되는 게 최대로 흥한 것 아니겠냐만. 그렇대도 '그럼 일인전승이라고 하지 뭐. 나는 내 후학을 이을 만큼 소질 있는 아이를 찾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전혀 좌절하지 않는 것이 적영문 문주의 담대한 점이었다. 그 적영문주 적영은 붉은 장포를 걸친 채 객잔에 앉아 불퉁하게 볼을 부풀리고 있는 참이었다. 앞에 앉은 자는 방갓 그림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장년의 남자라는 것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는 자신에게 몇 안 되는 여인들의 시선이 모조리 죽일 놈 보듯 꽂혀 있어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여인들과 같이 있는 사내들에게 목하 죽일 놈 취급 받는 중인 적영이 젓가락으로 삶은 돼지고기를 깨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죽일 놈이 있으면 길게 말하지 말고 돈을 주면 돼. 사람 공짜로 부려먹으려 들지 말고.” “문주께서는 본인의 내력을 알고 싶지 않소?” “내 내력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것만이 아닐 텐데요.” 피로 피를 씻다 나와 문파를 세우고 어쩌고 하는 거창한 내력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도 적영은 꿋꿋이 자기 과거를 그리 밝혔다. 그가 정말로 뭘 하던 사람이고 어느 집안 출신의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는데, 살수 출신이라면 고아들을 모아 길러내곤 하니 어느 집안 출신인지 모르는 거야 당연하다. 그러나 누구의 휘하에서 얼마나 죽였는지는 남을 텐데 적영의 과거는 시골에 정착하기 이전이 지워진 것처럼 깨끗했다. 그것이 오히려 적영에게 뭔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는 상대의 출신으로 추정되는 살수 가문을 떠올리고는 작게 몸을 떨었다. “적영문엔 문도가 몇이요?” “하나도 없다.” 적영은 시비 거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방갓을 눌러 써서 겨우 보이는 입가가 미소를 지었다. “문주가 이미 소실된 명가의 자손이라고 하면 문파에도 힘이 들어갈지도 모르지요. 입문을 권할 때도 좀 더 어깨가 펴 지지 않겠소?” “좋은 집안 하나를 날조해다 붙이는 건 나도 할 줄 알아. 내 할아버지는 사실 소림사의 파계승의 사돈의 팔촌의 매제의 사촌동생이었네 하는 식이겠지.” 삼류 문파에서 유명한 이의 후예를 자처하는 경우는 많고도 많다. 적영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제 이름을 걸고 문파를 열어 이름을 떨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후예라는 것은 구색이야 좋지만 그게 천상에서 내려온 천손의 후예쯤이 아닌 한에야 극적인 맛이 부족하다. 적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역도로 몰릴 생각을 하고는 돼지고기를 씹었다. “아니요, 날조가 아니오. 우리는 문주가 어느 가문 출신인지 알고 있소. 문주께서 해 주시는 것을 보아 가문 재건에 한 수 보탤 수도 있으니 고려해 보시구려.” 적영은 처음 듣는, 별 관심 없는 대화주제에 예의상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처럼 물었다. “그 가문이 어딘데.” “멸문지화를 당했으니 모르는 척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오. 그러나 사내로서 가문의 원수를 보고도 그냥 넘길 수야 있겠습니까.” “있는데?” “…….” 어르고 달래도 통하지를 않는다. 방갓의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적영의 태도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거절하고 무안을 줌으로서 저열한 즐거움을 얻는 무뢰배의 그것이었다. ‘이런 자가 명가의 후손이라니…….’ 하지만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직계의 도키를 쓰러트리기 위해 그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을 자극하고 있지만 지금 이 상대같이 부정적인 반응은 처음이었다. 협의에 관심조차 없는 태도가 아닌가. 적영은 제 잔에 술을 따르고는 남자의 잔까지 채워주더니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곤 탁자에 딱 내려놓았다. 신경질적으로 딱딱대는 모양새가 어딘가 불만이 있는 사람 같다. “오늘 놀라운 이야기 많이 듣는군. 저 누군지도 모르는, 아니 이름이야 알기야 알지만, 그 직계의 도키가 내 가문의 원수고 내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하하? 금시초문이지만 대충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그 가문 후계자를 도와 줘서 네놈에게 무슨 이득이 있나?” “일찍부터 문주의 가문의 위명을 듣고 있었으므로 그 가문을 멸망시킨 무도한 자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어…….” “그냥 돈 줄 테니 거슬리는 놈 죽여 달라고 하지. 나 사람 죽이는 거 좋아하는데.” 적영은 창살 아래로 1층을 힐끔 보았다. 건물 바깥에 놓인 몇 개의 간이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남자가 있었다. 값비싼 차도 아니고 객점에서 흔하게 내 놓는 풀이며 곡물 우린 물이다. 지위가 높은 자라면 입맛을 버린다며 입에도 대지 않을 텐데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홀짝대면서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술 한 잔도 같이 하기 싫게 생겼군.’ 적영의 감상은 그랬다. 교우를 쌓아 봤자 돈 한 푼 안 생길 인상의 남자였다. 머리는 간신히 산발을 면했고 입은 옷은 누덕누덕해서 거적때기나 다름없었다. 어깨가 넓고 기골이 튼튼해 한눈에 보기에도 무인일 것 같았는데도 그 흔한 검 하나 패용하지 않았다. 대신 성인 남성의 키에 달하는 길이의 지팡이가 옆에 세워져 있었는데, 적영은 지팡이 중간에 6개의 금이 마디처럼 나 있는 데서 그냥 지팡이가 아님을 알아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직계의 도키는 살계를 범한 것을 반성하고 묵언수행을 하며 도를 닦고 있다던가. 그러고도 십걸집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꾸준히 죽이고 있을 것이다. 일단 죽여 놓고 나중에 반성하면 된다는 소리 같아 적영은 실소를 머금었다. “저 놈이 내 원수라고?” 적영은 재미있는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물었다. 남자는 적영이 혹여 증오를 기억해내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렇소. 십여 년 전 문주의 가문을 멸문시킨 것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지요. 부모형제를 죽이고 본디 누려야 할 것들을 빼앗은 원수가 저놈이외다. 당시 10세에 가까웠을 테니 기억나는 것이 없지는 않을 텐데요?” “내 나이를 모르나?” “그 정도 되지 않으셨소?” “흐흐흐……. 그래, 모른다 이 말이지!” 적영은 유쾌하게 웃고 일어나 자리에 밥값을 올려놓았다. “좋아! 직계의 도키는 이 적영이 해치운다! 천만금으로도 치를 수 없는 값이니 내 문파의 부흥으로 받기로 하지. 이 몸이 십걸집의 일좌를 해치우고 최강의 10인에 들어 보이겠다!” 적영은 술을 한 잔 따라 단숨에 들이키더니 연극배우 같은 동작으로 돌아서서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입이 당장에라도 소리 칠 듯이 크게 벌어졌다. 적영이 즉시 도키를 칠 듯이 굴었기 때문이다. '문주의 특기는 암습이 아니오?' 그렇게 물을 생각이었던 그는 건너편에서 입가에 손가락을 대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고, 붉은 장포 자락을 펄럭이는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부흥이라니. 적영문은 흥한 적도 없는, 갓 만들어진, 이름도 없는 문파가 아닌가. 방갓의 남자는 곧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적영이 두고 간 돈은 식대의 절반도 못 되었다.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휘두를 것 같은 기세와는 달리, 적영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멈춰 서서 품속을 뒤졌다. 곧 찾던 것을 끄집어 낸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을 폈다. 들려나온 것은 긴 붉은 천이었는데 얇고 하늘거려서 들고 있어도 들었는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얇아도 독기와 화기를 거뜬히 막는다. 살수들이 독공에 나설 때 쓰는 것인데 적영이 훔쳐 낸 물건 중에서도 각별히 아끼는 것이다. 그는 천을 펴 복면처럼 얼굴을 가리고 머리 뒤에서 질끈 묶었다. 내내 맨 얼굴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얼굴을 가려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구면인 자들은 다들 적영의 기벽이려니 할 것이다. 적영도 새삼 정체를 숨기려 든 게 아니니까 상관없었다. 그가 얼굴을 숨기려 드는 상대는 직계의 도키, 방금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십걸집이다. 적영은 복면이 단단히 묶였는지 확인하고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1층으로 내려간 적영은 2층에 비해 압도적으로 북적거리는 정경에 인상을 구기고선 품속을 뒤졌다, 돈 몇 푼을 꺼내 든 적영은 안면이 있는 점소이를 불러 세워 돈을 떠안기고는 뭐라 작게 속살거렸다. 점소이가 사라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등을 돌려 걸어간 적영은 위에서 봐 둔 자리에 조용히 주저앉았다. 밖으로 창을 낸 벽 자리라 식사를 하고 있는 도키의 모습이 잘 보였다. 그는 국수를 산처럼 쌓아놓고 먹고 있었다. 도를 닦는 중이라는 설명과는 따로 놀고, 거지꼴인 행색과는 아주 잘 어울렸다. 가게에서 제일 저렴한 국수 그릇이 몇 개나 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깨끗하게 빈 그릇이었다. ‘저 놈 걸신이 들렸나.’ 남자는 열흘 쯤 굶은 기세로 국수를 뱃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거지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만 천하의 십걸집이라고 생각하면 어이없는 모양새였다. 객잔 1층에서 찾는 것도 웃기는 말이지만 품위가 없다. 적영은 남자가 먹는 꼴을 한참 쳐다보다가 동파육 한 접시를 주문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주문을 받고 달려가려던 점소이가 당황해서 멈춰 섰다. “아니, 시켜 놓고 어딜 가시는 겁니까?” “볕이 좋으니 밖에서 먹겠다. 밖으로 가지고 와라.” 그는 적영을 정신 나간 놈처럼 바라보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볕이 좋기야 하다. 때는 정오가 갓 지난 여름날이라 뙤약볕 아래로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1층이 미어터지는데도 밖의 간이 탁자를 이용하는 대신 그늘 안에 있으려 들었다. 꾸준히 다섯 그릇째의 국수를 비우는 거지꼴의 남자 외에는. “……?” 남자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동석해도 되냐고 묻지도 않고 맞은 편 의자에 걸터앉은 적영이 팔로 턱을 괸 채 느슨한 목소리로 물었다. “직계의 도키?” “…….” 남자는 아무 반응 없이 국수 가락을 마저 씹어 삼켰다. 후루룩 하고 입 안으로 들어간 국수를 우물거리는 모양새가 싸구려 국수가 아니라 천하의 진미를 먹는 것 같다. “네놈 같은 게?” 남자는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표정에 불쾌감이 깃들자 표정이 알아보기도 힘들만큼 변했는데도 압박감이 공기를 누른다. 적영은 흐흐 웃으며 손짓을 했다. 접시를 들고 나오다가 흠칫해 뒷걸음치던 점소이가 후다닥 접시를 놓고 나갔다. 적영은 김이 오르는 돼지고기에 턱짓을 했다. “내가 사는 거다. 그 덩치에 국수나 먹고 있는 꼴이 좀 불쌍해야지. 그런데 직계의 도키 맞지?” 남자는 의심스런 눈길로 적영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직계의 도키와의 첫 의사소통이었다. 적영은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 정도에 감격하는 자신을 느끼고 어이가 없었다. 도키가 풍기던 태도는 그 만큼 같잖은 것을 대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적영은 자신이 공기 중의 먼지에서 까마득한 하수 정도로 격상된 기분이 들었다. 도키는 돼지고기와 국수를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침묵에 빠졌다. 목울대가 꿈틀거리면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적영에게까지 들렸다. ‘궁상맞은 데도 정도가 있지.’ 적영은 친근한 척 웃어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도키는 애타는 눈길로 고기를 바라보다가 눈을 꽉 감고는 찻잔에 손가락을 담갔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찻물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을 넣기에 적영은 조금 당황해서 바라보았다. 찻물을 뚝뚝 흘리는 손가락이 나무 탁자에 두 글자를 썼다. 금육(禁肉).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신 도 닦나?” 도키의 고개가 두 번째로 끄덕거렸다. 그는 고기 냄새의 유혹을 참아내고는 완고한 태도로 국수에 젓가락을 댔다. “그런데 이거 아나?” “?” “이 집 국수 국물은 닭고기 끓인 물이야.” “…………………….” 도키는 침음성을 내며 머리를 싸쥐었다. 그는 적영의 말을 받아주고 있는 게 귀찮아졌다. ‘찾지 말라.’는 서찰 하나만을 남기고 본교를 떠난 지 일 년이 넘었다. 말이 일 년이지 마교의 추적을 피해 일 년을 버티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는다. 책사는 도키가 수족처럼 부리던 혈풍련을 추적대로 보냈다. 그들이 무릎을 꿇으며 제발 돌아와 달라고 애걸하는 탓에 도키는 도를 닦기는커녕 피해 다니느라 바빴다. 수많은 도사를 배출했다는 명산마다 추적대가 깔린 탓에 종남산에서는 고작 보름을 버텼다. 명산을 포기하고 시골구석의 절벽으로 숨어버렸다가 파계한 도사인 번서로부터 오뢰천심정법을 사사하겠다는 약조를 받고서야 내려오던 길이었다. 말 나누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난 일 년은 너무 길었다. 십걸집인 그가 오만불손한 시골 청년의 말을 짧게나마 받아준 것은 그 고독 탓일 터다. 도키는 더 이상은 말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듯 냉정한 시선을 보내곤 국수그릇을 들어 국물을 삼켰다. “여기 지삼선 하나요.” “…….” 도키는 탁자에 올라온 야채 볶음에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적영이 이제 먹을 수 있겠지? 라고 묻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적영이 접시를 슥 밀어주자 도키는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까닥이고는 젓가락을 댔다. 남들이 바치는 것을 받아먹는 게 익숙한 태도였다. 적영은 튀긴 가지가 도키의 입으로 들어가는 내내 주시하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미소를 지었다. ‘진작 처먹을 것이지.’ 도키는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요리에 조금 감동하고 말았다. 불맛이 나는 음식은 거의 반년 만이다. 원래 대식가였던 만큼 쑥과 생쌀을 씹으며 보낸 세월은 그에게는 같은 길이의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가진 돈이 부족해 가장 싼 음식으로 요기했을 뿐, 미식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인 법이다. 칼날 같던 분위기가 만족스러운 듯 누그러졌다. 열심히 야채를 씹어 삼키던 도키가 적영에게 그제야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왜?’ 고개가 한번 갸웃거리고, 턱이 설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 까닥였다. 적영은 뒤에서 탁자 수만큼 술병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린 것을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대협의 위명을 익히 듣고 흠모해왔기 때문에, 이런 시골구석에서 만나게 된 우연에 벅차 말을 걸고 만 것이라면?” 객잔의 손님들은 난데없이 놓이는 술병에 어리둥절해 했다. 점내를 돌며 술병을 돌린 점소이는 적영의 부탁대로 최대한 요란스럽게 문 밖을 가리켰다. “저 분이 사시는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문 밖에 앉은 붉은 장포의 사내에게 향했다. 거지의 앞에 앉아 음식을 권하던 사내가 쑥스럽다는 듯 좌중을 둘러보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예의바르고 단정한 태도로 적영이 말했다. “적영문주 적영이 감히 십걸집이신 직계의 도키 님께 한 수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오.”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도키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술 한 병씩 돌리고 시선을 모아 거절하기 힘들게 만들자는 속셈 같았다. 치근덕대는 꼴을 보아하니 뭔가 목적이 있을 것 같긴 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요리 한 접시 얻어먹은 보답으로 받아 줄 요량이었다. 적영은 도키의 눈썹이 미미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도키는 묵묵한 무표정으로 일어셨다. 낄낄대며 따라간 적영은 마당에서 멈춰 서서 일부러 화려하게 옷자락을 휘둘렀다. 사람들이 객잔 안에서 하나둘씩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 십걸집이 행차하셔서 비무를 견식할 기회를 주겠다는데, 그 귀한 기회를 누리는 자들 치기엔 반응이 시원찮았다. 아무도 적영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이름도 없는 산골의 객잔. 대부분이 무림과 거리가 먼 상인에 농민에 양민들뿐이다. 그들은 동네 패싸움 보듯 한 마음으로 사내 둘을 구경했다. 동네 양아치보다 조금 더 나은 적영문주가 왜 거지를 붙잡고 전설 같은 고수라고 주장하는지 궁금해 하면서. 도키는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걸었다. “이봐! 비무를 청한다니까!” 적영이 소리를 질렀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도키는 자신에게 감히 소리를 지른 청년을 돌아보다가 따라오라는 듯이 휙 턱짓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땡볕 아래를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던 적영은 점점 기분이 저하되어 갔다. 적영은 틈을 보아 목을 따 버리자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그러나 도키의 등은 뒤 한번 안 돌아보고 걸어가는 중에도 칼을 꽂아줄 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도키는 한참을 걸어가다가 멈췄다. 산 속에 자리한 공터였다. 고개를 내저으며 땀을 닦던 적영은 훙 하는 파공음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들이닥쳐서 눈을 크게 떴다. 도키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쏴아아- 천천히 나뭇잎이 흔들렸다. 적영은 그대로 굳은 채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도키가 지팡이를 휘두른 것도 몰랐다. 정작 한 번의 손짓으로 공기를 바꿔놓은 도키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휘휘 돌렸다가 땅을 툭툭 쳤다가 손목을 돌렸다가 하고 있었다. 그 6개의 금이 가 있는 지팡이는 사실 칠절곤이라는 7개의 마디를 가진 곤봉으로 근거리에서 원거리까지 변화무쌍한 변화를 보여주는 기병이다. 언제 어떤 움직임을 보일 지 예상할 수 없어서 어떻게 보면 암기에 가깝다. 적영은 칠절곤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모습을 쳐다보던 도키가 고개를 까닥였다. “선공을 양보하겠다고?” 도키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고개가 다시 끄덕거렸다. 적영은 사양하지 않고 등에 맨 직도를 뽑아들었다. “아, 싸우기 전에 참고로! 난 네 손에 멸문한 가문 후예인데 아마 네놈은 기억도 못할 거다.” 도키는 예상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적영이 비소를 지었다. ‘나도 사실 몰라. 이 끄덕거리기밖에 못하는 오뚝이 같은 놈아.’ 적영은 빈틈을 살피는 것도 없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도를 휘둘렀다. 따라가는 내내 빈틈 찾기에 지쳐있던 참이다. 없는 빈틈을 찾느니 직접 만드는 것이 낫다. 깡! 칠절곤과 직도가 맞부딪힌 순간 불꽃이 튀었다. 겉으로 보기엔 나무인 칠절곤에서 쇳소리가 났다. 도키는 적영의 일격을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받아냈다. 적영은 멈추지 않고 도를 휘둘러 공격을 이어갔다. 칠절곤은 늘어나고 휘어지며 꺾이는 무기. 적영이 도가 닿지 않는 범위로 물러나는 순간 뻗어와 한방에 승패를 가를 것이다. 허나 품속까지 붙으면 변화무쌍한 경우의 수는 훨씬 줄어든다. 적영은 곤과 도의 대결로 축소시킬 작정으로 나섰다. 일합에 무위로는 하수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공격을 예상할 수 없는 기병보다는 곤을 상대하는 게 낫지 않나. 처음부터 적영에게는 정정당당하게 이길 수 있으리라는 낙관 따위 없었다. 일격 일격이 엄청난 속도를 가진 공격이 퍼부어졌다. 직도의 잔영이 점점 늘어나 적영의 주변 반경 이장이 다가갈 수조차 없는 풍압에 휩싸였다. 하수는 간단히 죽을 것이다. 버틴다 해도 화려한 도초에 시선을 뺏기는 새 왼손의 암기가 목줄을 노린다. 그러나 도키는 하수는커녕 십걸집의 일좌를 차지하는 고수. 무위가 이미 절정을 넘었다. 적영은 몇 번이나 암기를 출수하려다 그 때마다 완벽하게 대비하는 움직임을 보고 이를 갈았다. 도키는 왜 상대가 암수를 쓰지 않을까 조금 의아해졌다. 암기를 쥘 왼손을 날려버리지 않은 것만도 충분히 기회를 준 것이다. 그 순간, 적영의 도가 눈앞을 수평으로 훑고 지나갔다. 눈이 베이지는 않았으나 이어지는 풍압에 눈이 시렸다. 그 순간 적영의 왼손에서 암기 다섯 개가 동시에 흩뿌려졌다. 아마 도키는 암기를 모두 쳐 낼 것이다. 그러나 칠절곤이 암기를 쳐내느라 흐트러진 순간 직도가 목을 가른다. 캉캉캉캉캉! “……아니?!” 도키는 암기를 팔을 감싼 수갑으로 쳐냈다. 암기가 모두 빗겨나가고 튕겨나갔다. 어떤 독이 발려있을지 모를 암기를 상대로 하기엔 위험천만한 곡예다. 적영은 물 흐르는 듯한 연속동작으로 도키의 목을 노리다 삐끗하고 말았다. 도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칠절곤을 단순한 막대기처럼 휘둘렀다. 도키의 움직임은 이렇다 할 초식도 무엇도 아니었으나 단순한 만큼 힘이 담겨 있었다. 적영은 급히 직도를 끌어당겨 막아냈다. 격돌한 순간 머릿속까지 쩡하고 울리며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적영은 도신을 휘며 충격을 흘리면서 급히 고개를 들었다. 빗나간 비도가 나무에 박혀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이어 적수를 향했다. 적영은 그 순간 소리 높여 웃고 싶었다. 비장의 한수가 빗나갔대도 실패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공격을 소나무처럼 한 자리에서 받아내던 도키가 드디어 세 걸음을 물러난 것이다. 십걸집 중 하나를 세 걸음이나 물러나게 한 것이다. 적영은 희열을 느꼈다. 적영은 무릎을 굽히고 내려앉았다. 머리 위를 칠절곤이 스치고 지나갔다. 적영이 뒤로 쓰러지며 구르자 지나간 자리마다 칠절곤이 내려찍혔다. 적영은 구르던 서슬 그대로 미끄러지며 오른쪽을 스치고 지나가 도키의 감은 오른쪽 눈의 사각을 타고 돌았다. “에에잇! 거지새끼 지팡이 따위 잘라내 주마!” 적영의 도가 흐릿하게 빛났다. 끓어오른 기가 도신을 둘러싸자 붉은 빛이 돌았다. 적영이 도를 휙 던지자 손잡이가 손에 붙은 듯 핑그르르 돌아 역수로 잡혔다. 도키는 그 순간 상대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살수들은 도를 저렇게 쥐곤 한다. 시야의 사각을 노려 날리는 일격필살의 쾌도. 직도가 칠절곤과 도키를 동시에 베어버릴 기세로 쇄도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도 덤빌 만한 실력은 있었군…….’ 도키는 괴이한 적색광을 흩뿌리며 날아오는 움직임을 쫒다가 피하지 않고 막아섰다. 무기를 잘라 내 주겠다는 도전을 받았으니 그 무기로 붙어 줘야 할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진신내력을 끌어올렸다. 칠절곤의 대나무 자루가 우웅 떨었다. 칠절곤이 직도의 진행 방향에서 모로 세워 들렸다. 적영의 눈에 그 동작은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느렸다. 도로를 바꾸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느려!” 그대로 격돌할 것 같던 직도가 칠절곤에 닿기 직전 비틀리면서 표면을 탔다. 적영의 입 꼬리가 흉흉하게 올라갔다. 기묘하게 휘는 칼끝이 심장을 갈라놓으려 들었다. “…어…?” 카가각! 벽력같은 소음이 귀청을 찢었다. 적영이 도로를 바꾼 건 격돌하기 직전의 찰나. 대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허나 칼날이 부딪힌 건 도키의 가슴이 아니라 칠절곤이었다. 직도를 감싼 적색광이 떨리다가 폭발하듯 터졌다. 내력끼리 맞부딪혀 생긴 파동에 튕겨 날아간 적영은 버텨 서려는 시도를 계속 실패하다가 십여 장이 넘게 밀려 간 뒤에야 멈춰 섰다. 벌어진 거리를 단 한 걸음으로 좁힌 도키가 손을 뻗어 적영의 턱을 올려 쳤다. 그것으로 적영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도키는 끝까지 칠절곤의 일곱 마디를 발출하지도 않았다. 살업을 지은 것을 후회하고 은거한 고수들은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자에게 흔히 약해지곤 한다. 자기가 범한 죄이니 이제는 대가를 치를 차례라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목이다. 누구나 제 목숨은 아까운 법이라 순순히 목을 내어 주는 자들은 드물지만 상대를 용서 없이 죽이는 자도 드물다. 방갓을 쓴 남자가 굳이 적영을 찾아 온 이유도, 그가 도키를 죽일 수 있다고 믿어서라기 보단 도키가 베풀 자비를 노린 것이다. ‘안 죽었잖아?’ 그 덕에 적영은 살아 있었다. 적영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도키가 장저로 올려쳤던 턱이 빠질 듯이 덜걱거렸다. 턱뼈가 박살나지 않은 게 고마운 일이다. 적영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턱을 쓰다듬고 옷을 가다듬었다. 객잔 마당에서 뻗었으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을 테니 산 속에서 맞붙은 것이 다행이었다. ‘뭐 이 정도면 선방한 거지. 온 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구만……. 그래도 이길 수 있다.’ 일부러 시선을 잔뜩 끌어놨으니 객잔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산에서 노숙할 만한 곳은 뻔하다. 조금만 쉬다가 일어나야겠다. 집에서 챙겨 나올 것이 많다. 독공을 쓰는 자에겐 소지한 암기와 독이 곧 힘이다. ‘내가 이긴다.’ 저녁이 오면 독이 퍼질 테니까.
괴담 중에 인육만두라는 것이 있다. 관아와 먼 산골에는 손님을 죽이고 그 고기로 만두소를 만드는 객잔이 있다는 것이다. 가진 짐은 털고, 고기로는 만두를 빚고, 그 만두를 또 손님에게 파는 상술은 알뜰살뜰한 재활용의 극치다. 적영은 낭비 없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적영은 김 오르는 만두를 우물거리며 길을 걸었다. 인육이 들어있는 만두는 아니다. 객잔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을 죽여다 만두를 빚을 만큼 담이 크지는 못했다. 다만 적영의 언질에 따라 음식에 독을 타 내 오기는 한다. 적영은 그렇게 몇 명의 여행자들을 죽였고, 다친 적조차 없이 쉽게 이겼다. 죽은 이 중에는 이름난 고수도 있었다. 객잔에 돌아가자 심부름을 시켰던 점소이가 먼지투성이가 된 적영의 꼴에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독을 먹고도 적영을 패퇴시킨 고수를 두려워 한 건지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했다는 타박을 겁낸 건지 적영은 알 수 없었다. 어깨를 안심시키듯 툭툭 쳐 주고 끼니 때울 음식을 받아 나오자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그 놈들도 슬슬 죽여야 할 텐데…….' 오지 산골 화전민촌, 오가는 자들이라곤 상인들만 겨우 다니는 좁은 마을에선 여행객이라면 모를까 마을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게 쉽지 않다. 적영은 마을을 뜰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들어서자 발치에서 파란 색 뱀이 발등을 스르륵 타고 올랐다. 적영은 발을 휘저어 천천히 털어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 딛는 곳 마다 작은 뭔가가 사사삭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벌레들이 밟히든 말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적영은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창고를 뒤적거리다 다시 나왔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사하는 게 좋겠다.’ 적영은 새삼 미련이 남는 표정으로 집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정원엔 직접 키운 독물들이 없는 데가 없다. 소일거리로 키운 것들이지만 돈으로 바꾸면 한 재산을 차리고도 남는다. 살아있는 것들을 데리고 떠날 수는 없으니 떠나기 전에 처분해야 할 것이다. 손해가 막심하다. 적영은 미리 소지하기 쉽도록 가공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도키를 죽이면 바로 마을을 뜨고 싶었다. 도키는 노숙할 준비를 마치며 한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곳에서 잠을 자 보나 했는데 이 꼴이다. 평생 야인으로 떠돌다 객사할 팔자인가 보다. 도키는 낮에 덤벼들었던 청년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도키는 딱히 적영의 정체가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가 강호를 떠도는 동안 덤벼든 젊은 놈들을 쓸어 모으면 작은 강 하나가 넘친다. 그가 도전자를 죽이지 않는다는 소문이 돈 다음부터는 끝도 없었다. 져도 목숨은 보전하지만 이기면 십걸집을 꺾는 영예. 도키만큼 구미가 당기는 사냥감도 드물다. 정오 조금 넘어 상대한 젊은 청년도 그런 부류일 것이다. 그는 도전자들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과거의 은원이 얽혀있다고 하면 말이 달랐다. 죽이고 싶은 자들은 모두 죽였으니 그들의 친지들을 죽여 봤자 입맛만 배로 써진다. 오늘 만난 청년도 제 가문이 자신의 손에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말했지만 그의 눈에는 순수한 살의와 호승심밖에 없었다. 복수자 특유의 가슴에 맺혀 엉킨 덩어리가 보이지 않는다. 멸문지화의 원한이 있다는 말까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맹랑한 놈이었지.' 얼굴과 이름은 벌써 잊었다. 그보다는 까마득하게 높은 상대를 태연하게 옭아매려 든 수작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고도 도전한 것은 놀랍지도 않았지만 새파랗게 젊은 주제에 도에 기를 두른 것에는 놀랐다. 믿는 것 없이 덤빈 건 아니라는 소리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독 냄새를 봐선 암기를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키는 발칙한 놈이라고 생각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도키는 천성적으로 무골이라 얕은 수를 쓰는 자들을 싫어한다. 허나 그는 한창때의 젊은 것들에게 약했다. 젊은 나이에 꼭대기에 앉아본 사내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 들 시점부터는 후학들을 지켜 볼 때 마음이 좋아졌다. 도키는 가끔 자식이나 손자를 보는 마음이 이럴까 궁금했지만 가정을 이루지 않은 그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적영은 산 깊숙한 곳에서야 도키를 찾아내었다. 사람이 왕래하는 길이 아니라 사냥꾼이나 다닐 으슥한 길 중간, 계곡에 면한 작은 공터에 불빛이 타고 있었다. 목표한 남자는 한가롭게 걸터앉은 채 소나무가지를 부젓가락 삼아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적영은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본 것 마냥 눈을 크게 떴다. ‘왜 저렇게 한가로워……?’ 도키는 전혀 곧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중독 된 기미가 없었다. 음식을 사 주는 걸 핑계로 독을 먹였고 싸우는 동안 에도 옷자락을 펄럭일 때 마다 독분을 뿌렸다. 입으로 먹고 숨으로 들이쉬었으니 지금쯤엔 반응이 나타나야 한다. 적영이 사용한 독은 서서히 기력을 빼앗다가 적영이 나타날 때쯤에는 숨이 멎어가도록 조절한 것이었다. 중독된 후 세 시진을 넘었으니 얼굴에 병색이 완연해야 정상인 것이다. 적영은 대체 뭐가 잘못된 지 알 수 없어서 이를 갈았다. 도키는 왠지 머리가 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마를 짚었다. 이마는 미열은커녕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몸도 한기가 드는지 으슬으슬하다. 도키는 여름밤인데 춥다니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고뿔이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낮의 비무 후로 왠지 피곤하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간만에 몸을 움직였으니 날 듯 활기가 솟아야 정상인데 사지가 물 먹은 종이처럼 축 처졌다. 도키는 자신이 새삼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후기지수를 만나자 흘러간 세월이 비교되어 침울해 진 것이다. ‘그 놈만 없었으면 간만에 침상에 누워 잤을 텐데.’ 밥을 사 주든 말든 무시할 것을 그랬다. 도키는 편한 잠자리가 아쉬워 툴툴거렸다. 생전 아픈 일이 없던 몸인데 몸살이 날 정도면 하루 정도는 객잔에서 묵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도키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깊은 산 속이라 주변 기가 맑았다. 체내의 탁기가 빠른 속도로 밀려나갔다. ‘…….’ 적영은 어이없는 눈으로 목표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먹고 숨쉬는 걸 확인했는데 독에 중독된 게 아니라 여름감기에라도 걸린 것 같다. 적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매를 살살 흔들어보았다. 무색무취의 독이 퍼지는 것을 적영은 감지해낼 수 있었다. 고수의 걸음으로 세시진이면 따라잡기 힘든 거리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평범한 봇짐장수와 다를 바 없는 거리를 이동한 후 휴식을 취하는 것은 제 독이 체력을 떨어뜨린 덕분이라고 적영은 추측하고 있었다. 도키는 급작스러운 피로에 시달리며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 적영이 도착했을 때엔 이미 절명했거나 발작을 일으켰어야 했다. 최소한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뒹굴어야 할 놈이 지나치게 멀쩡했다. ‘그 정도 독은 안 통하신다? 죽일!’ 적영은 공격하기 전부터 패배감이 몰려와 이를 갈았다. 독으로 많은 사람을 죽여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바리바리 챙겨온 독을 써 봤자 낭비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키를 죽이려면 지금껏 쟁여 둔 독과 암기를 다 소모할 각오를 해야 한다. 독은 한번 쓰면 주워 담을 수 없는 소모품이다. 귀한 동물, 식물, 광물에서 얻어내어 오랜 시간 정제해야 겨우 몇 방울을 얻어낼 수 있기에 그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가 없다. 도키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지금껏 모아둔 재산이 거덜이 날 것이다. 목표를 죽일 수만 있다면 득 보는 투자지만 실패한다면 한 순간에 길거리에 나앉는 수준이다. 적영은 애써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했다. ‘혹시 만독불침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괴물이 나왔으면 독문의 역사가 바뀌었어야지.’ 적영은 도키를 죽이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손해를 볼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에게 허세를 부렸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위험과 이득을 저울질했다. 그 순간이었다. 어떤 병색도 없이 불을 쬐고 있던 도키가 일어났다. 그는 곧게 앉아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는 동작이 살짝 불안정한데서 독이 아예 통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비실거리는 앉음새에서 적영은 확신했다. 상대는 중독 상태다. 독이 ‘통했다.’고 하기엔 말도 안 될 절도로 미약한 증상이지만 중독 시킬 수 있었다. 가능하다. 하늘이 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영은 그 순간 움직였다. 그는 품 안에 든 독탄을 물가로 집어던졌다. 독탄은 물과 만나자마자 녹아들면서 뿌연 기체를 뿜었다. 순식간에 계곡이 독연으로 자욱해졌다. 도키는 독연이 터진 후 첫 호흡과 동시에 피를 토했다. 정순한 내공이 일순간에 흐트러지고 독기가 차올랐다. 도키는 기를 퍼트려 주변을 훑으려고 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낮에 만난 붉은 장포의 사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적영은 쉬지 않고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끼리릭- 하고 작고 불길한 소리가 났다. 적영의 수갑 안쪽에서 독 바른 바늘이 발출되었다. 바늘은 소리 없이 날아가 목표에 박혀들었다. 도키는 팔을 휘둘러 바늘을 털어냈지만 독이 퍼지기 시작했다. 도키는 칠절곤으로 바닥을 찍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어 유엽비도 열 두 자루가 꽉 들어찬 나무들 사이를 스치지도 않고 직선으로 쇄도했다. 도키가 칠절곤을 들어 휘둘렀다. 풍압에 궤도가 흐트러진 비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칼날이 닿은 지면이 물에 적신 종이처럼 녹아들었다. 연이은 실패에 적영은 이를 갈았다. 공격이 빗나갔으면 모를까 적중했는데도 상대가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멀쩡히 움직인다는 것은 독을 사용하는 자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영은 비기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일단 움직임을 봉하고 뼈 채로 녹여주겠다!’ 동시에 도키에게 등골이 쭈뼛 서는 예감이 스쳤다. 그가 크게 뛰어 자리에서 멀어진 순간, 밤하늘을 빗발 같은 은색 실선이 가득 메웠다. 피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도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은색의 비를 올려다보다가 칠절곤을 두 손으로 쥐고 들었다. 눈으로 확실하게 판별할 수는 없었다. 허나 진짜는 빗발 사이에 있다. 도키는 칠절곤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이어 눈을 감고, 더 선명해 진 감각을 향해 칠절곤을 내뻗어 당겼다. 반경 1장이 패여 나가고 칠절곤 자루에 여인의 머리카락보다 가는 철사가 휘감겼다. 일순 팽팽하게 당겨진 철사가 금방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주인이 위치를 옮긴 것이다. 도키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튕겨 날아간 수백 개의 바늘이 모닥불 불빛에 무딘 빛을 흘리고 있었다. 숲은 어둡고 이쪽은 밝다. 도키는 자신만 위치를 훤히 드러낸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영은 도키가 바늘과 철사를 모두 막아낸 것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독을 발라 빛을 죽인 암기지만, 빛을 받으면 고수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티가 난다. 적영은 모닥불을 끄기로 마음먹고 비도를 하나 꺼내 쥐었다. 도키의 빛에 익숙한 시야는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도키도 어둠에 묻히겠지만 적영이 가진 것은 자객의 눈이다.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게 기척을 느끼고 급소를 판별하는 것은 숨 쉬듯 당연한 능력이었다. 적영은 비도를 던졌다. 비도가 모닥불을 흐트러트린 순간, 도키 역시 모닥불 걷어차고 있었다. 순간 적영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어둠 속이라면 아무리 고수라도 자신을 상대하기 어려우리라고 믿었다. 아니었다. 상대의 눈은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불을 껐다. 적영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직도를 꺼내들었다. 찰나의 순간, 도키는 이미 지척지간에 다가와 있었다. 적영의 도에서 시뻘건 불빛이 타올랐다. 적영은 칠절곤의 마디가 분리되는 것을 드디어 보았다. 적영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눈을 뜨자 적영은 천장이 낮은 방 안에 있었다. 공기 중에 쓴 냄새가 가득했다. 적영은 그것이 말라가는 약초의 향이라는 것을 곧 알아챘다. 벽에 흔히 볼 수 있는 약쑥 따위가 매달려 말라가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격통이 밀려왔다. 적영은 사지가 다 붙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통을 참으며 창을 열자 탕약을 달이는 냄새가 났다. “일어나지마! 죽다 산 놈이 어딜 일어나나?” 탕약을 달이고 있던 노인이 깐깐한 표정을 지었다. 적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인은 마을의 유일한 의원이었다. 적영과 가끔씩 차를 같이 하던 사이이기도 했다. 독과 약은 뿌리를 같이 하는지라 독에 능한 자들이 약에도 능한 경우가 많았다. 적영 역시 기본적인 본초학을 익히고 있었다. 점혈 역시 잘 하니 시골 의원 노릇을 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노인이 먼저 치료하고, 그러고도 낫지 않으면 적영이 맡는다. 특히 독사에 물린 상처를 기가 막히게 치료하는지라 그를 출세길과는 소원한 사파 떨거지쯤으로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도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다며 고마워했다. 그 덕에 마을의 유일한 의원과 의원 비슷한 남자는 친분이 있었다. 노인은 기절한 적영을 치료하고 간호하며 사흘을 기다렸다. 적영은 인덕을 쌓아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탕약을 받아마셨다. 노인은 미친놈이라며 욕을 하다가도 적영이 궁금해 하는 것을 알려 주었다. 산 중턱에서 엉망진창이 되어 뻗어있는 적영을 약초꾼이 구조해서 데려왔다고 했다. 안 그래도 빨간 옷이 피에 젖어 누더기가 되어있어서 산짐승에게 먹힌 줄 알았는데 살려달라고 바지자락을 붙들고 애걸했다던가. “그렇게 고수인 양 거들먹거리더니 자네도 별 수 없구먼?” “그 놈이 거짓말 한 거 아니요? 사례 하고 싶으니 누군지나 부시지.” “지금 자네 눈이 사례할 사람 눈이 아닌데?” “헛소리 한 놈 한 대만 때려주고 갚아주려고 그럽니다.” 죽어갈 고비를 넘기니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놀리려 드는 노인을 노려보며 적영은 그럴 리가 없다고 질색을 했다. 노인은 적영이 부끄럽고 민망하여 그러는 줄로 아는 듯싶었지만 적영은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누군가 우연히 주워준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물이 흐르는 곳이니 목이 말라 왔을 수야 있지만, 독연이 자욱하게 깔렸던 장소라 흙과 공기에 독이 배어 내공이 낮은 자는 발을 들여놓은 순간 급살을 맞을 것이다. 가능한 경우는 세 가지 밖에 없다. 그 약초꾼이 내공이 깊었던가, 죽어가던 자신이 계곡에서 빽빽한 나무를 거쳐 사람 다니는 길까지 기어나갔던가, 아니면……. ‘그놈, 날 안 죽인 것도 모자라서 주워가라고 옮겨놓고 갔다는 거지? 거 속도 좋군.’ 적영은 자존심이 상했다. 죽을 각오 따위 한 적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동귀어진이 되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상대는 살아남은 걸로도 모자라 자신을 살려 보냈다. 적영은 암습을 실패하고도 목표의 자비로 목숨을 구했다. 수치스러웠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자객으로서의 수치였다.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다지만 적영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은원도 없고 십걸집의 자리도 그럴듯한 전리품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는 직계의 도키의 목에 목숨을 버려가며 딸 만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은원이 생겨났다. 그를 죽이려 했는데도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구해 준 은혜고 자신을 쓰러트리고도 죽이지 않아 모멸감을 준 원한이었다. 적영은 가라앉은 얼굴로 이불을 꽉 쥐었다. 힘이 잔뜩 들어가 손이 희어졌다. 의원은 피를 많이 쏟았으니 한동안 피곤하고 몸이 저릴 것이라고 했다. 적영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에 힘을 주는 훈련과 소일거리를 겸해 대나무를 깎았다. 농기구 수리나 겨우 하는 대장간에 큰돈을 주고 이음쇠를 만들었다. 긴 막대 둘이 끝의 이음쇠에 연결되어 있는 형상으로 모두 합해 6쌍이었다. 늘어놓으면 제법 길이가 길어 대나무 대롱 안에 모두 숨기는 데에 차질을 겪었다. 대롱을 연결시키면 하나의 막대가 되고 털면 늘어나도록 해야 했다. 적영은 3매의 설계도를 찢어버린 후에야 대롱과 쇠막대를 곤의 형태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일곱 개의 마디를 가진 곤이었다. 도키의 칠절곤을 본떠 만든 것이다. 적영은 도키가 이 일곱 마디를 어떻게 운용할지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을사람들이 걱정을 해 주었다. 고기를 가져다주기도 했고 약초를 가져오는 자들도 있었다. 적영은 그들과 술집에서 수다를 떨거나 독사에 물린 것을 치료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놀리듯이 웃으며 용태를 물어 올 때마다 적영은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 민망해했다. 죽일 생각을 가진 채 감사받기고 사랑받기 민망한 것이다. 적영은 마음 한편이 간지러웠다. 민망하지만 따뜻한 감각이었다. 이런 순한 사람들을 없애겠다고 생각하다니 마땅히 죄스러워 해야 옳지 않은가싶어 싱숭생숭했다. 그리 죄스럽지는 않았다. 적영은 그 생각을 여행길에 가져 갈 수 없는 독물들을 마을에 방생할 생각과 동시에 했다. 적영은 몸이 걸을 만큼 회복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떠나기 전 노인에게 인사했다. 그는 적영을 나이 차 많이 나는 친구로 생각했으므로, 더는 만날 리 없을 테니 인사라도 하고 헤어지자 싶었다. 적영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 생에는 우리 만나지 맙시다.”
도키는 길을 걷고 있었다. 길은 길었고 언제 끝날 지 알 수가 없었다. 쉬지 않고 달린다면 훨씬 빨리 도착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걸으나 도착하나 기다리는 것은 귀찮고 싫은 일 뿐이다. 그는 귀찮은 일을 늦게 맞이하기 위해 굳이 귀찮게 느릿느릿 걸었다. 도키는 젊은 시절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려서 남들은 해내지 못할 일을 해 냈고, 대신 남들보다 일찍 지쳐 속세에 신물을 냈다. 사람은 그리워도 사람 사는 세상이 싫으니 마음 편히 있을 곳이 없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지쳤다. 사흘 전 계곡을 메우며 빗발쳤던 독은 큰 마을 하나를 깨끗이 몰살시고도 남을 독을 뿜고 있었다. 도키는 독공을 익힌 적도 없고 만독불침의 몸도 아니다. 금강불괴에 가까워가는 몸이었지만 아직 완벽하지는 않은 것이다. 사흘 전 도키가 몸으로 받아낸 독들은 하나하나가 가문의 비전으로 전해질 법한 극독이었다. 운기를 통해 모두 몰아냈지만 이미 터진 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걸음마다 진기를 흘리며 걷는 것 같다. “내 생각엔.” 도키는 전혀 놀라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복면에 붉은 장포의 청년이 서 있었다. “내상을 입은 것 같은데.” 적영은 자랑스럽게 허리를 펴고 기쁜 얼굴로 웃었다. 도키는 청년의 얼굴이 남자치고 곱상하다고 생각했다. 복면으로 코와 입가를 가려서 다 알 수는 없지만 웃을 때 가늘게 휘어지는 눈매는 값비싼 고양이 같았다. “내 독이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만은 아닌 것 같군. 다행이다. 하마터면 상처를 받을 뻔 했지 뭐냐. 네놈이 독에 당하긴 하는 몸이라 기쁘다.” 도키는 청년의 목소리가 터무니없이 다정스러워서 기분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굵은 목소리가 귓가를 훑듯 달짝지근하게 달라붙어서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적영은 터진 얼굴이 당겨 몹시 쓰라렸지만 우호적인 웃음을 유지하며 말했다. “도와줄까?” 도키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길은 엉망이었다. 인간이 다니라고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짐승들이 오가면서 생긴 오솔길이었다. 풀이 조금 덜 나고 죽어있다는 것을 빼고는 길이라고 하기도 뭣한 길이 끊어질듯 말듯 나 있었다. 길 양옆으로는 무릎을 넘게 자란 풀이 빽빽이 돋아 있고 폭도 사람이 지나가기엔 형편없이 좁다. 걸음을 방해하는 널려있는 암석들은 잘못 밟으면 그대로 깨져 마른 흙으로 부스러졌다. 걷기에 전혀 좋은 길은 아니지만 장점은 있었다. 인간이 다닐 수도 없는 길인만큼 주변 풍광이 인세의 것 같지 않았다.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면 똬리를 튼 영물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길을 누더기 꼴을 한 남자 하나가 걷고 있었다. 남자의 발걸음은 평지를 걷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기계적으로 한 걸음을 내딛고 이어 다음 걸음을 디딘다.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시원스레 나아가는 걸음걸이지만 묘하게 패기가 없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간간히 떠올랐다 사그라졌다. 도키는 고개를 들어서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빽빽이 솟아난 나무 틈새로 올려다 본 하늘은 녹색 그릇 밑에서 사금파리가 나간 자국을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등나무 덩굴이 잎을 늘어트려 그늘을 만들고 하늘을 쪼개 놓았다. 발치를 살피지 않고 반복되는 걸음 탓에 넝쿨이 발목에 걸렸다. 한번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 한 남자는 발목을 휘저어 덩굴을 터는 대신 그대로 발을 들었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덩굴이 끊겨나갔다. 어떻게 꼬였나 살펴보고 털기도 귀찮아 보이는 태도였다. 사실 그는 피곤이 쌓여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키는 며칠 전에 독에 중독되어 내상을 입었다. 치료는 받았지만 체력이 회복될 만큼 휴식을 취하지 않고 바로 여정을 재개했으니 축적된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독을 치료해 준 건 도키의 새 동행이 된 적영이라는 남자였는데, 중독된 연유가 그의 독공 덕분이었으므로 동행으로 받아들이기엔 영 꺼림칙했다. 도키는 그가 따라오는 것을 내버려둔 것뿐이었으니 동행이라는 것은 적영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우연히 길이 겹친 것 같군. 그러면 같이 갈 수도 있지 않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일부러 사람 길에서 벗어난 결과가 지금의 이 오솔길이다. ‘너와 나는 우연히 길이 겹친 것이 아닐 텐데.‘ 경공조차 쓰고 싶지 않아 느적대며 걷는 도키지만 편히 난 길을 마다하고 숲 속을 통과할 이유는 없다. 같이 갈 마음이 없다고 행동으로 티를 낼 작정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뻔히 드러나는 뜻을 눈치 못 챌 리가 없는데도 적영은 제멋대로였다. 도키가 아무리 험한 길로 접어들어도 꾸역꾸역 따라붙었다. 다리에 생채기가 생기고 옷에 풀물이 들고 절뚝대기 시작해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갈 길, 같이 가면 좀 좋아?” 도키는 굳건한 태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려보는 눈은 따라온다면 육시를 내겠다고 협박하는 것 같았지만 적영은 무시했다. “내가 치료도 해 줬잖아.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정도가 있어야지.” ‘치료를 허락한 거지 동행을 허락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도키는 진력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칠절곤으로 바닥에 금을 그었다. 그리고 경고를 무시하고 금을 넘어온 적영은 흠씬 두들겨 맞은 채 뻗어서 한동안 따라오지 못하는 꼴이 되었다. 도키는 이번에야말로 징그러운 거머리가 떨어지길 바랐다.
도키는 처음에는 적영을 용인할 작정이었다. 저 남자는 도키에게 들러붙을 셈인 것 같고, 무슨 연유로 따라붙는지는 몰라도 목적은 그를 죽이는 것일 터였다. 그리고 도키는 남자에게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독 역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니 흥을 돋우는 요소로 못 쳐줄 것도 없었다. 도키는 분명히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적영이 거슬리는 말을 하지만 않았더라도 길에서 동물을 주운 기분이 들어 소소한 재미를 느끼며 데리고 다녔을 것이다. 지루한 노정에 젊고 활기찬 동행이 싫을 리는 없다. 훨씬 더 앞서 출발한 도키를 기어코 쫓아온 적영이 도움을 허용하자마자 꺼낸 첫마디는 이러했다. "좋다. 그럼 우선 바지를 벗어라!" “.....?” 도키는 적영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의아한 표정의 도키를 불쌍히 여기는 표정을 얼굴 한가득 떠올린 적영이 자상한 스승 같은 어투로 설명을 붙였다. "음기의 독을 몰아내기 위해 나의 양기를 주입해 주겠다는 뜻이다." “..........?” 도키는 상대가 무슨 미친 소리를 하나 싶어 입을 벌렸다. 독이고 양기고 하는 설명은 이해할 가치조차 없다 싶었지만 적영이 정사를 요구했다는 것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도키는 자기가 뭔가를 착각했다고 믿고 싶었다. 도키의 상식선에선 어제까지 자기 목숨을 노렸던 남자가 운우지정을 나누자고 말하는 상황은 있을 수도 없었다. 도키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으로 적영의 하반신을 가리킨 다음 자신을 가리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영이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의 고개가 힘차게 끄덕거렸다. 도키는 마주 끄덕거리며 칠절곤을 치켜들었다. 통,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악! 왜, 왜…?” 적영의 머리에 칠절곤이 내리꽂힌 소리였다. 도키는 속 빈 수박을 두들기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몇 번을 더 두들겨 보았다. 적영은 연이어 악 소리를 지르다가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도키의 입장에서는 반은 장난이었지만 적영에게는 장난이 아니었다. 칠절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눈으로 따라갈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받은 철저한 교육 덕분이었으나 몸은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절없이 다섯 대째의 매질을 당한 적영이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으아아아! 치, 치료해 달라며! 도와달라며? 왜 때리는 거냐?” 어지간히 아팠던 모양인지 눈가에 눈물이 어룽어룽한다. 도키는 자연스럽게 더 때리려 들다가 손을 멈추었다. 어떻게 들어도 남자의 낮고 굵은 목소리인데도 이상하게 앵앵거리는 아이 같은 감이 있어 더 때릴 수가 없었다. 열대여섯은 어릴 나이를 감안하면 아이로 못 봐줄 것도 없기야 하다. 성적인 농지거리를 던지는 아이가 세상 어디에 있겠냐만 스물 초반의 남자들이 아랫도리에 끌려 다니느라 도를 넘은 지랄을 떠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도키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손을 내렸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비역질을 즐기는 놈인가? 아니면…….’ 도키는 독에 대해선 문외한이었고, 사창가에서는 반항이 심한 기녀들이 손님을 받게 하기 위해 독에 중독 시킨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있었다. 물론 생사를 건 전투 중에 춘약에 가까운 독을 사용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도키는 하도 문외한이다 보니 다른 독의 효과를 강하게 하기 위해 함께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하긴 약으로 쓰는 산삼과 꿀도 잘못 복용하면 죽음에 이른다는데 독공의 고수가 작정하고 독을 조합하려면 무슨 기기묘묘한 조화가 일어날지 어찌 알겠나 싶었다. ‘정말 남자의 양기…를 통해서만 치료되는 독인가?’ 도키는 깊이 고민에 빠졌다. 그는 우선 적영이 남색가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치료를 위해서라면 싫어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확인을 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도키는 말을 금하는 수행 중이었다. 겨우 안심한 적영은 곧이어 엄청난 살기를 느꼈다. 온몸의 털이 순식간에 곤두서는 살기가 도키에게서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나뭇잎이 쏴하고 떨었다. 핏, 하고 볼이 터져 피가 흘렀지만 적영은 닦을 생각도 못했다. 죽일 기세로 살기를 흘리는데도 표정은 무덤덤하게 가라앉은 채인 도키가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설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이. “……노, 농담도 못하나? 안 벗어도 된다! 물론 다리에 상처가 났다면 당연히 벗어야겠지만…….” “…….” 도키는 다리에 난 상처가 있나 떠올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 생판 처음 보는 놈과 뒹굴 필요가 없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만 그런 농을 던진 놈 앞에서 바지를 벗기는 싫다. 적영은 잔뜩 심사가 꼬인 도키를 앞에 둔 채 아무리 작은 생채기라도 독이 타고 들어갔을 수 있으니 벗어야 한다, 내가 쓴 암기는 바늘이니 꽂힌 게 아니면 당연히 생채기밖에 나지 않는다, 스치기만 해도 죽는 게 당연하다며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했다. 변하지 않는 불신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적영이 억울한 어투로 빽 소리를 쳤다. “나도 남자 맨다리를 보기는 싫다고!” 도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턱짓하고는 주저앉았다. 각반을 풀고 바짓단을 끌어올리자 가는 생채기 몇 개가 드러났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딱지가 앉지도 않고 피가 방울방울 흘렀는데 피가 보라색에 가까웠다. “이런 걸 두고 안 벗으려 들어…?” 적영이 질린 듯이 투덜거리며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가락으로 변색된 피를 훑어 맛을 보자 혀가 아리고 비위가 상했다.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있는 자신도 맛보기가 괴로운데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도키가 인간 같지 않아 적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키를 올려다보았다. 도키는 자기 다리를 쓸었다가 핥는 적영을 속이 안 좋아진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그가 게슴츠레한 시선을 던지자 그만 주먹을 날렸다. “…윽…! 이, 이번엔 대체 왜 때린 거냐? 비겁한 놈! 치료해 주려는 사람을 폭행하다니 이런 후안무치한…!” 도키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뿌득뿌득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적영은 폭력에 굴복해서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 크지 않은 보따리 짐을 풀고 약을 꺼낸다. 깨끗한 천으로 환부를 닦고 약을 붙이다 말고 아깝다며 욕을 한다. 개도 은혜를 알겠다, 녹림의 산도적보다도 못한 놈, 무도한 놈, 주절주절 끝도 없이 늘어놓던 적영이 도키의 등에 손바닥을 펴서 대고는 입을 다물었다. 직접 기를 불어넣어 기맥을 짚어가려는 것이다. 도키는 적영의 기가 몸 안을 돌수록 독이 걷히는 것을 느꼈다. 독이 막고 있던 흐름이 뚫리며 근육에 힘이 돌고 찬물로 씻은 것 마냥 상쾌해진다. 그에 비례해서 등 뒤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적영은 도키의 몸에서 빨아낸 독이 자기 피 속에서 걸러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순간 손을 떼고 엎드려 토했다. 썩은 파채같은 색의 묽은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자 엄청난 부취가 피어올랐다. 도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적영은 바닥의 액체를 아까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도키를 노려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녹광이 희번뜩 돌았다. “네놈, 대체 왜 안 죽는 거냐?” 어이가 없어서 한 질문이긴 했지만 적영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치료를 하면서 은근슬쩍 살펴 본 적영은 내심 크게 놀랐다. 너무 강해서 죽지 않은 것이다. 그뿐이었다. 도키의 몸 안은 난다 긴다 하는 강호인도 평생 구경할 수도 없는 영약과 내단으로 쌓아놓은 견고한 성벽 같았다. 적영은 괴물을 보듯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해독은 다 했으니 나머지는 직접 처리해라. 한 몇 주 운기조식 안 거르고 잘 쉬면 독 때문에 상한 곳도 다 해결될 거다. 네놈이 워낙 건강하니 며칠 안 가 나을 지도 모르고.” 적영은 독이 만들어 낸 탁기까지 처리하지는 않았다. 둘 사이에는 그럴 의리도 없고, 얼굴이 새파래져서 구토를 하는 남자에게 거기까지 바라는 건 과하기는 하다. 도키는 적영이 너무 지친 얼굴이라 그가 독을 쓴 장본인인데도 불구하고 미안해졌다. 적영은 주구장창 욕설을 늘어놓긴 했지만 끝까지 치료를 했다. 부담스러운 농담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치료하는 손놀림은 딱히 끈적거리지도 않았다. 도키는 농담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나 싶었다. “으…음, 죽겠군. 메슥거려……. 내가 골이 다 띵한데 멀쩡하게 걸어 다니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몸인 거냐?” 도키는 멀쩡하지는 않았다고 해 주고 싶었다. 독에 당한 입장에서는 비난인지 칭찬인지 애매하지만, 까마득히 어린놈이 자신의 능력에 자신없어하며 화내는 꼴이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도키는 묵언수행 중만 아니었더라도 그렇지 않다, 괜찮은 실력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하고 칭찬했을 것이다. 혈풍련이라면 누구도 바라마지 않는 도키의 칭찬이 바닥에 쓴 글씨로라도 나올 뻔 했다. “그럼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겠지. 바지를 벗어라.” 도키는 아무 생각 없이 바지를 내릴 뻔 했다가 적영의 웃음을 보고 손을 멈췄다. 못된 장난이 성공한 아이 같기도 하고 여인을 희롱하는 난봉꾼의 웃음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도키는 치밀어 오르는 오싹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타부타 따질 것 없이 적영을 후려갈겼다. 장난도 아니고 봐 주지도 않은 일격이었다. 키에 비해 가벼운 몸이 붕 떴다가 산중이라 멀리 날지도 못하고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며 떨어져 처박혔다. 아까까진 칠 때 마다 악악대던 적영은 아무 소리도 없이 가만했다. 통증과 놀람이 정도를 넘어 비명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맞은 곳을 싸쥐고 부들부들 떨던 적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젠장! 뒈질 놈 살려놨는데 육보시 하나를 못해?” 도키는 천박한 말을 싫어했다. 계집을 두고 하는 소리라도 듣기 싫었을 말을 들은 그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한쪽밖에 없는 눈을 찌푸린 도키에게 더는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 스쳤다. 애초에 독에 중독당한 것 자체가 누구 탓인가. 도키는 적영을 자근자근 밟아놓은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몸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으나 정신이 피곤했다. 도키는 사람 독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간만에 사람 사는 곳에 가니 마음이 약하고 물러져 답지 않은 짓을 한 것 같다. 한창때의 도키라면 내상이 있든 말든 적영을 죽여 놓고서야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도키는 말벗이 가지고 싶다는 바람을 포기했다. 적영은 나무에 기대 누운 채 헝겊조각처럼 구겨져 있어 따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맛있는 거 먹네. 나도 한 입 주지 그래?” 불을 피우고 앉아 벽곡단을 씹던 도키는 잠시 굳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모닥불 불빛을 받은 얼굴에 드리운 음영이 우울하게 어른거렸다. 신경 쓰지 않고 옆 자리로 걸어온 붉은 장포의 남자가 앉으란 말도 없었는데도 털썩 주저앉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시나. 나도 댁한테 먹을 것 사 줬잖아. 곡식 뭉친 환 쪼가리 하나가 뭐 그리 아깝다고.” 적영은 손에 토끼 하나를 틀어쥐고 있었다. 도를 닦느라 고기도 먹지 않는다는 사람 앞에서 휘파람을 불며 가죽을 벗기고 손질을 하더니 모닥불 위에 올린다. 산 중에서 하는 요리인데도 소금과 향초를 뿌려 구워낸 고기는 지글지글 익으며 좋은 향을 풍긴다. 도키는 조그마한 토끼 고기를 보며 간에 기별도 안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 안에 절로 고이는 침을 삼키며 외면하는 도키에게 적영이 다 익은 뒷다리를 찢어 내밀었다. 도키는 무의식적으로 건네받을 뻔 했다. “아, 고기 드시면 안 되는 몸이셨지? 이거 내가 큰 실례를 할 뻔 했군. 미안하오!” “………….” 도키는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일어났다. 그는 적영을 뒤에 남기고 숲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밤중이라도 도키에겐 큰 장애가 되지 못한다. 대놓고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으니 무안해서라도 더는 말 걸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적영은 토끼 고기를 씹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 도키도 추종술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적영에게는 혀를 내둘렀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 가는 길을 버린 지는 오래되었다. 일부러 짐승들이나 다닐 법한 길을 택했다가, 걷는 방향으로 풀 자국이 꺾일 것을 염려해 바윗돌 위만 딛기 시작했는데도 적영은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다. 도키는 적영을 떨쳐내기 위해 점점 더 험한 길을 택했다. 사람 사는 민가로 내려갈 목적이었으나 자취를 남기지 않기 위해 움직이다보니 험한 계곡 가운데에 서 있기도 했고, 절벽 끝까지 몰린 적도 있었다. 기분 나쁜 것은 피떡이 되어 계곡물에 처박혀 흘러가거나 절벽에서 떨어져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던 적영이 그러고도 자신을 쫓아온다는 것이었다. 암기를 벽에 박아 넣고 꾸역꾸역 기어 올라오는 꼴을 보고 있자면 가파른 벽도 평지처럼 걸을 수 있는 도키조차 귀신을 목도한 기분이 들어 오싹해지곤 했다. 절벽을 거의 다 기어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손을 발로 밟아 걷어차 떨어트려도 다음날이면 돌아오는 것이 적영이었다. 도키는 얼마 안가 그를 피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보다 그를 때려눕혀서 쫓아오지 못하게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키의 깨달음 이후 적영의 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매끈하고 부드럽던 붉은 장포는 진흙탕과 먼지바닥과 풀 위를 굴러 제 빛깔을 알아보기가 힘들고, 엉망으로 찢긴 옷자락에 풀씨를 잔뜩 달고 비척거리는 꼴은 거지가 따로 없었다. 둘 다 거지꼴이긴 했으나 낡은 거적을 걸친 수준인 도키에 비한다면 적영은 거지중의 상거지였다. * 도키는 산길이 점점 고와지고 잘 정비되고 걷기 쉬워진다고 느꼈다. 시내가 가까워오는 것이다. 도키는 드디어 편히 잘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싫었다. 사람에 얽혀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종남산을 떠나 근처 산으로 숨었으니 아직 섬서성 주변일 것이고, 아마 멀지 않은 곳에 장안이 펼쳐질 것이다. ‘사람이 치여 죽을 만큼 많겠지…….’ 도키는 그 틈에 끼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독은 외로움 사이가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기어오른다. 혼자 있으면 자기가 고독하다는 걸 모르는 법이지만 사람 사이에 있으면 흰 종이에 찍힌 검은 점 마냥 고독이 도드라지는 것이다. 도키는 젊은 시절 그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감내하며 몇 안 되는 인연조자 모두 쳐내었는데, 그 결과 지금의 그는 고독으로 녹이 슬어 벌건 쇳물이 흐르는 검과도 같았다. 예전엔 두렵지 않은 것이 지금은 두려우니 이것이 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무림인임을 감안하고서라도 많은 수의 사람을 죽였다. 흑도무림의 사람이 어떻게 손에 피를 안 묻히고 살겠느냐만 서도, 도키는 혼자 힘으론 없앨 수 없는 거대 문파 자체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필요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다. 높은 지위에 오르고 부하를 두고 비슷한 고수를 빌려올 수 있게 되기까지 그가 일으킨 살겁은 셀 수가 없다. 제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도 없는 사람들의 원수가 된 것이다. 도키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법을 몰랐다. 그저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웠다. 사람들 틈에 있으면 마음 편할 때가 없다. 본교 안이든 저잣거리든 똑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에 모여 재잘대는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안 맞은 옷을 입은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이 그립지만 사람 틈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도키는 스스로도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건가 싶었다. 물론 목표는 확실하다. 그는 모든 번뇌를 벗고 인세를 떠나고자 했다. 애초에 그것을 위해 본교로 돌아가는 중이다. 번서는 비록 파계한 도사지만 가르침 자체는 이선산 나진인에게서 사사받은 것이다. 속세를 바꾸자고 생각하지만 않았더라도 하산하지도 않았을 사람이다. 그가 돌아온다면 선인이 되는 법을 전수하겠다고 약조했으니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에 따른다면 득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도키는 그 목적을 위해 몇 년은 더 무상으로 일해야 할 것을 알았다. 번서는 도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하며 설득할망정 돌아오는 대신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조건을 걸 사람이 아니다. 분명 책사의 계책일 것이고 쓸 데가 있어 부르는 것일 터다. 그리고 또 죄를 짓겠지. 도키는 도시의 초입에서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은 하늘이 새파랬다. “안 들어가고 뭐하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키는 지친 어깨에 돌이 더 얹히는 기분으로 돌아섰다. 도키를 내내 괴롭혔단 붉은 장포의 남자가 보란 듯이 부목을 대고 절뚝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도키는 적영의 다리를 가리키고 가지를 하나 꺾은 다음 똑 분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리가 부러졌나?’ 나름 염려 섞인 질문이었는데 적영은 ‘네 부러진 다리를 2단으로 부러트려줄까?’ 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잠시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표정에 별 악의가 없고 고개가 퍽 귀엽게 갸웃거리고 있으니 다리가 부러졌냐는 질문 같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적영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 아주 깔끔하게. 뼈를 박살내는 대신 곱게 동강내줘서 고맙다. 부서진 조각이 곪지도 않을 테니 움직임만 자제한다면 멀쩡하게 붙을 것 같군!” 도키는 이죽거리는 사람을 별로 만나 본 적이 없었던 탓에 미안해해야할지 화를 내야 할 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적영이 너무 밝게 웃는 얼굴로 칭찬하듯 말을 건네서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하고 말았다. 적영은 적영대로 다리 잘 부러트려줘서 고맙다고 빈정거렸더니 도키가 얼굴을 붉히며 험험 헛기침을 해서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널 쫓아오려고 너무 열심히 걸었더니 병신이 될 것도 같다. 책임져라.” 도키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엔 무슨 뜻인지 알기 쉬웠다. 아마도 그러면 자빠져서 쉬기나 하지 왜 따라왔냐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다리병신이 되는 걸 감수하고 따라와 줘서 너무너무 반갑고 기뻐?” 적영은 추측과는 정 반대로 말했다. 도키는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적영은 도키가 왜 걸음을 멈추고 섰는지 의아했다. 그들은 몇날 며칠을 험한 산 속에서 헤매다 왔다. 편한 길도 마다하고 고생을 한 몸이니 사람 사는 곳을 보면 편한 잠자리, 술, 맛있는 음식에 눈이 도는 게 당연한데 도키는 돌처럼 서 있기만 했다. 원체 야인 몰골을 한 사내이긴 하지만 산과 들을 떠도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람이 최소한의 교류도 없이 살 수는 없다. 적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사람이 만든 집과 음식과 옷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셋도 최소한으로 줄인 것이다. 그는 오는 동안 도키를 은밀히 지켜보았는데 도키는 주로 벽곡단과 풀뿌리와 나무껍질 따위를 먹었다. 적영은 객잔에서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 혼자 납득했다. ‘제대로 된 음식에 굶주려 있었으니 고기 한 점 안 들어간 소면도 꿀맛일 수밖에 없겠지.’ 마을을 떠난 지 보름이 넘었으니 안 들릴 수가 없을 것이다. 적영은 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느냐고 재차 물었다. 도키는 몹시 고민되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도시를 우회해서 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벽곡단이 다 떨어져가는 바람에 식량을 보급할 필요만 없었더라도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큰 도시를 우회하는 쓸데없는 고생은 차치하더라도, 도키는 끼니 때 쓴 물이 올라오는 풀만 소처럼 씹기는 싫었다. 육류는 포기한 몸이지만 최소한 곡식 맛은 보고 살고 싶었다. 그는 고뇌에 빠졌다. 흔치않게도. 적영은 잠시 기다리다가 아무리 기다려봤자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민하게 놔두어봤자 ‘도시를 우회해서 산을 타고 빙 둘러 지나간다.’ 라는 정신 나간 결론밖에 안 나올 것 같다. 적영은 도키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우선 목욕부터 해야겠지? 내내 씻지를 못해서 찝찝해. 계곡 물에 옷 입은 채로 처박혀서 옷도 버렸고……. 따뜻하게 덥힌 물에 푹 담그고 싶다. 이거 간만이라 기대되는데. 아……. 아니지, 식사가 먼저인 것 같다. 넌 배 안 고픈가? 나는 정신 차리자마자 밥도 거르고 쫓아오느라 뱃가죽이 등가죽이랑 들러붙을 지경이야. 네놈, 왜 그렇게 빨리 걷는 거냐? 평소라면 물론 가뿐히 따라잡았겠지만 나는 부상자란 말이다. 그것도 네놈이 절벽에 던져서 다리가 부러진! ……윽!” 청산유수로 이어지는 말에 넋을 놓았던 것도 잠시, 도키는 적영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기겁해서 손을 쳐냈다. 적영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다가 쳐내진 손목을 느릿하게 까닥대며 말을 이었다. “이젠 내 손모가지마저 부러트리려고 들어? 야, 이 개잡놈아. 네놈에겐 인간의 마음이 없냐?” 도키는 쥐었던 손의 감촉을 떠올리면서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매끈하고 가는 손가락이라 조금만 힘을 주면 간단히 으스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적영은 도키의 표정을 보더니 말을 하다말고 뒷걸음질 쳤다. 도키는 새삼 부러진 적영의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사내라면 약자를 괴롭히는 게 아닌데 거슬려서 조금 두들겼더니 저 꼴이 났다. 생각해보면 그저 길동무 되자는 사람을 복날 개 마냥 때려잡은 것이라 비틀거리면 부축이라도 해 주는 것이 도리 같았다. 도키는 우회할 생각을 접고 도시를 향해 묵묵히 걸었다. 눈치를 보던 적영이 눈을 빛내며 곧장 따라붙었다. “미안한 줄은 아는 모양이구나. 자, 그러면 이제 날 업어라! 나는 다리가 아프다!” 도키는 무시하고 걷기만 했다. 시끄럽게 주절거리던 적영은 도키가 칠절곤을 들어보이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적영은 한동안 조용하다가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자 다시 기가 살았다. “너무하는군.” 본교에 처박혀 거의 봉문한 채 세월을 보내고, 나와서도 산 속에 숨어 사느라 들려봤자 벽촌이었다. 이런 큰 도시를 방문하는 건 간만이었다. 예상대로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이 가득했다. “정말 너무하다. 다리 아프다는데 업어주지도 않고.” 도키는 당혹스러운 심정을 애써 감추고 거리를 둘러보았다. 적영의 쉬지 않는 빽빽거림이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는 일부러 못 들은 척 하며 잘 곳을 찾았다. “내가 병신이 되면 책임질 거냐?” 도키는 귀찮은 표정으로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영이 비웃듯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오. 어떻게 책임질 건데?” 도키가 바닥에 죽일 살殺자를 썼다. “………내가 미안하다….” 도키는 병신이 되어 제 구실을 못하는 자는 죽여주는 게 자비라고 생각하므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적영은 도키의 진지한 시선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일단 짐을 풀고 식사를 할 곳을 찾아 도키는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다. 원해서 온 것은 아니지만 도시에 도착했으니 쉬어가고 싶었다. 그는 만사에 무욕한 사내였지만 식욕은 멀쩡했다. 몸이 덩치가 있어서 배가 고프면 힘을 못 쓴다. “이봐, 방금 지나간 여자 봤나? 저기 저 여자가 예뻐. 으음, 간만에 여자 생각나는군. 질펀하게 즐기면 딱 잠 잘 올 것 같은데.” 식욕이 왕성한 편이라면 성욕은 유독 무딘 편이다. 도키는 여색에 대한 화제가 경멸스러웠지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적영은 식사를 끝내고 의원에게 보이고 나면 더는 지킬 의리도 없는 사이다. 적영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도키의 팔짱을 끼며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로 갈까?” 홍등을 내건 기루였다. 도키는 책망하는 눈빛을 던지고 고개를 돌렸다. 적영이 안주로 배를 채우면 된다고 소리치며 따라오다가 곧 농담이라고 아양 떠는 소리를 냈다. 그러든 말든 도키는 처음으로 발견한 객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장기가 올라와 걸음이 빨랐다. 갑자기 빨라진 걸음을 뒤뚱대며 쫓아가던 적영이 목적지를 눈치 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미쳤냐? 저기는 너무 낡았잖아! 제대로 된 건 뭣도 없을걸! 이불은 좀이 슬고 침상은 삐걱거리고…….” 도키는 낡아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침식에 욕심을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는 땟국물이고 음식은 쉬어 터져서 나올 거다! “…….” 하지만 음식에는 욕심이 있었다. 모든 것에 무뎌져가는 그가 유일하게 끊지 못하는 것이 식탐이었다. 도키는 낡은 객잔과 주변에 꼬인 파리를 살펴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 틈에 적영은 지나가던 남자와 대화를 나누더니 쪼르르 달려왔다. 도키는 못 이기는 척 따라가 주었다. 적영이 고른 곳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객잔인데다 깨끗하고 퀘퀘한 냄새가 없었다. 도키는 적영이 으스댈 만큼 정도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니 그럭저럭 만족했다. 도키는 옮기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빈자리에 가 앉았다. “여기 주방장이 세가의 숙수 출신이랜다. 그래서 음식 맛이 훌륭하다더군.” 적영이 당연한 듯이 앞자리에 앉았다. 도키는 눈을 치켜뜨고 적영을 노려보았다. ‘안 뻗도록 살펴보며 데려다놨으면 감사히 여기고 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과 지낼 때는 아랫사람들이 처리했고 혼자 다닐 때엔 풍찬노숙을 해온지라 도키는 돈과 시설을 따져 가게를 고르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요령이 없다. 가장 먼저 보인 곳에 묵고 가장 싼 것을 먹는다. 그러다보니 만족감을 느낀 적이 드물다. 괜찮은 곳을 알려 준 것은 고맙지만 이러다 은근슬쩍 들러붙는 거 아닌가싶어 도키는 불만이 컸다. 적영은 도키의 눈초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음식을 주문했다. 그는 뭘 먹을 건지 묻지도 않은 채 요리를 고르고 당장 칭찬하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도키는 먹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음식 자체에는 고기, 생선, 소채다 하고 막연한 구분만 겨우 했다. 그래서 고기를 금한 후로는 식사 때마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이 컸는데 오늘은 선택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고가 없는 요리 둘과 볶음밥 하나, 자기 몫의 소총반두부를 시킨 적영은 고기가 안 들어간 음식을 골랐다며 감사히 여기라고 으스댔다. 도키는 귀한 대접에 익숙해서 남이 음식을 골라 바치는 게 편안했다. 도착할 요리가 마음에 들지 궁금해 하던 도키는 문득 적영은 자신의 동행이 아니며, 그가 음식을 골라 바치는 것도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도키가 가격의 반을 치르려고 하자 적영이 손을 휘저었다. “필요 없어, 거지야.” 도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돈이 없어 보이나? ……정말 없기는 하지만.’ 도키는 개털인 주머니를 떠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래서 적영이 시킨 걸로는 배 채우기에 모자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입을 다문 것이다. 도키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을 찾아서 표사 일이라도 맡아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잘못 엮이면 일만 많아지고 피곤할 테니 당기지 않았다. 그럼 호위 일을 찾을까. 기간을 정해 그 기간만큼의 수당만 챙기고 다시 움직이면 괜찮을 듯싶었다. 여비를 벌기 위해 지체했다고 하면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책사라도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도키는 당연히 적영이 모든 요리에 젓가락을 댈 줄 알았는데, 적영은 다른 요리엔 눈길도 주지 않고 두부 접시를 끌어당겨 슥슥 비빈 다음 수저를 떴다. 소총반두부는 가늘게 썬 파를 얹은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한 순두부로 도키의 눈에는 도저히 한 끼 식사로 보이지 않았다. 도키는 제 몫의 식사를 시작하면서 불안해했다. 인간이 두부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을 테니 남은 두 요리 중 하나는 적영의 몫일 터다. 도키는 도저히 배를 채우기 힘들어 보여서 고민하다가, 얼마 남지 않은 돈을 긁어모아 싼 음식을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때를 생각하면 여비를 아껴야겠지만 부끄러워서라도 사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왜 돈을 안 가지고 나왔는지 서글퍼졌다. 고민과 별개로 음식 맛은 좋아서 더 비참했다. 안 그래도 음식 고르기 힘들었는데 볶거나 찐 야채를 먹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적영은 놀리지 않고 고기가 안 들어간 음식을 골라주었다. 도키는 식사가 끝나면 감사를 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키의 불안과는 상관없이 두부를 다 퍼먹은 적영은 접시바닥에 양념을 남긴 채 손을 뗐다. “넌 밥 먹기 힘들겠다. 고기 안 먹고 어떻게 사냐? 중들도 시주 받은 고기는 먹는데.” 도카는 고기를 먹지 않고 적영은 파 얹은 두부를 골라서 식탁 위엔 육류가 없었다. 적영은 젓가락으로 볶음밥을 뒤적대다가 노랗게 익은 계란쪼가리를 집어 올렸다. “그럼 계란도 안 먹나? 이것도 태어나야 할 생명을 꺼트린 살업이잖냐?” 도키는 침묵했다. 묵언 수행 중이라서가 아니라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육을 결심했을 때 가르침을 구하기는 했으나, 그가 가르침을 구한 대상인 번서는 편식은 몸에 좋지 않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했다. ‘자네는 고기 안 먹고 살 수 있는 몸이 아니다.‘ 라고. 안 그래도 먹는 재미 말고는 취미 하나 없이 인생을 사는지라 다들 해탈 직전이라느니 열반에 들었다느니 수군거리는 도키를 정작 파계한 도사인 번서가 안 될 거라고 시작부터 못을 박았다. 그 바람에 욱해서 뛰쳐나온 게 이번 출도였고, 모르고 먹은 육수 같은 것만 제외하면 일 년 넘게 고기를 입에 안대는 데에 성공했다. 새삼 육류의 범위에 대해 고민하게 된 도키가 나도 모르겠다는 시선을 보냈다. 적영이 웃으면서 도키의 그릇에서 파를 건져 올렸다. “불가에서는 파도 금하는 걸로 아는데 도가는 잘 몰라서. 먹는 수행은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 도키는 창백한 얼굴 가득히 불신을 띄웠다. 적영 쪽에서 먼저 손가락에 물을 묻혀서 오신채라고 쓰고는 말을 잇는다.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는 강한 향으로 마음을 흩어놓아 수행을 방해하고, 공양하면 입가에 귀신이 들러붙고, 날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익혀 먹으면 음심을 일으킨다던가.” 이미 파를 먹어버린 도키가 손을 떨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외침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적영은 이어서 생선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도키의 고개가 끄덕거렸다. “치(鱼) 자가 들어가는 생선도 먹으면 안 될걸. 삼독 중 치심을 일으킨댄다.” 삼독은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냄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번뇌를 말한다. 맵게 조린 갈치, 간장을 발라 구운 꽁치, 회를 뜬 참치 등등을 떠올리자 도키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바다에 간 일이 드물어 바다고기보단 민물고기를 많이 먹었던 몸이긴 하지만 멀쩡히 먹던 음식을 못 먹게 되자 서글픔이 치솟는다. “윤기 자르르한 구운 꽁치에 간장과 파를 섞어 만든 양념장을 부어서 먹으면 그렇게 맛있지. 참치는 크기가 커서 부위별로 맛이 다 다른데 배 부위의 살을 회쳐 먹으면 야들야들하고 담백하다. 이런! 넌 못 먹겠군. 수행 때려치우시지? 다 잘 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 도키는 내가 왜 도를 닦자고 결심했는지 고뇌에 빠질 뻔 했다. 마교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뜯어말릴 때도 못 느낀 후회를 이제와서 느낄 뻔한 도키는 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를 닦는다 하고 생각을 고치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음식에서 파를 하나하나 골라내기 시작하자 적영이 다시 폭소를 터트렸다. 적영은 음식에 더는 손을 대지 않았다. 도키는 인간이 저것만 먹고 살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기루에 가겠다고 했지. 지금은 간단히 요기만 하고 술이라도 마시러 갈 생각일까. 적영은 다 먹은 접시를 구석으로 밀어두고는 탁자에 팔을 괴고 엎드렸다. 순식간에 몰려온 피로에 눌려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어디로 가나? 내가 따라가기 쉽도록 순순히 불어주실까.” 적영은 그의 행보에 대해 처음으로 물었다. 우연히 가는 방향이 같으니 동행하자고 주장한 놈이 묻기엔 늦은 질문이었다. 도키는 ‘우연‘이라며 부득불 따라붙던 그를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리다가 적영이 드디어 실토했다는 작은 승리감에 화를 참았다. 도키는 탁자에 찻물로 글을 썼다. 십만대산(十萬大山), 광동 흠현(欽縣) 서북 200리. 봉우리가 십만 개라 십만대산이라고 한다. 광동과 광서를 아우를 만큼 크고 남단으로 가면 아득한 남해와 맞닿는다. 험준한 산세와 끝없는 봉우리는 영산으로 불리기 모자란 점이 없다. 그 십만의 봉우리 속 어딘가에 교주가 잠들어있다고 하여 마교도들은 그곳에 자리를 틀었다. “십만대산이라고…….” 적영은 중얼거렸다. 최남단에 붙은 산이니 도착할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죽일 기회는 충분하다. 적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본교로 돌아간 뒤의 도키를 맞서고 싶지는 않았기에 적영은 가는 도중에 처리할 결심을 굳혔다. 도키는 적영의 웃는 얼굴이 어딘지 꺼림칙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성정 상 감사를 표하는 게 당연했는데도 식사를 끝내자마자 그냥 일어나 버린 것은 그 꺼림칙함 탓이다. 도키는 적영을 남겨두고 일어나 방을 잡고는 대금을 치르려고 전낭을 여는 순간 뻣뻣이 굳었다. 전낭엔 구멍이 뚫려 있었고, 분명히 남아있긴 했던 몇 푼마저 사라져 있었다. “무슨 문제 있냐?” “.......” 도키는 빈 전낭을 보여주었다. 적영은 도키를 병신 보듯 바라보다가 품속을 뒤졌다. 방 값은 적영이 치렀다. 적영은 도키가 하려고 했던 1인실 대신 큰 방을 잡고는 당당히 같이 들어갔다. 도키는 안에서 쉬면서도 내내 깔깔대는 비웃음을 들어야 했다. 도키는 슬슬 적영이 주는 게 받기 버거워졌다. 밥 한 두 끼 정도야 까마득한 후배의 선배대접으로 치고 받아먹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착한 선배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적영한테 죽어줄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놈도 자기 죽이려고 붙어 있는 게 뻔한데 그놈 돈으로 먹고 자기가 뭣했다. 도키가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원한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도키는 원한 있는 자들의 눈빛에 익숙했는데 적영은 그 중 어느 것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큰 화를 입고 원한을 품었다고 속여 죄책감을 자극해서 목숨을 보전하려 드는 얕은 수다. 갑자기 잘해주는 것도 방법을 바꿔 빚을 만들고 자비를 구걸할 속셈일 터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들러붙는 자이니 모른 척하고 이용해도 문제될 것이 없으나, 도키는 성정이 고지식하고 곧아 빚을 지고는 참지를 못했다. 도키는 망설이다 전음을 보냈다. [이 빚은 나중에 꼭 갚겠다.] 적영은 그때 도키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자 도키가 새침한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아, 그래……. 말은 고마운데. 설마 전음이었으니 묵언을 깬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묵언수행 중엔 글도 못 쓰고 다른 의사표현도 하면 안 될걸. 수행의 골자가 말을 전해서 짓는 죄를 끊고 의식의 흐름까지 멈춰서 무에 닿겠다는 거니까.” “……………….” 도키는 침통해졌다.
“파를 드셨으니 이제 여자를 사셔야지. 음심 좀 불끈불끈해?” 도키는 사기꾼을 보는 눈으로 적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금방 다시 떠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도키는 며칠을 더 머물렀다. 적영은 방 안에서 뒹굴 거리며 도키가 돌아오는 것을 살폈다. 매번 저 징글맞은 놈을 떼어버리겠다는 얼굴을 하고 나갔던 도키는 한숨 쉬며 축 쳐진 어깨로 돌아오는 짓을 사흘째 반복하더니 완전히 우울해졌다. 떠날 때 챙겨 나온 독초들의 무게를 달고 찧고 말리고 빻고 뭉쳐 독단을 만들며 소일하던 적영도 그 즘 돼서는 대체 무슨 일을 겪고 돌아온 것일까 의아하여 몰래 뒤를 밟았다. 도키는 표국에 가서 일을 구하고자 했다. 남쪽으로 가는 일이라면 방향이 좀 틀어져도 감안할 생각이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 끝에 그는 인생에서도 드문 좌절을 맛보고 있었다. 표사 일을 하려면 여럿이 숙식하며 단체행동을 해야 한다. 도키 같은, 벙어리는 둘째 치고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남자가 환대받으려면 증거가 필요하다. 그것은 의사소통도 어렵고 쓰기 힘든데다 조직 내에서 다툼을 일으키기 쉬운 성격을 상회하고도 남을 만한 압도적인 무위다. 수많은 단점을 넘어서서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별호를 대는 것이다. ‘직계의 도키‘ 라는 별호와 이름은 마교 최정상에 선 십인의 것이다. 일개 표국이 아니라 천하를 떨게 할 힘이 있다. 하지만 마교의 고수인 그로서는 자신의 이름을 댈 수가 없고, 삼류무사라 별호가 없다며 가명을 댈 만큼 요령이 좋지도 못했다. 따라서 표사들의 눈에 비친 도키는 이름도 밝히지 않을 만큼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에, 말 못하고 눈도 하나에 별호 하나 없는 삼류무사였다. 아니, 무사이기나 한지 의심스러운 걸인이었다. 벙어리 애꾸 걸인이 들어와서는 무턱대고 일이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을 들이대는데 덜컥 일을 주는 미친놈은 없다. 돌아서는 도키의 등에 대고 한 남자가 ‘듣지도 못한다면 완벽한 병신이었을 텐데.’라고 외쳤다. 손 안에서 돈을 굴리며 표국 건물을 올려다보던 적영은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들켜도 몇 대 맞는 수준에서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홀라당 가진 돈을 다 털 줄은 몰랐다. 겨우 이 정도가 도키의 전 재산일 줄도 몰랐고. 어쨌든 그의 행보를 묶은 데다 빚까지 지웠으니 성공적인 시도였다. 적영은 도키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순간 부탁을 거절하기는커녕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 자들이 콧대 높게 거들먹거리는 꼴이 퍽 우스웠다. 백 위 안에도 들지 못할 삼류들을 상대로 일을 청하는 도키는 숙식과 돈 몇 푼이 절실한 사람 같았다. ‘당연히 절실하겠다. 자기 죽이겠다는 놈 돈으로 먹고 자는데 마음이 편하면 그게 정신 나간거지. 하지만 같이 있기 싫다고 저 지랄을 떠는 꼴은 마음에 안 드는데.’ 적영은 입을 삐죽거리며 도키를 지켜보았다. 그는 상회의 호위무사 일을 얻으려 들다가 오늘 하루만 4번째의 거절을 당하고 물러났다. 마교에서는 아무리 작은 일을 시킬 적에도 어마어마한 선물을 안겨주며 송구스러워했다. 도키 스스로 일을 달라고 구걸한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도키는 처음으로 본산이 그리워졌다. 지켜보던 적영이 건물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부터 새빨간 것이 도드라지는 형상이었는데도 도키는 미동 없는 시선을 던졌다. “넌 상식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말도 못하는 놈이 와서 일이라고 쓴 종이하나만 들이대는데 어디서 받아줘?“ 도키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얼굴이 싸하게 굳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적영은 한 대 치기 전의 표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선수를 쳤다. “돈이 필요하냐? 도와줄까?” “…….”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부담 많이 가지고 받아주면 된다. 가끔 시키는 일도 좀 해 주고. 잡것들 사이에서 빌빌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걸?” 도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해 왔던 것처럼 노숙을 고려하던 참이었던 도키로서는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적영의 돈을 받아봤자 뒷일이 좋을 리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적영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내가 일을 물어다 주는 건 어떠냐? 네놈이 주구장창 거절당하는 건 말도 안하고 표정도 그따위라서지. 이 몸의 싹싹한 미소 한방이면 천금을 주고라도 쓰고 싶어 할걸. 네놈 같은 놈도 일자리에 꽂아 넣어 주고.” [미소로 돈 버는 일은 여자나 하는 일 아닌가? 날 죽이겠다던 놈이 갑자기 돕겠다는 건 또 뭐고.] "죽이기 전에 밥 값 받아가려는 거지. 한 푼도 없는 놈이니 일자리를 소개해줘서 뜯어내려고.“ 한참 침묵을 지키던 도키가 고개를 숙였다. 부목을 대어 천에 둘둘 감긴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적영은 그 꼴을 하고도 잘도 걸어 다녔지만 불편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적영의 다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다리 상태를 물었다. [다리는 좀 괜찮은가?] “무사해. 걸을 때 절뚝거리긴 하지만.” [네 다리가 무사한 이상 더는 같이 다닐 필요는 없겠군. 내 갈 길을 갈 테니 따라오지 마라. 진 빛은 다시 만날 날 갚겠다.] “무슨 개소리냐? 네놈은 돈 한 푼도 없잖아. 남쪽 끝까지 돈도 없이 가겠다고?” [늘 하던 일이다.] “밥 주면 아귀처럼 처먹는 주제에, 풀뿌리만 뜯으며 잘도 사시겠다.” […….] 긴 시간 침묵하던 도키가 마침내 전음을 보냈다. [돈 보다는 일거리로 부탁하지. 그쪽이 덜 빚지는 것 같군.] “잘 생각했다. 쉽고 돈 많이 주고 좋은 구경 많이 하는 일로 가지고 오지.” [고맙군. 그런데…….] 도키는 불쾌한 표정으로 턱을 까딱하고는 발치의 돌을 밟았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냐?] “아? 그거야 네놈이 마음에 들어서지.” […….] 도키는 그제야 적영의 차림에 신경이 닿았다. 그의 옷은 붉은 색 비단 장포로, 매끄러운 광택을 뿌리는 고급 비단이 선명한 붉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아무리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라도 저런 붉은 옷을 입지는 않는다. 살행을 과시하려고 걸치는 피 같은 검붉은 색이라면 또 모를까, 천박할 정도로 선명한 붉은 옷에 수놓인 자수는 좋은 비단을 순식간에 고급기녀나 걸칠 천으로 만들어 놓는다. 금사를 기반으로 오색실을 다 갖추어 수놓은 양귀비 꽃 문양은 장인의 손길이 돋보인다. 남자 옷에 저런 악취미적인 수를 놓을 장인은 없을 터이니 분명히 직접 주문을 맡긴 옷일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훑어본 결과는 명료하다. 상대는 비역질을 즐기는 놈이다. 도키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한 기분이 들어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그것이 상대에겐 오히려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다. 적영은 후후 웃음 지으며 질세라 따라붙어 왔다. 도키는 남색가에게 마음에 든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창백하게 안색을 굳힌 채 본능적인 혐오감에 몸을 떨었다.
천하에서 가장 빠른 이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천속성天速星 신행태보神行太保 대종戴宗이다. 공손승 일청이 말로 변해 달리면 하룻밤에 천리를 간다고 하는데, 사람 대신 준마와 비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오가는 것을 고려하면 가장 빠른 이는 명실 공히 대종일 것이다. 천하제일의 경공을 자랑한다고 일컬어지는 그는 겨우 스물여덟 먹은 청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구대천왕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종은 민초를 돌보고 지키라는 정신에 따라 수행을 쌓던 참이었는데, 술김에 이름 있는 무림인이라 자랑한 덕에 주막에서 새벽나절부터 끌려나와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관과 무림은 상호불가침이라고는 하지만 시골 작은 관아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청을 수락한 대종이었지만 사건 장소에 도착하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껏해야 도적질 정도일거라는 예상이 크게 빗나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동그란 구멍이 나서 죽어 있었다. 이마를 뚫린 자, 눈을 뚫린 자, 벌어진 입 안부터 목구멍까지 구멍이 난 자 등 다양한 시체가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중독된 증상을 보이는 시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머리를 뚫어 확인사살을 한 것 같았다. 같이 쓰인 독은 흔해빠진데다 다른 데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이 산에서 모은 독이라 어느 독문의 짓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양산박에서는 마교 고수들의 정보를 수집한다. 특히 십걸집의 능력에 대한 것은 중요한 정보였다. 곤이나 봉으로 찍어 뚫어 죽인 이런 상흔을 징표처럼 남기는 자들이 있다. ‘혈풍련?’ 대종은 삿갓을 쓴 타격대를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사파의 무리라지만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는 게 있다. 목적 없이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혈풍련은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는 사병 집단. 그들이 나섰다면 배후에 있을법한 이름은 하나밖에 없다. 직계의 도키. “그 엉덩이 무거운 양반이 웬일이지?” 대화교는 윗선으로 갈수록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해 십걸집으로 일컬어지는 자들은 체면을 중요시해서 어지간해서는 나서는 법이 없다. 그 중에서도 만나볼 일이 없는 자가 바로 직계의 도키였는데, 그는 십여 년 전의 출도 이후로 종적을 감추고 꼭 나서야 할 본교의 일에만 간간히 모습을 내비추었다. 그마저도 직접 나서는 대신 사병으로 부리는 혈풍련을 내보낼 뿐이라 천하에 안 가본 곳 없는 대종조차 마주친 적이 없었다. 듣기로는 지난 살업을 후회하여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한 채 도를 닦고 있다던가. 도키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은 것이 없다. 그가 중하지 않은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마지막 출도 이후 십여 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마교 고수 여럿이 나선 자리라면 끼여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도키와 혈풍련은 똑같은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구분이 어렵다. 그 은거한 고수가 마교의 본거지와는 한참 먼 곳에 갑자기 등장해 산골 마을을 몰살시켰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대종은 양산박에 남아있는 도키의 용모파기를 떠올리려고 했다. 애꾸눈과 산발한 머리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대종은 더는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털었다. 본산에 가면 해결책이든 지령이든 뭔가가 나올 것이다. 머리를 쓰는 것은 오학인의 일이다. 대종은 다리에 갑마를 묶었다.
개열심히 썼는데 BL전개 말고도 보고파서 판키울라다가 접은듯도 하지만 십걸집 VS 양산박 다인전쟁적 BL이 보고싶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