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동정은 제법 큰 미덕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게 없는 것이라고 폄하할 정도로 못나지 않았거든.
남자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진중했다. 원래가 낮고 중후한 목소리라, 진지하게 말을 할 때엔 쉽게 설득력이 생긴다. 도키는 거기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직계,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도키가 기억들 더듬을 때 쯤, 레드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잇는다. 나는 내가 잘난 사람 갈다. 아마 너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나 하지.
아이는 자신에 대한 것을 별로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에 가진 것이 별로 없었던 탓이다. 부모는 없었는데, 아이는 처음엔 세상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바보는 아니었다. 똑똑한 아이였지. 천재라고 해도 모자랐지. 그는 사람의 윤리를 무시하고 인과를 뒤엎는 발상을 하도록 교육되었는데, 그래서 무언가 이상한 것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무용한 것들에 얽매여 사는 하찮고 가련한 자들이 신기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래, 마치 네가 좋아하는 것들. 부하나 가문이나 명예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좋은 것을 먹고 마시고 자랐다. 천남성의 뿌리, 대극, 낭독, 협죽도, 초오, 대극, 낭독, 비소, 생금과 생청, 부자, 게의 알. 짐새를 담근 술…. 좋은 것을 골라 엄선하여 내 놓았지.
자랑은 아니지만, 아니, 맞나, 어찌되었건 간에. 그는 외모가 뛰어나 때로는 사랑을 받기도 했고….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가 작게 킬킬대는 웃음으로 바뀐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다시 주절거림이 이어진다. 자라나고, 죽이고, 독액을 마시고 고문에 버티다 죽을 뻔한 경험이 계속 반복되다가, 그 독들의 효과를 하나하나 설명하던 레드가 너는 어차피 관심이 없겠군, 하고 지루한 설명을 했다고 사과를 하고서야 겨우 끝났다. 열 살도 못 된 아이의 이야기는 어느 새 가면을 쓴 닌자의 이야기가 되어 있다.
이야기는 맺고 끊는 곳 없이 불규칙하게 이어지다 뜬금없이 끝났고, 어디까지가 일어났던 일이고 어디부터가 꾸며낸 말인지 알 수도 없었다. 도키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레드의 말에는 사실과 인과관계 같은 것이 없다. 감정의 교류를 원해서 늘어놓는 무익한 말들.
뭐 그러한 이야기다. 요컨대 옥에도 흠이 있다는 거다. 자, 직계, 어떻게 생각하느냐? 안달이 난 듯한 목소리가 묻는다. 아이가 부모에게 받곤 하는 단 과자,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 칭찬하고 다독이듯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 그런 같잖은 것들이 내겐 없었단 말이다. 하고 레드는 기대하는 것이 역력한 얼굴로 친구를 본다. 불행한 과거를 늘어놓는 사람에게 곧잘 던질 법한 위로를 기대한다. 거만한 미소가 가신 얼굴은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 티가 나, 단 음식을 조르는 아이 같아 보이기도 한다. 도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을 살펴보다 고개를 돌린다. 서류들이 상 위에서 바스락거린다. 혈풍련의 유지비, 물품 대금, 책사가 내린 지령서, 갖가지 것들이 도키가 읽기를 기다린다. 그가 그것들을 읽는 사이 가면의 눈구멍 밑으로 뜨인 눈은 한참을 기다린다. 레드는 그러다 지쳐, 상을 멋대로 밀어두고 도키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레드는 무릎에 머리를 댄 채 한참을 몸을 떨며 웃는다. 도키는 그 동안 서류 두 장에 인감을 찍었다.
도키.
레드는 이름을 불렀다. 손을 뻗었다. 손이 뱀처럼 남자의 손등 위를 긴다. 손가락은 매끈하고 차가워 돌로 빚은 조각 같다. 도키는 손가락이 지난 길마다 남은 선득함에 놀라 레드의 손을 감싸 쥔다. 손바닥 안쪽으로 덮어 쥐고는 찬 손가락을 덥히며 그저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레드는 입 꼬리를 들어올린다. 얄망스럽게 휘어지는 눈매는 애정을 바라는 여자들을 연상시킨다. 시녀들, 창녀들, 권력자의 애첩이 사랑을 구걸하는 것과 비슷한 데가 있다. 도키는 모욕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상되는 표정을 떨쳐내지 못한다.
레드는 기대하는 얼굴이 연약하고 어여쁘게 보이도록 애쓰며 말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무엇을, 이라고 묻기엔 그는 너무 말이 없다. 도키는 그저 시선을 보낸다. 레드는 개미 앞에 떨어트린 단 꿀같은 어조로 속삭인다. 내가 가엾게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도키는 그 말을 의아하게 여겼다. 레드는 자주 기묘한 것들을 물었다. 질문들은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그를 떠보기 위한 장난 같았다. 이번에도 그렇다는 것은 알아챘으나, 도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다만 귀찮다고 느꼈다. 레드, 너는... 레드는 기대로 얼굴을 화사하게 편다. 그는 레드를 가엾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살인자와 동정을 받아야 할 대상을 쉽게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의 과거는 단단하기로는 반석 같고 현재는 깊이 뿌리내린 나무 같아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기갈을 이해하지 못한다. 레드. 너는 지금 충분히 강하지 않은가?
그리고 레드는 웃는다. 아, 이 친구야. 배곯아 본 적도 죄 없이 맞은 적도 욕설을 들으며 긴 적도 없는 내 친구야. 네 그 텅 빈 머리를 내가 얼마나 아끼는지를 아느냐?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이 연모와 친애의 정에서 한 방울 연민으로 작아져 가는 와중에도 너는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하는데, 나는 그것을 원망하면서도 사랑하고 만다. 그러므로 나를 동정해 다오. 불쌍한 자라며 연민해 다오. 내가 그 연민에 뿌리를 박고 황무지의 들풀처럼 살 것이다.
레드의 목소리는 낮고 진중하였다. 그가 저런 어조로 말할 때면 말의 태반은 거짓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이상할 만큼 진심 같았다. 이미 말라 죽었어야 할 풀이 어째서 살아있나. 도키는 그 외엔 별 감상을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맞잡은 손가락은 여전히 차갑다. 레드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 온다. 머리카락이 사락거린다. 레드가 눈을 감는다. 그는 친구에게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로 했다. 도키는 그것을 안쓰럽다고 느끼고, 연민하는 자신에게 놀란다. 깍지 낀 손가락이 더 꽉 쥐어진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