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버스 무협 Au
마스크 더 레드는 마교를 나와 독행강호한 이래 최고로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마실 나갔다 돌아오니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창고가 반파되어 있고, 그 안에서 겨울을 나던 독물들이 모조리 탈출했으며, 독에 당한 남자 하나가 시름시름 죽어가는 꼴로 나뒹굴고 있는 상황 앞에서 레드가 취한 첫 번째 행동은 남자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벌레에 쏘여 울긋불긋한 남자의 피부에 거침없이 발자국을 내려찍던 레드는 남자가 흙투성이의 넝마 비슷한 꼴이 돼서 숨이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해독약을 먹였다.
정신이 없는 남자는 입 밖으로 반 이상의 해독약을 흘렸다. 레드는 내가 이런 것 까지 해 줘야 하나, 하고 이를 빠드득 갈며 남자의 코를 쥐고 숨이 막혀 벌려진 입 안에 약병을 틀어박아 목구멍에 직접 약을 흘려 넣었다. 약이 기도로 잘못 넘어간 모양인지 미친 듯이 기침을 시작한 남자는 곧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대더니 몸을 튕기듯이 일으켰다. 그 바람에 성대하게 이마를 부딪친 레드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꼴을 보며 남자가 외쳤다.
“으, 으, 으, 은공!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인지는 네놈이 내게 설명해야 할 거 아니냐!”
레드는 바닥에서 펄쩍 뛰어 일어나 남자의 멱살을 붙들고 박치기를 먹였다. 띵하던 머리에 이어진 2차 충격에 레드가 머리를 내저으며 비틀거릴 동안, 남자는 그 혼신의 힘을 다한 박치기를 먹고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꿋꿋하게 짓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도키라고 하고 명호는 직계라고 했다. 뭔가 문파나 가문을 이어받았다는 뜻이겠지만 달랑 직계라는 두 글자에서는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더는 없다. 알려고 든다면 모를 것이 없겠지만 레드는 일부러 조사해보지 않았다. 강호의 일에 굳이 더 엮이고 싶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는 도키를 최대한 빨리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남의 사정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도키는 레드가 평생 동안 만난 사람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이었다.
정파 무리와 다대 일로 붙은 결과 반시체가 되어가는 것을 구해낸 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는데, 레드는 그 순간을 지금까지도 죽도록 후회하고 있었다. 마교의 고수이자 살수 집단의 지존으로 군림하며 돈 없는 놈과는 말조차 섞어주지 않던 레드가 어떤 이득도 없이 다른 사람을 도와 본 경험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대가 없이 일을 해 주면 다음엔 더 큰 일을 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 레드의 입버릇이었다. 이제는 강호와 연을 끊으련다. 모아 둔 돈 들고 여자 끼고 술 마시며 필부로 돌아가겠다 하고 지부를 나서다 마지막으로 착한 일 해 주는 셈 치고 구해낸 생명이 저 남자였는데, 남자는 그 길로 레드에게 들러붙어 은혜를 갚겠답시고 민폐를 끼쳤다.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절대 도와주지 않는 거였는데. 역시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레드는 도키의 발목을 걷어찼다. 물론 도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깨어난 그는 은혜를 갚겠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레드는 그때까지만 해도 꽤 기분이 좋았다. 왜 정파의 날고 긴다는 고수들이 자기를 위해 시간을 쓰지 않는 건자를 궁금해 해 왔었는데, 이런 선망의 시선을 받는 것 자체를 즐긴다면 남을 돕는 것도 해 봄직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레드가 그때까지 받아 온 시선은 선망과 따스한 호의보다는 공포로 이끌어 낸 경의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남자의 시선은 곧고 순수한데다 레드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데에 기인한 듯 순진한 믿음에 가득 차 있어, 레드는 그것이 낯간지러웠지만 제법 마음에 들었다. 후후 웃음을 터트리는 레드를 보며 남자가 혼자만의 뿌듯함에 빠져있는 레드를 의아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아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팔이나 내밀어 봐.”
레드는 고개를 까닥이며 맥을 짚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약하던 것이 이젠 팔딱팔딱 뛴다. 이제 길 가다 한 대도 안 맞고 쓰러져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레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몸은 다 나았나?”
“…덕분에. 큰 상처였을 텐데 벌써 회복시키다니 상당한 영약이었을 텐데……. 이 은혜 한량없습니다.”
“약도 약이지만 직접 돌봐준 내 정성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내기가 진탕이 되어 주화입마로 뒈질 목숨이었던데. 뭐, 이젠 정말 멀쩡해 보이는구먼.”
레드는 결정을 내리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입을 연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럼 이제 꺼져.”
“은혜를 입었으니 목숨을 다 바쳐 보필하고 싶습니다.”
“……뭐?”
“모자란 몸입니다만 보은하게 해 주십시오.”
“웃기시네. 네 인생은 도움 한 번에 다 바칠 만큼 싸냐? 뜯어먹을 게 있어 보이나본데 나한테 비비대봤자 돈 한 푼 안 떨어져.”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레드는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그는 평생 동안 남을 도와 본 적이 없었고, 도움을 입었으니 은혜를 갚겠다는 사람은 정파인들의 망상 가득한 소설에서나 나오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을 목숨 살려줬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끝 아닌가? 모자란 몸인 거 알고 있으면 알아서 꺼지라는 말이 목 끝까지 기어 올라온 레드의 마음을 흔든 것은 돈을 바라진 않는다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종자 하나 쯤은 끌고 올 걸 그랬다고 후회하던 참이었다.
아래부터 기어 올라간지라 레드는 가사 잡기엔 능한 편이다. 하지만 잘 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별개인지라 레드는 가사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곁에 부하를 두는 것은 귀찮은데다 등 뒤가 찜찜하다. 언제 너무 많은 것을 아는 놈이니 죽이라는 명이 떨어질지 모른다. 편리함과 귀찮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레드는 결정을 내렸다.
“너 밥 잘 하냐?”
“……무슨 말씀이신지?”
“네놈은 나보다 약하단 말이다. 네놈 딴엔 충성이라도 다 바치겠다고 하고 싶은가본데……. 네 같잖은 무공을 대체 어디다 써먹겠냐? 은혜가 갚고 싶으면 밥 하고 청소나 해라. 싫으면 지금 꺼져.”
레드는 도키를 처음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척 봐도 상대가 안 될 숫자의 적 앞에서 도망치기는커녕 기를 쓰고 적을 쳐 죽이던 모습이었다. 어디를 봐도 명예에 죽고 사는 무인. 자존심 때문에 패퇴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레드가 치를 떠는 종자였다. 어쩌다 같이 일이라도 할라 치면 성질을 긁어대는 놈들이지만 그런 뻣뻣한 놈들일수록 수치에 떠는 모습은 제법 귀엽다.
무인이라면 견딜 수 없을 하찮은 노동을 시키다가 더는 못하겠다고 항의할 때쯤이면 엉덩이를 걷어 차 쫓아내겠다는 게 레드의 생각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젊은 놈들을 놀려먹는 재미를 알게 된다더니. 레드는 도키가 어떻게 이런 짓을 시키냐고 항의하며 걸레질하는 모습을 상상해보고는 피식대다가 그가 자신을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음? 뭐냐. 왜 그렇게 쳐다봐? 싫으면 꺼지라니까.”
싫어서 노려본 거라고 치기에는 지나치게 몽롱하고 열정적인 시선이다. 레드는 어쩐지 오소소 소름이 돋아 도키를 노려보았다. 도키는 예상과는 달리 고개를 열렬하게 끄덕이더니 은공을 위해서라면 타는 불 끓는 물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든 견뎌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레드는 흐뭇하게 웃으며 도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저는 도키라고 합니다. 은공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네 이름 따윈 알바 없고. 이제부터 네놈을 종놈이라고 부르마.”
“아니, 하지만 저기…….”
“닥치시고.”
도키는 꼬박꼬박 종놈이라고 부르는 레드를 보며 쓸쓸히 고개를 숙였다.
다음 날, 레드가 눈을 뜨자 집 안 가득히 기름진 냄새가 꽉 차 있었다. 순식간에 속이 안 좋아진 레드가 침실을 나서자 도키가 마냥 행복한 얼굴로 튀어나와 고개를 숙였다.
“드십시오, 은공. 식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건 뭐…….”
아침부터 식탁에 고기요리만 한 가득이다. 보기만 해도 뱃속에 기름이 끼는 기분에 레드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난 아침은 안 먹거나 소채 조금만 먹는다. 그리고 이건 대체 어디서 난 거야? 거지 비슷한 낭인 나부랭이 같더니 고기 살 돈이 있었나?”
“제가 직접 사냥했습니다.”
젓가락을 집어 들고 못 먹을 것이라도 보듯 뒤적거리던 레드는 도키의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받고는 고개를 돌렸다.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저히 마주보고 있을 생각이 안 든다.
‘…한 두입만 뜨다가 남은 건 저 놈 먹으라고 주면 되겠지. 덩치도 크니까……. 아니, 누가 이렇게 많이 차리래?’
레드는 어서 드시라는 시선을 외면한 채 예의상 한 젓가락 입에 집어넣었다.
“……읍, 헉, 더헉…! 퉤!”
“으, 은공? 괜찮으십니까?”
도키가 당황하며 찻잔을 건넸다. 레드는 입에 넣었던 고기를 모조리 뱉어내고는 찻물로 입을 헹궈버렸다. 고기는 핏물을 제대로 빼지를 않은 건지 손질을 제대로 못 한 건지 비린내와 누린내가 동시에 났다. 음식이 상했든 썩었든 먹을 수야 있는 레드였지만, 임무 중도 아니고 편히 쉬면서 똥 같은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도키의 요리는 비렸고 누린내가 났으며 간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거기다 겉은 탔고 속은 설익은 채였다. 식탁 전체가 맛은 상관없고 양만 많으면 다라고 외치는 듯 했다. 레드는 뿌듯하게 음식을 권하다 말고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는 도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처먹든 버리든 니 맘대로 하고 설거지나 해라.”
“예…? 아, 안 드실 겁니까?”
“네놈이 일단 맛을 보고 말 해! 인간이 먹을 걸 들고 와!”
저 놈은 요리를 하면서 음식 맛을 보질 않을 것이다. 안 그러면 저런 요리를 먹으라고 내놓을 리가 없다. 그냥 숭덩숭덩 썰어다가 태운 것뿐이지 않나. 한 입 먹으면 제 놈도 속에 든 걸 모조리 게워내게 될 걸.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며 헛구역질하며 바람을 쐬고 온 레드는 식탁에 앉아 우울한 얼굴로 식사를 하고 있는 도키를 발견했다.
“…그, 맛있는데요, 은공.”
“……그러냐?”
레드는 도키에게 식사준비를 시키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잘 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다. 요리는 아무래도 손맛이라는 게 있고. 고운 아가씨가 아니라 덩치 큰 사내가 한 요리가 맛있을 리가 없다. 몸으로 뛰는 일을 시키는 게 좋겠지.
흔치 않게 자비로운 마음을 먹은 레드는 도키에게 설거지를 시킨 다음 손수 차를 끓였다. 예전에는 시비들이 끓여 온 차를 마셨지만 이제는 여유를 부리며 차를 즐길 시간이 있었다. 다도는 차를 마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는 과정 자체로 마음 수련이 된다. 용정의 그윽한 향이 퍼지자 레드는 휘파람을 불며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았다. 자비롭게도 직접 끓인 한 잔을 도키에게 양보하겠다는 뜻이다. 레드는 설거지 끝나면 마시라는 말을 남기곤 찻주전자 채 들고 올라가 침상에 누워 책을 펼쳤다.
마교의 어두침침한 구석에서 무림맹주의 행보 보고라느니 양산박 물자의 움직임 따위를 보고받으며 머리를 굴리던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한가. 이래서 사람이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하나보지. 레드가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춘화집을 넘긴 순간, 아래에서 큰 소리가 났다.
와장창! 하고 시작된 소리가 끝도 없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순간 레드는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서 멀어졌다. 아무래도 암살자가 들어온 것 같았다. 정사마를 통틀어 원수는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몸이다.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난 것을 보니 주방에서 접전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레드는 자기 혼자만 있는 줄 알았다가 다른 놈이 있는 것을 본 암살자가 도키부터 습격했으리라 판단했다. 순식간에 1층에 도달한 레드가 주방문을 열어젖혔다.
“살아있나? 웬 놈이냐!”
그곳엔 설거지를 하던 도키가 깨진 자기그릇 사이에서 멍청한 얼굴로 돌아보고 있었다.
“…뭐냐, 이 꼴은?”
“……저, 은공. 제가 접시를 깨서…. 그, 놓친 것을 잡으려다가 다른 접시도…….”
“…….”
레드는 말없이 바닥에 깔린 깨진 조각과 남아있는 그릇들을 살펴보았다. 대충 쓰다 버릴 생각이었던 평범한 자기 그릇들 사이로, 청자로 만들고 금박을 입힌 화려한 접시가 박살난 조각을 발견한 순간 레드는 머리를 싸쥐었다.
“……이건 왜 밖에 나와 있나? 분명히 안에 잘 넣어놨을 텐데.”
“먼지가 앉아 있기에 설거지 하는 김에 같이 씻으려고 했습니다.”
“이게 네놈 몸값보다 비싸, 개자식아!”
레드는 결국 깨진 접시를 붙들고 도키를 후려쳤다. 도키는 깨진 단면에 레드가 손이 베일까봐 말리다 한 대 더 맞았다.
레드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기보단 분노의 원인을 제거하는 쪽이었다. 도키는 직도를 끝없이 뺐다 넣었다 반복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레드의 눈길 앞에서 빌빌 기며 깨진 접시조각을 주웠다. 빨리 치우지 않으면 소리를 지를 것 같아 허겁지겁 치운 탓에 굳은살이 가득 박인 손가락에도 상처가 생겼다. 레드는 제 집 바닥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 걸레질을 하는 도키를 보다가 결국 폭발했다.
“지금 바닥에 피 칠갑 하냐? 걸레질 하라고 했더니 왜 피를 처바르고 있어!”
“아, 아닙니다! 바닥을 더럽히려는 것이 절대 아니라……. 악!”
“아니긴 뭐가 아니냐! 가서 손가락에 약이나 발라!”
레드는 도키를 퍽퍽 걷어차 주방에서 쫒아내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쭈그리고 앉아 사기조각이 잘게 깔린 바닥을 걸레질하는 레드의 귓가에 도키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은공……. 약은 어디에 있습니까?”
레드는 걸레를 도키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아끼던 접시가 박살난 충격도 아물어가던 어느 날, 도키는 여느 때처럼 레드의 침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레드는 똥 씹은 얼굴을 하고 도키를 걷어차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도키는 사경을 헤매는 반 시체 꼴이라 레드는 자신의 침상에 뉘이고 그 옆에서 잠들며 간병을 했다. 기껏 살려놓은 목숨을 치료를 못해서 날아가면 그 또한 아깝다는 이유였다. 고열에 들떠 앓던 도키는 종종 레드의 품에 기어들어와 끌어안고는 잠들곤 했다. 다 죽어가는 환자의 팔인데도 자신을 끌어안는 힘은 뜻밖일 정도로 강해서, 레드는 꿈에서 목숨 줄이라도 붙들고 있나보다 하고 내버려두었다. 억지로 떨쳐내었다가 기껏 가라앉혀놓은 내기가 뒤흔들릴까 걱정된 것도 있으나, 팔 할은 도키가 아이처럼 웅얼거린 ‘엄마…….’라는 말 때문이었다. 이런 말에 마음이 흔들릴 만큼 내 심성이 고왔던 모양이지. 레드는 혼자 납득하면서 잠을 청했고, 도키의 몸이 회복된 다음부터는 가차 없이 온갖 공격을 가해 바닥으로 떨어뜨려버렸다.
함께 살게 된 이후 도키의 방을 따로 준비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도키는 제 방을 이용하는 대신 매일 레드를 찾아들었다. 침상에서 걷어차면 바로 옆에 이불을 깔고 잔다. 레드는 대체 저놈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찜찜하게 잠들곤 했고, 눈을 뜨면 어느새 기어 올라와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덩치 큰 남자와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건 전혀 즐거운 기분이 아니다. 레드는 오늘은 정말 내 옆으로 올라오지 마라, 올라오면 죽여 버리겠다 하고 엄포를 놓고 잠들었다. 그리고 한참 뒤, 도키가 입을 맞춘 순간 잠에서 깼다.
“도저히 못 봐주겠다. 뭐, 은혜를 갚아? 종처럼 부려달라고?”
“은공! 제 진심을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은공께 구함 받은 순간부터 은공만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지랄 마, 이 남색가 자식아! 은인입네 말하면서 날 추행하려 드는 게 네 진심 아니냐!”
도키는 당장에라도 꺼지라고 할 것 같은 레드의 기세에 눌려 몸을 움츠렸다. 그가 이럴 때 취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원래 머리를 굴리거나 아양을 떠는 데엔 익숙하지 못한 남자다. 도키는 레드의 손을 꼭 모아 쥐고는 최대한 진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레드는 지렁이가 손에 닿은 16세 소녀처럼 질겁하며 손을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젠장! 징그럽게 들러붙지 마라!”
“징…그럽다니……. 저는 진심으로, 은공께 저를 다 바치고자…….”
레드의 지렁이를 보는 것 같던 시선이 돈벌레 보듯 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날 위해 사는 게 뭔지 가르쳐줄까?”
“예! 부디 가르침을!”
도키는 진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진지하게 생긴 남자가 고개까지 숙이고 가르침을 구하는 모습에선 비장미가 넘친다. 한 나라를 능히 등에 짊어질 것 같은 기상이다. 레드는 왠지 감동하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도키가 어서 말해달라는 듯 절실하게 레드를 올려다보았다. 레드의 손가락이 문을 향했다.
“저기까지 걸어가.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가.”
“예!”
도키는 즉시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갔다. 레드는 그 보무도 당당한 발걸음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참 말 잘 듣는다. 시킨 대로 수행할 수 있는 게 걷기 이상은 무리인 게 문제지만. 레드가 뭐라고 생각하든 당당하게 걸어 나간 도키가 문 밖에서 빼꼼 고개를 들이민다.
“은공, 이제는 무엇을 할까요?”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 으, 은공……?”
“꺼지는 게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당장 사라져,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마! 나는 네놈을 보면 열이 받아! 기분이 나빠서 콱 쳐 죽여 버리고 싶어! 솔직히 말해서 왜 안 죽여 버리는지도 모르겠다! 네놈이 보은할 마음으로 나를 괴롭힌 거든 원한이 있어서 괴롭힌 거든 내가 괴롭고 짜증났다는 건 똑같은데! 알았으면 어서 나가서 사라져!”
“괴롭히다니요! 저는 절대 그런 생각은 추호도……!”
“네놈의 존재 자체가 나를 괴롭혀!”
레드는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다 품에 손을 집어넣어 무기를 꺼내들었다. 새까만 수리검이 들린 손을 보자 도키의 안색이 변했다. 충격 받은 얼굴.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 같은 얼굴을 향해 레드는 가차 없이 암기를 출수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간 암기가 문틀에 박혀 부르르 떨린다.
“.....!”
다음은 네 목이라는 듯 눈짓하는 레드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도키가 겨우 고개를 돌렸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느릿느릿하게 멀어져가는 등에 레드는 침을 뱉고 소금을 뿌렸다.
주구장창 집안 기물을 때려 부수던 도키가 없어져 평화롭고 조용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레드는 잠에서 깼다. 집 밖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려 온 탓이었다. 도키가 떠난 이래 수면을 방해받는 일이 없었던 레드는 불쾌감에 가득 차 직도를 움켜쥐고 뛰어나갔다. 걸린 놈은 무조건 17등분을 해 버릴 기세로 문을 열어젖힌 레드에게 도키가 인사를 했다.
“기침하셨습니까, 은공. 좋은 아침입니다.”
도키의 손에는 망치와 못이 들려 있었다. 주변에는 톱이며 대패며 짚과 토막 난 나무쪼가리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레드는 우울한 시선을 들어 도키의 옆을 바라보았다. 대충 잘라 세운 나무 기둥 겉을 얼기설기 엮은 거적으로 둘러 만든 움막이 지어져 있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레드의 집 바로 옆이다. 레드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아담하지만 훌륭한 집 옆에 거지도 안 살 움막이 생긴 것이었다.
“…이건 뭐냐?”
“제 집입니다. 은공께서 같이 사는 것을 불편해 하시는 것 같기에……. 앞으로는 이 곳에서 살면서 은공의 생활을 살피겠습니다.”
레드는 발길질 한 번에 도키의 집을 무너트렸다.
레드는 남자가 남자에게 몸을 노려진다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쁘고 찝찝한 일인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뇌에 빠졌다. 레드가 성추행당하는 아가씨 같은 고민을 하게 된 이유는 옆집에 이사 온 이웃 때문이었다. 그 이웃은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한 집에 같이 살던 놈이었다. 동성이고, 자는 틈을 타 입을 맞췄고, 자신에게 유독 들러붙는 꼴을 보면 남색가임이 틀림없었다. 레드는 창밖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창밖에서는 새로 해 온 나무를 기둥삼아 세운 도키가 어설프게 지붕을 얹고 있었다. 레드가 박살내고 도키가 새로 지은 것이 통상 일곱 번째다. 처음에는 한 채 지을 때 하루는 걸리던 것이 이제는 반나절이면 뚝딱 만든다. 점차 견고해지는 것도 같다.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무너트렸으니 저 흉물을 보고 산지도 한 달이 되어간다.
레드는 저녁이 되어가니 오늘 밤은 자게하고 해가 뜨면 부술까, 지금 나가서 부숴버리고 상쾌하게 잠을 청할까 고민하며 움막을 노려보았다. 시선을 눈치 챈 도키가 레드 쪽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자는 사이 입술을 들이댄 색마라고 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진한 웃음이다. 차라리 저놈이 여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레드는 씁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휘잉, 하고 바람 부는 소리가 요란하여 레드는 창밖을 돌아보았다. 이미 내려앉은 어둠이 새까맣다. 해가 지기 전 움막을 다 지은 것을 봤는데 창 밖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시간을 생각하면 마을로 내려갔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한겨울인데 모닥불도 안 피우고 거적 하나 두른 바깥에서 밤을 새겠다니 어이가 없다. 레드는 불씨를 나눠 줄 요량으로 화섭자를 챙겨들고 문을 열었다.
바깥은 생각보다 더 추웠다. 응달에 고인 눈이 녹지도 않은 위로 새 눈이 쌓여 덮인 바닥은 달빛만으로도 새하얗게 빛났다. 오후 내내 도키가 바삐 오가느라 밟아대었던 마당의 일부분만이 눈이 녹아 질퍽거리다 얼어 있었다. 레드는 소리 하나 없이 걸어가 움막을 열어젖혔다.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움막 안에는 밀짚 거적을 덮은 도키가 옹송그려 누워 있었는데, 레드의 집과 마주 댄 벽에 온 몸을 딱 붙이고 있는 꼴이 불쌍했다. 레드는 혀를 차곤 잠든 도키의 배를 내리밟았다. 잠시 후 도키가 퍼덕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처음이다…….”
“뭐?”
“…누군가 접근했는데도 모르고 잠든 것은 처음입니다. 모두 은공의 덕입니다.”
어쩐지 감동에 가득 찬 눈이다. 마주보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말의 내용은 더 재수가 없다. 레드는 무의식중에 비꼬는 목소리를 냈다.
“네놈은 누가 접근하면 무조건 다 알아챈단 말이냐?”
“네.”
“…앞으로는 네놈보다 더 고수가 있다는 걸 상기하며 살아라.”
비꼬아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레드는 괜히 움막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후웅. 찬바람이 한차례 더 지나가면서 움막이 휘청거렸다. 레드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오늘 밤은 내 집에서 자라. 날이 춥다.”
“네? 저, 정말이십니까?”
“오냐.”
도키는 움막을 나와 집으로 들어가는 레드의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움막을 짓고 부수는 사이 내내 봤던 집 마당이 처음보기라도 하는 양 감동에 찬 눈빛이었다.
“저… 정말 제가 은공의 집 은공의 침대에서, 다시 은공을 끌어안고 자도 되는 겁니까?”
“그럴 리가.”
레드는 단호하게 딱 자르고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단단한 벽 안인데다 내내 난로를 피운 덕에 움막과는 차원이 다른 훈훈함이 사방을 가득 채운다. 레드는 눈이 묻어 녹은 거적을 빼앗아 들어 잘 마르도록 걸어놓고 고개를 까닥였다.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 도키가 쓰던 손님용 방이 있었다. 안은 도키가 떠나간 이래 건드린 자취 없이 그대로였다. 청소하기 귀찮아서 내버려둔 방이건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꼭 살던 사람을 위해 남겨둔 것 같다. 레드를 감동한 얼굴로 올려다보던 도키가 머리를 크게 숙였다.
“은공, 감사합니다.”
“뭐?”
“처음 뵈었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역시 좋은 분이실 줄 알았습니다.”
“…….”
레드는 이래저래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사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치정관계가 복잡한 남자였지만 누군가 순수하게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오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자기가 은인이라지만 목숨을 구해준 것 뿐. 은혜를 갚겠다는 무림인을 허드렛일 하는 하인 취급하며 막 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진작 욕을 하며 떠나가야 정상이었다. 도키가 제대로 일을 못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내 착취하고 괴롭히다 내친 놈이 그래도 좋다고 들러붙으니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콕콕 쑤신다. 레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가슴을 손으로 감싸 눌러보고는 인상을 구겼다. 어울리지 않는 짓이 민망해서인지 얼굴이 뜨겁다.
“은공, 얼굴이 붉으십니다. 몸이 아프시기라도?”
“아무 것도 아니거든?”
도키는 레드의 집에서 은근슬쩍 붙어살고 있었다. 하루가 지난 뒤, 나가는 대신 옆에 딱 들러붙는 도키를 레드는 별 말 없이 외면했다. 도키는 그것으로 여기서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셈 쳤다. 그가 기를 쓰고 지은 움막에 눈이 쌓여 얼음집이 되어가는 중인 어느 날이었다. 레드가 뜬금없이 물었다.
“너, 갈 곳이 없냐? 왜 부득불 나한테 들러붙는 거냐?”
대답을 예상하고 던지는 질문이었다. 사실 질문이라기 보단 사실의 확인이다. 도키는 다정하게 웃었다.
“은공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윽…….”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레드는 귀 끝까지 시뻘게진 채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열이 올라 귓바퀴가 화끈화끈하다. 도키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레드의 손을 붙잡았다.
마디가 굵고 두터운 남자다운 손. 굳은살이 어찌나 박였는지 나뭇등걸 같은 피부에 밟히고 베인 상처가 수없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 아마 레드와 손을 마주 댄다면 길이는 몰라도 너비가 상당히 차이나리라. 손이 완전히 잡혀 감기는 안정감에 레드는 눈을 내리감았다. 긴장한 탓인지 차가워 진 손에 아직 젊은 청년의 온기는 델 듯이 뜨겁다.
“은공. 손이 차가우십니다. 혹시 춥기라도 하신 것인지…. 불을 더 뗄까요?”
“…아니, 안 그래도 괜찮다.”
불을 떼려고 일어나는 도키를 레드가 말렸다. 일어나다 말고 주저앉은 도키가 머쓱하게 웃었다. 보그르르, 하고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차를 끓이려고 걸어 둔 주전자에서 뜨거운 김이 샌다. 도키는 차 맛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레드가 차를 끓일 때의 분위기는 좋아했다. 빈말로도 차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양반이 입을 다물고 진지한 태도로 자그마한 찻잔들에 물을 붓는다. 한두 가지의 다과를 곁들여 내 놓은 레드는 곧 풍기는 차 향 속에서 책을 든다. 도키는 평소엔 곁에서 무기를 점검하거나 꾸벅꾸벅 졸지만 오늘은 레드의 손을 잡고 있다.
레드는 잡힌 손을 내려다보다 눈동자를 굴렸다. 찬 손가락 끝을 지압하듯 꾹꾹 누르며 쪼물대는 도키가 눈에 들어왔다. 레드는 비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내 뭘 안다고 좋아한다고 말을 하냐?”
도키는 잠시 손을 멈추고 고민한 후에 입을 열었다.
“은공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은공의 곁에 있을 때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확실하기에.”
평소엔 일자로 닫힌 무뚝뚝한 입이 미미하게 호선을 그린다. 레드는 홀린 것처럼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잡힌 손이 뜨겁다. 생각해보면 접촉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남자였다. 길을 가면 옆에 서고 의자에 앉으면 바로 옆에 붙어 앉는다. 밤이 되면 같이 자자고 한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오더니 손도 대지 않고 잔다. 그 모든 것이 레드에게 도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손을 꼭 쥔 채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시선은 올곧기 그지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비뚤게 보는 레드였는데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은공을 만나기 전엔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은공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레드는 ‘나도 그래’라고 대답할 뻔 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곧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겨울밤은 같이 지새는 쪽이 더 따스하고 기댈 때면 마주 안아오는 품은 단단하다. 이미 너무 익숙해졌다. 떠나가라고 외쳐대지만, 막상 도키가 떠나면 그 빈자리가 허전해서 잠을 이룰 수 없는 쪽은 겉만 젊지 노인이 되어가는 레드 쪽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데리고 살 것도 아닌 이상 적당히 선을 그어야 할 텐데, 닿으면 접촉한 부분부터 온기가 퍼져서 선이 흐물흐물해진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저 열렬한 사랑의 말에 나도 그래, 라고 대답해버리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그래도 손을 놓기가 싫어서, 레드는 잠시만 더 그대로 있기로 했다. 체온이 맞댄 손 사이를 오가다 열평형을 이룬다. 둘은 주방에서 끓던 주전자의 물이 증발하다 못해 탄 냄새가 날 때까지 손을 잡고 있었다.
***
레드는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은 걸 참는 표정으로 덩치 큰 남자를 노려보았다. 도키는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서까래 위를 기어 다니며 쥐를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런다고 쥐가 잡혀 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시도하는 족족 허탕이었다. 오히려 도키가 움직이는 서슬에 지붕이 내려앉지나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지만 레드는 일부러 내버려두기로 했다. 아무리 뻔뻔한 놈이라도 저 때문에 남의 집이 무너질 정도면 꺼져주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더 좋은 집으로 지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대신, 집을 무너트렸으니 다시는 얼굴을 보지 말자고 말하고 연을 끊는 걸 택할 만 한 이유가 있었다. 레드와 도키는 고작해야 석 달 전에 만난 초면이었고, 구해 준 사람과 구함을 받은 사람의 사이일 뿐 인연은 없었다. 오히려 석 달이라는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도키가 해치운 짓을 떠올리면 절로 혈압이 오른다.
레드가 고르고 골라 모은 다구들이 박살나고 찻잔 여덟 개는 금이 갔다. 설거지를 하라고 하면 접시를 깨고 걸레질을 시키면 바닥을 내려앉힌다. 그리고 이번엔 창고를 박살내어 고이 키우던 독물들을 방생시켰다. 새 나무를 덧대 혼자만 반질반질 윤이 나는 나무판을 내려다보던 레드가 우당탕, 하고 지붕이 무너질 것 같은 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은공! 잡았습니다!”
찍찍대는 쥐 한 마리가 손아귀에 애처롭게 붙들려 있었다. 레드는 기분 나쁜 얼굴로 쥐를 받아들어 탁자 위에 둔 상자에 집어넣었다. 상자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쥐를 날름 받아 삼켰다.
“잘 먹는군.”
만년한설 같던 레드의 눈빛이 조금 따스해졌다. 이 뱀은 원래 겨울잠에 든 채로 보관 중이던 독사로 도키가 창고를 박살냈을 때 잠에서 깼다. 반쯤 얼어 죽을 뻔한 것을 잡아 난로 앞에 가져다놓기는 했지만 중간에 깨서인지 다시 잠들지를 않았다. 레드는 뱀이 다시 동면에 들 수 있도록 준비하는 중이었다. 도키는 잘 자던 뱀을 깨운 죄로 뱀의 먹이가 될 쥐를 잡고 있었다.
도키가 고생해서 쥐를 잡아와도 레드는 칭찬 한마디 해 주지 않고 그저 뱀이 먹는 모습이나 구경하며 즐거워했다. 도키는 잠시 그 뱀이 자기보다 더 팔자가 낫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 새 다시 차가워 진 레드의 눈살을 이기지 못하고 다음 쥐를 잡으러 떠났다. 레드는 참 믿음직하지 못한 뒷모습이라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외출 전 레드의 주문은 창고에 먼지가 많이 쌓였으니 원래 있던 물건을 절대로 들지도 말고 옮기지도 말고 먼지를 털어만 달라는 것이었고 도키는 그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 다만 7척에 달하는 무기를 가지고 들어간 것이 문제였다. 사람의 키보다 긴 장대는 도키가 부주의하게 한 바퀴 빙 돈 순간 좁은 창고를 깨부숴 놓았다. 창고가 부서지고 독물들이 도망치고 도키가 중독되어 있던 원인을 들은 레드는 억 소리를 내며 뒷목을 잡았다.
레드는 타인과 함께하는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라고 자평하고 있었다. 자신 외에는 다 적이라고 생각하던 어린 시절을 거친 레드는 성장한 이후에도 타인과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법을 몰랐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이용하다가 버리는 데는 익숙해도 우애를 나누어 본 적은 없다. 암살부대를 양성한 적은 있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사승관계와는 달랐다. 레드는 그들을 교육할 때에 개개인의 무위보다는 머리회전이 빠른 것을 1차로 강조해 왔다.
거기다 도키는 레드가 익숙한 종류의 인간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멍청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레드는 영 마뜩찮다는 얼굴을 하고 도키를 노려보았다. 간신히 뱀의 숫자만큼 쥐를 잡아온 도키는 공구를 가져와 부서진 창고를 수리하고 있었다. 창고는 청소하다가 박살낸 주제에 지붕은 올라가서 뛰어다니고도 잘도 박살내지 않았다. 지붕을 내려앉히면 그 핑계로 도키를 쫓아내고 아예 이사를 가 버릴 예정이었던 레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도키도 그 정도의 섬세함은 있는 모양이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고 꼬투리도 잡으려 들면 없다.
레드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타인에게 자비로운 사내가 아니다. 그런 자신이 도키 같은 멍청하고, 재주 없고, 눈치까지 없는 남자를 석 달이나 두고 보고 있다면 그건 결국…….
‘저 놈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지.’
참으로 찝찝한 깨달음이다. 저런 덩치 큰 남자가 뭐가 예쁜 구석이 있다고. 하지만 예쁘고 가녀린 맛은 없어도 귀엽고 순진한 맛은 있다. 닳고 닳아 못 볼 꼴 많이 본 마두일수록 순진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애들을 밝힌다고 하던데 자신도 딱 그 짝인 모양이었다. 나이 반백 살을 넘은 주제에 새파란 아이들을 상대로 흑심을 불태우던 놈들을 떠올리면 자신도 그렇게 보일까봐 기분은 나쁘지만, 어쨌건 도키와 자신은 겉으로 보기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여자들보다 더한 정성을 얼굴에 쏟은 덕에 아직 약관을 갓 넘은 홍안의 미청년으로 보이는 레드와 서른 중반의 미남자인 도키는 남색가들이 기준으로 본다면 다시없을 선남과 선남일 것이다.
레드가 놀라울 정도로 거부감 없이 연인이 된 자신과 도키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 다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와지끈, 와장창, 치이익, 쿠당탕탕. 뭔가 부서지고 깨지고 독액이 뭔가를 녹이다가 뭔가가 나뒹구는 화려한 소리다.
“으, 은공! 선반이 부서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 네놈이 또 부숴먹었겠지, 이 멍청한 놈아!”
하여간 진지하게 생각해 줄 겨를이 없다. 레드는 도키가 짐 더미 사이에서 나뒹구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고, 부서진 선반을 본 후에는 그렇게 생각한 자기 머리를 터트리고 싶었다.
도키 매우 아방수같음
도키 매우 아방수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